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coAzim Apr 14. 2019

울어도 괜찮아요

요즘 내과 임상실습을 하러 온 학생들에게 <나쁜 소식 전하기> 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의환자를 섭외해서 학생들이 일대일로 면담하며 암 진단을 알리는 것을 관찰하고 피드백을 주는 방식입니다. 학생과 모의환자가 있는 면담실 옆에는 관찰실이 있고, 그 사이에는 관찰실에서만 들여다볼 수 있는 이중창이 있어서 여기서 헤드폰을 끼고 면담을 관찰하게 됩니다. 마치 취조실 같은 구조인데 은근히 재밌습니다.

<나쁜 소식 전하기>는 의사국가고시에 2009년부터 도입된 실기시험에서 진료수행능력을 검증하는 50여개의 항목 중 하나입니다. 시험과목인 것이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지요. 좋은 것은, 예전이라면 공부에 치여 관심을 갖지 않았을 (제가 그랬으니까요. 제가 면허를 따던 시절엔 필기시험만 보면 되었습니다.) 이런 면담들도 진지하게 대하고 열심히 연습한다는 것입니다. 암 진단을 받은 환자에게 처음부터 불쑥 진단을 내뱉지 말고, 감정적으로 준비가 된 상태에서 명확히 전달하되, '힘드시죠', 한 마디 정도는 건넬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쁜 것은, 이 모든 것을 시험으로만 대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점수가 깎이나요?' '이 증례는 빨리 파악하기 어려운데 정말 시험에 이렇게 나오나요?' 라며 저에게 묻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마치 국가고시 입시강사가 된 듯한 기분입니다.

모의환자는 연기를 꽤 잘합니다. (일반인들도 있지만, 전문배우들이 부업으로 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설정된 시나리오에 매우 몰입하시기 때문에, 어떤 학생들은 면담이 끝나고도 저분이 정말 환자냐고 겁을 먹고 저에게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암이라는 소식에 처음엔 본인이 아닐 거라고 부정하다가, 좀더 빨리 진단되지 않았음에 분노하다가, 자책하며 슬퍼하고, 가족들을 생각하며 깊은 상심에 빠지는 모의환자 앞에서 학생들은 점점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난처해하고, 목소리가 잦아들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질병의 생존률과 치료계획까지 환자에게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실습의 목표입니다.   

이번주 실습을 온 한 학생은 표정과 몸짓, 말투에서 모두 다정함과 사려깊음이 묻어나오는 친구였습니다. 대개의 다른 학생들과 같이 도입부, 환자의 질병에 대한 인식 확인, 나쁜 소식을 예고한 뒤 명확히 전달하는 것까지는 잘 했습니다. 대개 문제는 환자가 감정을 터뜨린 이후입니다. 슬픔과 분노가 몰아치는 동안 학생은 뭐라 말을 잇지 못했고, 겨우 더듬거리며 치료계획에 대해 설명하겠다고 말을 꺼내었지만 어린 자녀를 걱정하는 모의환자의 이야기에 다시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모의환자와의 면담이 끝나고 그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연기에 몰입해서 면담이 종료되기 직전까지 눈물을 흘리던 모의환자는 학생의 눈물이 가득한 눈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보는 순간 이윽고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지요. 모두가 이게 가짜라는 걸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슬플까요. 민망하면서도 방금 전까지 몰입하고 있던 그 순간의 슬픔이 털어지지 않아, 웃다 울기를 반복하다가 서로를 위로합니다.

그리고 이중창 너머에서 그 순간을 바라보던 저도 키득거리다가 문득 눈물이 났습니다. 그동안 지나갔던 수많은 죽음과 고통들, 더 이상 내가 해줄 것이 없다는 무력감, 눈물을 참지 못했던 순간들, 그러고는 스스로를 바보같다 자책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환자가 마주친 상황이 안타까워 울 때도 있었지만, 내가 한심해서, 힘들어서, 비참해서 울어야 했던 시간도 많았지요. 인턴때 응급실에서 울던 저를 쳐다보며 저 애는 여려서 앞으로 환자 보는 일은 어렵겠다고 혀를 차던 선배 내과 선생님도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그분보다 제가 더 위중한 환자들을 보고 있지만요) 저 아이가 앞으로 생과 사가 오가는 공간에서 견뎌내야 할 수많은 슬픔들의 무게는 어떤 것일까 생각하니 눈물이 계속 차올랐습니다. 아아, 저 아이가 곧 관찰실로 들어올텐데 어떡하죠.

결국 그동안 울었던 것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붉은 눈을 하고 체크리스트를 같이 보며 무엇을 잘했고 못했는지 얘기합니다. 차마 서로의 눈을 바라보진 못했습니다.

"환자가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면담 정리하는 것 조금 빠뜨리셨네요."

"네 제가....환자가 생존률이 30%라고 하는데 어린 딸이 있다고 하니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

"잘 하셨어요. 저도 종종 그래요. 내 꼴 좀 봐...(웃음)”


괜찮아요. 눈물이 많아 고민인 아이도 결국 의사가 되었고 아직도 울 줄 아는 인간인 것이 다행스럽답니다. 실은 점점 더 스스로를 지키느라 눈물이 메말라갈 지도 몰라요. 앞으로의 길고 긴 의사 생활 동안 오늘의 눈물을 기억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점점 더 좋은 의사가 될 것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