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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비스 Sep 08. 2022

나는 부서지지 않았어요

그냥 조금 도움이 필요할 뿐이에요



 양극성장애가 관해기에 접어들기까지는 처음 증상이 나타나고 대략 2년에서 3년 정도를 무탈하게 보내면 관해(일상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증상이 감소되어 사실상 완치나 다름없는 시기)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그 관해도 전체의 15% 정도에게만 주어진다. 나머지 85% 환자는 재발과 악화를 반복하거나 만성적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나는 내가 양극성장애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웠다. 그나마도 어렵사리 받아들였는데 나를 괴롭히던 증상이 호전되고나면 병식을 일부 잊어버리고 재발했을 때 이 사실을 다시금 깨달아야 하는 멍청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관해기에 이르는 15%가 아니라 재발과 악화를 반복하는 85%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날은 나와 조금 친해졌던 다른 환자가 개방병동으로 자리를 옮기는 날이었다. 짐을 챙기고 병동을 나서면서 잘 지내라고 인사를 서로 주고받기는 했지만 남겨진 나는 적지 않은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나는 언제까지 이 곳에 있어야 할까. 언제까지고 이 곳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앞으로 얼마나 더 이 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저녁을 먹고 병동 복도 한 켠에 서서 창 밖을 바라봤다. 창문 밖으로는 내가 숱하게 다녔던 시내가 보였다. 내가 몇 달 남짓을 버텼던 첫 회사의 건물도 보였다. 그 풍경을 보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창문 아래 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누가 알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간호사님이 오셔서 안정실에 가서 얘기하자고 하시길래 거긴 절대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또 강박을 당하고 안정제 주사를 맞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자타해 위험은 없는 것으로 판단하셨는지 그러면 안정실 말고 상담실에 가서 얘기하자고 하셔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두 생각나지는 않지만 이 말을 했던 것은 기억난다. 나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인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어쩌다가 망가지고 부서진 것인지 모르겠다고. 그 말에 간호사님은 조금만 더 있어보자, 여기에 있는 이유는 밖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망가지거나 부서진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것 뿐이다 라고 하셨다.


 이 말을 한참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최근 디즈니플러스의 마블 드라마 <문나이트>에서 주인공이 하는 대사를 듣고 이 말이 생각났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있는 주인공이 "너를 선택한 것은 이미 마음이 부서졌기 때문일거다"는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이 부서진게 아니에요. 그냥 도움이 필요할 뿐이죠."라고 말한다.


 그 당시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정말로 마음이 부서진 것이 아니라 그냥 도움이 필요한 것 뿐이다. 그냥 그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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