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조금 도움이 필요할 뿐이에요
양극성장애가 관해기에 접어들기까지는 처음 증상이 나타나고 대략 2년에서 3년 정도를 무탈하게 보내면 관해(일상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증상이 감소되어 사실상 완치나 다름없는 시기)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그 관해도 전체의 15% 정도에게만 주어진다. 나머지 85% 환자는 재발과 악화를 반복하거나 만성적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나는 내가 양극성장애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웠다. 그나마도 어렵사리 받아들였는데 나를 괴롭히던 증상이 호전되고나면 병식을 일부 잊어버리고 재발했을 때 이 사실을 다시금 깨달아야 하는 멍청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관해기에 이르는 15%가 아니라 재발과 악화를 반복하는 85%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날은 나와 조금 친해졌던 다른 환자가 개방병동으로 자리를 옮기는 날이었다. 짐을 챙기고 병동을 나서면서 잘 지내라고 인사를 서로 주고받기는 했지만 남겨진 나는 적지 않은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나는 언제까지 이 곳에 있어야 할까. 언제까지고 이 곳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앞으로 얼마나 더 이 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저녁을 먹고 병동 복도 한 켠에 서서 창 밖을 바라봤다. 창문 밖으로는 내가 숱하게 다녔던 시내가 보였다. 내가 몇 달 남짓을 버텼던 첫 회사의 건물도 보였다. 그 풍경을 보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창문 아래 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누가 알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간호사님이 오셔서 안정실에 가서 얘기하자고 하시길래 거긴 절대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또 강박을 당하고 안정제 주사를 맞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자타해 위험은 없는 것으로 판단하셨는지 그러면 안정실 말고 상담실에 가서 얘기하자고 하셔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두 생각나지는 않지만 이 말을 했던 것은 기억난다. 나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인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어쩌다가 망가지고 부서진 것인지 모르겠다고. 그 말에 간호사님은 조금만 더 있어보자, 여기에 있는 이유는 밖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망가지거나 부서진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것 뿐이다 라고 하셨다.
이 말을 한참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최근 디즈니플러스의 마블 드라마 <문나이트>에서 주인공이 하는 대사를 듣고 이 말이 생각났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있는 주인공이 "너를 선택한 것은 이미 마음이 부서졌기 때문일거다"는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이 부서진게 아니에요. 그냥 도움이 필요할 뿐이죠."라고 말한다.
그 당시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정말로 마음이 부서진 것이 아니라 그냥 도움이 필요한 것 뿐이다. 그냥 그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