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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Aug 16. 2018

가난한 노래의 씨

안희정 무죄판결을 바라보며

8월 14일 안희정에게 무죄가 선고되었고 8월 15일 나는 휴가를 떠났다. 밀린 일을 해놓고 가느라고 (결국 다 못함…)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 소식을 접하였고 차마 그 대구 남자라는 판사가 정조 운운한 판결문을 다 읽지는 못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엄마에게 “오늘 안희정 선고날이네“하니 엄마는 “그거 불륜 아니야?”라고 하셨다. “그게 위력을 이용한 강간이지 어떻게 불륜이야!”라며 화를 냈다. 엄마는 내가 화를 내면 맞서서 화를 내지 않는다. 엄마는 똑똑한 딸에게 자신의 주장을 굳이 내세우지 않고 다만 뒤돌아서서 궁시렁거리는 타입이다. 엄마는 노회찬의 죽음에 슬퍼하고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을 같이 마음 아파하는 사람인데, 왜 안희정은 강간범이 아니라 불륜녀에게 발목잡힌 불행한 정치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엄마도 그렇게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엄마는 직장생활을 많이 안해봐서 그런 걸까. 하지만 “왜 그걸 강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해? 직장 다니는 여자가 어떤 걸 겪는지 엄마가 알아?”라고 묻는다면, 그건 엄마의 삶을 무시하는 말이 될 것이다. 또는 딸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도대체 어떤 걸 겪은 걸까 상상하면서 슬프게 만들겠지.

8월 14일 오후부터 내내 분노에 휩싸인 상태였지만 나는 남편에게밖에 그 분노를 쏟아내지 못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그런 일을 당했던 적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물론 주변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은 적은 있지만. 내가 이 사건에 분노할 수록 나에게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남들이 여길까봐 그 분노를 쏟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아해졌다. 사기, 강도, 살인같은 일반적인 범죄에 대한 분노는 내가 그 처지에 있어야, 당해본 적이 있어야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를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으로 여긴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왜 성범죄에 대한 공감은 굳이 개인적인 이유가 있어야 할 수 있다고 여기고, 나 스스로조차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가 싶어 경험을 되짚어 찾아보게 되는 것일까. 내가 그녀와 같이 위계질서가 있는 직장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서 엄마보다 공감을 잘 할 수 있는 것일까. 꼭 그런 것만도 아닐 것이다. 그냥 이 사회는 큰 뜻을 품고 세상을 바꿔보려는 남자에게 더 공감을 잘 할 수 있도록 길들여진 것 뿐이다. 또한 ‘꽃뱀‘이라는 실제로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상상 속의 여성에게 당하는 남자의 이미지는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재생되어 왔다. 성범죄를 당하고 모멸감에 괴로워하는 여성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성범죄를 당하고 유린당한  나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되찾기 위해 일어서는 여성의 이미지는 그것이 실재로 존재하였는지와 별개로 이 사회에서 일찍이 대다수에게 목격된 적이 없다. 


휴가 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최근 작고하신 황현산 선생님의 <사소한 부탁>을 읽었다. 그리고 ‘닭 울음 소리와 초인의 노래‘를 읽으며 울었다. 승무원을 부르기 어렵기도 하고 민망해서 물과 함께 건네받은 냅킨 한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눈가를 찍었다.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는 이육사의 <광야>의 한 행에 대한 논쟁으로 글은 시작한다. 닭 우는 소리가 들렸고 안 들렸고가 그리 중요한가. 황현산 선생님은 그것을 ‘천지가 개벽하는 순간, 하늘이 어떤 지고한 소리를 울려 자신을 진리 그 자체로 선포하고, 신성한 뜻을 가르쳐 인간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미리 정해놓았던 것은 아니라고 시인은 생각한다‘고 해석한다. ‘천지가 단지 그렇게 열렸을 뿐 어찌 지엄한 닭 울음 소리 같은 것이 들렸겠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제 운명을 제가 설계해야 하며, 제 노래를 스스로 만들어 불러야 한다. 하늘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그 진보를 믿는 자인 육사의 의지가 바로 그렇게 한 ‘땅의 역사‘로 표현된다.’인간의 의지, 인간의 역사, 진보에 대한, 어쩌면 그리 새롭지도 않은 말이 왜 그렇게 마음을 울렸는지를 생각해보니 김지은씨가 재판 후 밝힌 입장문의 말들과 겹쳐졌기 때문인 듯 하였다. 육사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는 기차간에서 구상했다는 이 시는, 이 어처구니 없는 그러나 기존의 법질서 하에서는 익히 예상되었던 판결을 마주한 이 땅의 여성들에도 눈물을 머금은 힘과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을 준다. 하늘 아래 여자는 이러해야 한다는 자연의 섭리, 닭 울음 따위는 없었으니 인간인 여성의 힘으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하루가 바로 8월 14일이었음을, 우리는 김지은씨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제가 굳건히 살고 살아서, 안희정의 범죄 행위를 법적으로 증명할 것입니다. 권력자의 권력형 성폭력이 법에 의해 정당하게 심판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저를 지독히 괴롭혔던 시간이었지만 다시 또 견뎌낼 것입니다. 약자가 힘에 겨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세상이 아니라, 당당히 끝까지 살아남아 진실을 밝혀 범죄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초석이 되도록 다시 힘을 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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