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축복받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이... 이거.. 축ㅂ..... 축복해주ㅅ.... 세요....

by 울새


천주교에서는 탁고상이나 벽고상, 기도용 손십자가상과 같은 십자가상이나 묵주와 같은 성물은 신부님의 축복을 받아야 성물이 된다. 축복을 받기 전까지는 그냥 십자가 모양의 물건, 구슬줄 정도지만 축복을 받고 나면 성물이 되어 신앙이나 기도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집이나 차 축복은 성당 사무실을 통해 문의해서 축복받으면 되지만 성물 축복은 보통 미사가 끝나고 신자들이 나올 때 신부님과 수녀님께서 돌아가는 신자들과 인사를 하시는데 그 때 가서 축복을 받거나 또는 성당에서 신부님이 보이실 때까지 기다리다가 신부님이 다니시는걸 보면 그 때 다가가서 축복받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후자는 쉽지 않고 축복을 받을 확률도 낮기 때문에 대체로 전자를 택하곤 한다. 아니 첫 번째 방법대로 하는 것이 보통이며 일반적이다. 두 번째는 운도 따라줘야 하고 타이밍도 맞아야 하니 운과 타이밍이 어쩌다 모두 맞으면 모를까, 보통의 방법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나는 상당히 내향적인 인간이다. 막상 친해지거나 정말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눈 앞에 있으면 눈이 돌아가서 부끄러움이고 내향이고 뭐고 없이 돌격상태가 되어버리지만 딱히 그런게 아니라면 상당히 말수도 없고 조용하며 말 걸기는 커녕 눈 마주치기도 어려워하는 성격이다. 그런 성격 탓인지 사람들은 나에 대해 친해지면 재밌고 시끄럽지만 친해지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물 축복에 대해 말한 것은 내 작업대 위에 있는 작은 탁고상 하나 때문이다. 명동성당 바로 옆 가톨릭회관에 있는 가톨릭출판사에서 산 것인데, 구매한 날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오면서 신부님께 축복을 받으려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 미사를 드리지 못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처음에는 아쉽지만 다음주에도 성당을 가니까 다음 주일에 가서 축복받으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각은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


신부님에게 성물 축복을 받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며 악의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면서 친근하게(?) 신부님에게 다가간 다음 축복받을 십자고상이나 묵주를 내밀면서 축복해주세요 라는 말을 하고 축복을 받은 뒤 인사를 하고 내 가던 길을 가면 된다. 글로 적어놓고 보면 이게 뭐가 어렵냐고 할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나 앞서 말했듯 나는 심각한 내향인이기에 모르는 신부님에게 축복해주세요 하며 탁고상을 내미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기간동안 묵주나 다른 성물을 축복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탁고상을 사서 작업대 위에 올려둔 기간동안 5단 묵주 하나, 1단 팔찌묵주 두 개를 각각 따로 축복받았다. 만약 그 때 내가 집에 있는 탁고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탁고상도 축복해주세요 라고 말하며 내밀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세 번 모두 당일에 묵주를 사고 미사를 드린 뒤 축복을 받을거라 예상한 것은 아니었기에 당연 탁고상을 가지고 갔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 이런저런 일이 겹치고 주임신부님께 뜬금무 이거 축복해주세요 라고 말하기가 너무 낯설고 왠지 눈치보여서 더더욱 축복받기를 미뤘던게 아닌가 싶다.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고 대책없이 탁고상에 먼지가 쌓이도록 미루었지만 이제 더는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짜피 이제 나에게 뒤로 돌아가기 옵션은 없다. 무엇이 어떠하던 내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에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나는 종교의 자유에 따라 성당에 가겠다고 선언했고, 반갑지 않게 보며 저러다 몇 번 가고 말겠지 하던 부모님의 눈빛에 엉뚱한 오기가 발동했다. 이왕 갈 거면 제대로, 확실하게 하자. 그리고 노빠꾸로 가자. 하고.


그래서 성령강림대축일 전야 주일미사를 드리러 가는 길에 작업대 위 탁고상을 들고 나가서 미사를 드리고 미사가 끝난 뒤 가방에서 탁고상을 꺼내어 들고 계단을 내려와 나오는 길에 주임신부님에게 쪼르르 가서 안녕하세요 이거 축복해주세요 라고 말하며 들고 있던 탁고상을 내밀었다.


내 말에 신부님은 흔쾌히 축복을 해주셨고 그 자리에서 본의아니게 신부님과 스몰토크 아닌 스몰토크를 짧게 했다. 지난 주 본당 주보에서 성모의 밤 날짜와 요일이 맞지 않아 주보를 들고 가서 여쭤보면서 제가 예비신자인데요, 참여해도 되나요? 하는 웃기고도 멍청한 질문을 했던 것을 기억하시는건지 예비신자교리를 듣고 있냐고 물어보셔서 4월부터 명동성당에서 듣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눈 뒤 인사를 하고 성당을 빠져나왔다.



출처는 내 인스타(@bipolar_paroo) 스토리


그렇게 해서 나름의 우여곡절 끝에 내 작업대 위의 탁고상은 십자가 모양 물건에서 축복을 받은 성물이 되었다. 어째 주임신부님에게 찍힌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일단 성물 축복받기 미션을 클리어했다는 생각에 조금은 속이 시원하다.


뭐가 어찌되었던 나는 새로운 세계관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그것도 내가 오고 싶어 자발적으로 온 낯선 세계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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