순희가 병원에서 일한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원래는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일이 끊기면서 뭐든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력서를 넣은 첫 병원에서 바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3개월 안에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어느샌가 의외로 적성이 잘 맞는다는 것을 발견하곤
더 이상 이력서를 넣지 않기로 했다.
자꾸 이력서를 넣고 있다 보면 지금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고
자꾸 불평하게 될 것 같아서 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은 매일 이력서를 보내고 매일 거절 이메일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이기도 했다.
순희는 병원에서 일하면 이렇게 많은 커피랑 점심협찬이 들어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순희는 아주 옛날에 척추교정사 병원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지만 그때는
이런 호화를 느껴본 적이 없기에 나름 꿀 직장이라고 생각했다.
일찍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며 바쁘지 않은 시간에는 주로 전자책으로 책을 봤다.
아무리 바쁘지 않은 의사 사무실이라고 해도 대놓고 책을 펴서 볼만큼 간이 크진 않았다.
의사 부부는 젊은 사람이었다. 요즘의 젊은이답게 미친 듯이 환자를 늘리려고 하지도 않고
적당히 여행 다니면서 워라밸을 지키면서 사는 쪽에 가까워 병원 분위기도 차분해고 깨끗했다.
와이프는 오피스 매니저 겸 앞에서 환자응대를 맡았고 주로 환자들의 심리상담사 역할을 했다.
실제 정신의학과 선생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로 대부분 사람들의 넋두리를 다 들어줘야 했고
호응해줘야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인지 도무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기억하지를 못했다.
순희가 몇 번이고 이야기했던 얘기를 매번 들을 때마다 처음 듣는 사람처럼 반응했다.
그러다 보니 순희도 더 이상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됐고
그냥 소소한 담소 정도만 나누고 각자 일에 집중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이 없는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전화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병원입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선생님 계셔요?"
"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아, 선생님 있냐고요?"
"네, 있으신데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갈게요. 선생님 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툭 끊긴 전화. 예약도 안 하고 언제 오겠다는 말도 없이 툭...
목소리를 듣고 순희는 바로 또 진상이구나 생각했다.
병원에도 블랙리스트 환자들이 있었다.
가끔 아무 이유 없이 짜증 내는 환자들도 있고
유난히 무례한 사람들도 있었다.
순희는 그들이 몸이 아파서 그런 거라고 이해하면서도 화가 났다.
잠시 후 어떤 환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딱 봐도 누군지는 알았지만 순희는 모른 척하고 사무적으로 물었다.
이런 진상들을 상대할 때는 순희는 더 딱딱하게 사무적으로 굴때가 많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xxx"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늘 선생님 뵙고 싶으세요?"
"뭘 그리 꼬치꼬치 물어봐요. 아프니까 병원에 왔지. 참... 온몸이 아파요!!"
"네~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순희는 내가 이 꼴을 보려고 공부를 했나 회의가 들어서 화가 났다.
이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하지 싶어 조금 있다가 이력서를 또 넣어야지 생각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한 공부도 짜증이 났고
그 학자금대출을 아직도 물고 있는 것도 짜증이 났다.
똑같은 사무실에서 시간을 흘러가고 일은 하는데
왜 자기가 원래 하던 일의 1/3을 받아야 하는지도 화가 났다.
대기실에 들어간 환자가 나와는 다르게 의사 선생님과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는
순간 "저 사람 참 천박하구나"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읽고 있던 소설 책중 한 대목에서
아 이 부분에는 "천박"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천박"하다는 단어가 꽤 거슬렸던 건지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이 순간 그냥 순희한테 그 환자가 "경박"한 것이 아니라 천박하다는 단어로 다가왔다.
의사한테는 아이고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존대하면서
의사가 아닌 앞에서 일하는 직원한테는 무례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 이 사람의 천박함이 싫었다.
환자는 진료를 보고 다시 나와서 또다시 우리 병원 심리상담사인 의사 아내를 붙들고
한참을 한바탕 자기 하소연을 30분 동안 하고는
전문의 만나러 가야 하는 거 때문에 카운터 가까이로 오셨다.
의사도 만났고 한풀이도 하셨으니 다소 화가 누그러진 상태라 그런지
환자는 다른 사람처럼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누군가 그랬다. 나이 든 사람들은 어린아이와 같아진다고.
하지만 어린아이는 귀엽기라도 하지 나이 든 어른의 생떼와 무례는 전혀 귀엽지가 않았다.
환자가 나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순희도 친구한테 한바탕 한풀이를 하고
그 환자 너무 천박한 거 아니냐고 실컷 욕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한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생각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이튿날 그 사람의 차트를 보니 그분 나이가 81살이었다.
81살 치고는 쌩쌩해 보이고 기운도 넘치길래 전혀 그 연세로 보지 못했었다.
순희는 81살에 몸도 아프고 옛날 같지 않은데 다 귀찮을 만도 하겠다 싶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화딱지가 날만도 할 것 같았다.
에잇, 나는 늙어서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다시 돌아보면 병원에 오는 나이 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인 것 같았다.
먹고 싶어도 잘 먹지 못하고, 입맛도 없고, 옆에 자녀들도 없고, 몸은 아프고
참 늙어가는 건 매 순간 너무 슬픈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그랬다. 노후대책이 없는 노후는 재앙이라고.
순희는 내가 늙으면 어떤 꼬장꼬장한 할머니가 될까 생각해 봤다.
너무나 당연하게 김혜자 선생님 같은 할머니는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품위를 지키면서 나이가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직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어서 순희는 이 사람들을 더 관찰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