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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May 18. 2019

자아도취자의 고백

글을 쓸 때면 종종 빠지곤 하는 함정이 자아도취입니다. 혹시 저만의 함정인 것만은 아니겠지요? 글을 쓰는 이들의 대부분이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사려깊게 보고 읽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제가 글을 쓰면서 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인 것 같습니다. 현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 늘 문제이지만요.

바쁜 일상 속에 늘 사려깊을 수는 없습니다. 사려깊지 못한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의도로 글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글을 쓰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나의 좋은 점만을 드러내는 글을 쓰는 것이 어떤 점에선 자아도취의 산물이긴 하나, 나쁜 것만은 아닌것도 같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아니 쓰면서, 저는 사려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왜 선생님은 그렇게 저만 보면 그런 표졍을 지으세요?"

감정이 북받친 40대 여성이 문득 나지막히 부르짖습니다. 눈은 촉촉히 젖어있습니다. 아. 뭔가 잘못되었구나 직감합니다.

간에 재발이 되었다고 설명한 이후부터 '이전부터 그곳이 아팠다'며 원망하듯 이야기하던 분이었습니다. 환자분 이 정도의 작은 간 전이는 통증을 일으키지 않아요. 아프신 건 다른 이유일 거에요. 항암치료를 시작했으니 간 전이는 좋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하지만 당장 아프신 건 아프신 것이니 진통제를 써서 조절을 해보지요. 진통제가 잘 듣지 않아요. 그럼 약을 바꿔보지요. 아니에요 다른 거 먹어도 비슷할테니 그만둘래요. 그런데 왜 이렇게 여기가 아파요? 정형외과로 가보시겠어요? 아무튼 암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되돌이표만 그리는 문답 과정 속에 저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었나봅니다.

그래서 오늘 들어오자마자 환자가 던진 '도대체' 제 몸의 어디 어디에 전이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버튼이 눌렸습니다. '도대체'라니요. 그동안 몇 번을 설명을 했잖아요. 마치 내가 아무런 설명없이 약이나 처방하는 사람처럼 묻고 계시네요. 속으로 이런 말들은 삼켰지만 표정에서는 숨기지 못했나봅니다.

한숨을 푹 내쉬며 환자의 상복부를 가리키며 여기, 여기, 여기 있어요! 하고 내지르고는 되돌아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결국 환자의 감정이 울컥, 쏟아져나와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싫은 표정만 짓고 계시면 제가 어떻게 치료를 받아요!"

"정말 속상해요 여기 올때마다!"

그녀는 여러가지 분노의 말들을 쏟아내었고, 결국 눈물을 보였지만, 저는 뭐라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없는 사과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맞서서 화를 낼 수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외래가 끝난 후에도 계속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민원을 넣겠지. 의사를 바꿔달라고 할지도 몰라. 고객상담실에서는 나의 태도에 대해 소명하라는 메일을 날리겠지. 요즘 인사철인데. 이런 것때문에 승진이 안되면 어떡하지. 아아 정말 어디까지 인내해야 하는 것일까. 어디까지 설명하고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 것일까. 다음에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뭐라고 얘기해야 하는 것일까. 예전같으면 페이스북에 친구공개로 마구 이런 감정을 배설하고, 대부분 의사인 페친들은 고생했다고 한마디씩 추임새를 넣어주고, 이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을 지도 모릅니다.

되돌아보니 이럴 때는 기다려야 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때 함부로 감정을 배설하지 못한 이유는 나도 잘못했다는 자각이 살아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앞에서 한숨을 쉬고 소리를 지르듯 말하는 일은 상대방의 자존감을 형편없이 망가뜨리는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적어도 나에게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의사에게 영업용스마일까지 장착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환자의 입장에서 담당의사의 굳은 표정이 얼마나 큰 불안과 좌절을 안기는지는 사실 몇 번 안되는 환자로서의 경험을 떠올려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암이라는 위중한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의사의 말투, 몸짓 하나하나의 의미는 그의 마음에 알알이 들어와 고통스럽게 박히고 있겠지요.

어떤  환자의 말과 행동이 내 맘에 들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는 환자이고 나는 의사입니다. 권력이 절대 균형을 이룰 수 없는 관계. 그의 몸에 대해 그 자신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고 그 몸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검사와 치료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사람으로서 나는 적어도 그보다는 더 신중했어야 했습니다.


2주가 지나고 다음 진료일이 다가왔습니다. 조금 긴장한 마음으로 억지로 얼굴을 펴면서 진료실 문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환자는 의외로 환한 얼굴입니다.

"선생님 그동안 잘 계셨어요?"

"아 네..."

"이전엔 제가 좀 흥분한 것 같아요.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아... 저도 죄송했습니다. 제가 좀 함부로 말씀드린 것 같아요."

환자도 그동안 한참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환자가 민원을 넣을지도 모른다는 저의 불안보다는, 담당의사와의 관계가 틀어지면 치료가 잘 안될지도 모른다는 그의 불안이 더 컸겠죠. 이 일이 머릿속에 맴돈다고 해도 저에게 그는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입니다. 계속되는 일들, 바쁜 일상 속에서 외래 중 일어난 사건 하나의 앙금을 떨쳐버리는 것은 의외로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암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의사와의 관계의 균열이 가져온 상처는 더 컸을 것입니다. 하루빨리 복원하고 싶었을 지 모릅니다. 그 마음이 경직된 얼굴의 근육을 기꺼이 풀어주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습니다. 제 표정은 떨떠름했었지만, 마음은 그보단 더 많이 죄송했었노라고. 그리고 당신이 터뜨린 분노는 저를 더 생각하게 하고 성장시켰었다고. 종종 일상 속에 잊어버리곤 하는 이 일의 무게를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많은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고 후회하는 과정, 제 자신 역시 상처받는 경험들을 통해 저는 좀더 배웠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좀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세상에 배울 것들은 많은가 봅니다.


이렇듯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도 결국 잘 마무리된 이야기를 골라서 쓰는 것이 저의 한계입니다. 자아도취자의 현실은 사실 좀더 시궁창이지요. 그러나 분명 내가 보여주고 싶은 좋은 사람으로서의 모습에, 쓰지 않을 때보다 씀으로써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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