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에 청년의사에 기고했던 글인데... 지미카터 옹이 94세 생신을 맞이하였다는 뉴스를 접하니 문득 생각이 나서 옮겨싣습니다. 키트루다의 효과는 놀랍군요. 그러나 아래 글에 등장한 환자분은 아마 돌아가셨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직장암엔 키트루다도 효과가 없으니 같은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암의 생물학적 차이보다 사회경제적 요인이 환자의 생존기간엔 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http://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newscd=2015121600045
직장암 수술을 하고 재발한 60대 남자 환자가 3개월만에 검진을 위해 오는 날이다. 처음 폐 전이가 생겼다고 말씀드린 날이 벌써 일년전이다. 평소 성격을 보았을 때 화를 참지 못하고 터뜨리지 않으실까 생각했지만 오히려 예상보다는 허탈한 표정이었다. 항암치료는 급하진 않으니 추이를 보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직장암은 방사선치료, 수술, 보조항암치료, 장루복원수술까지, 치료 종료까지 8~9개월이 걸린다. 치료를 마치고 나서도 환자들은 잦은 배변과 변실금으로 인해 힘들어 심신이 지쳐있다. 치료를 미루더라도 조금이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을 드리고 싶었다.
그동안 폐 결절은 점점 소리 없이 커졌고 직장암의 골반재발로 의심되는 병변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은 증상이 없지만, 암 진행으로 인해 증상이 생기기 시작하면 너무나 힘든 상태가 된다. 그 전에 항암화학치료는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완치는 어렵고 치료 부작용도 견디기 쉽지는 않지만, 당장 암이 진행되어 증상이 생기는 것보다는 낫고 수개월에서 1~2년까지는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지난번에 항암치료 받으실지 가족들과 상의해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얘기해보셨나요?”
“얘기 안했어요. 못하겠더라고요.”
“…가족분들도 병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시고 준비를 하셔야….”
“얘기해봐야 속만 상하지…. 아들이랑 며느리는 연락도 안돼요. 딸한테 치료비 얘기하긴 미안하고….”
“네….”(배우자 말씀은 왜 안하시지, 의아해하며 간호조사정보지를 클릭해보니 ‘이혼’이라고 되어 있다.)
“내가 수술 끝나고 막노동일을 했거든요. 몇푼이라도 벌어보려고. 그것 때문에 재발된 것 같아요. 스트레스를 최대한 피해야 하는데….”
“꼭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암세포 자체의 성질이 좋지 않은 경우에 재발이 주로 일어나는데요. 스트레스의 영향이 재발을 일으킨다는 건 아직 근거가 없어요.”(라고 생각하며 과연 이 말을 환자가 이해할 수 있을지, 아니 지금 환자에게 의미가 있겠는지를 생각했다.)
“애들한테 짐 지우면서 더 살아서 뭐하겠어요. 어차피 완치도 안된다는데, 벌이가 없어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도 했는데 뭐 서류 넣는 것도 복잡하고 심사도 너무 오래 걸리고요.”
“네….”
“그래도 딸하고 얘기는 해볼게요. 중간에 치료받기로 결정하면 외래 예약해서 오면 되죠?”
“네 그러시죠….”
환자가 진료실에서 나가고 사회사업실에 의뢰를 내면서 의사라는 직업이 참으로 무력하게 느껴졌다. 치료를 하기로 결정한들 환자를 돌보는 것, 모시고 병원을 오가는 것, 부작용이 생겼을 때 응급실로 모시고 오는 것, 치료 중 경과를 상의하고 약을 바꿀지 말지 더 할지 말지 결정을 하는 것, 이런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과 금전과 정신적 소모, 아마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사회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할 것 같은 따님이 견뎌낼 수 있을지. 지친 나머지 왜 자신에게만 기대냐며, 연락이 안된다는 아들은 자식이 아니냐며 환자를 탓하지는 않을지. 항암치료가 효과가 있다 하여도 환자와 가족에게는 더 큰 심리적 사회적 고통을 주게 되지는 않을지. 환자가 딸과 상의하여 치료를 받겠다며 다시 온다고 해도 정말 이 치료를 진심으로 권유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내가 처방할 항암제는 표적치료제를 포함해 모두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약제들로 본인부담금 5%만 내면 투여받을 수 있는 약제들이다. 한달 약값은 10~20만원 정도 된다. 그러나 치료에 드는 가외의 비용과 시간, 고통은 5% 본인부담이 적용 되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모든 동원가능한 사회경제적 자원을 그러모아 투자할 수 있어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비싼 표적치료제들이 보험급여가 되어도 치료의 불평등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90세가 넘는 연세에 전이성 흑색종을 진단받고 투병중인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완치’되었다는 기사가 최근 뉴스 포털을 장식했다. 뇌에 전이된 흑색종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완전관해를 얻은 것은 축하할 일이나 ‘완치’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수준인지는 의문이긴 하다. 아무튼 그가 투여 받고 있는 면역관문차단제인 키트루다는 장기적인 관해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알려져 있으니 완치를 기대할 수도 있기는 하겠다. 문제는 이 약제를 일년 투여받는 데에 1억5,000만원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사실이다. 그 비용을 카터 전 대통령 자신이 직접 냈는지, 보험회사에서 냈는지, 또는 공보험인 메디케어에서 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환자는 생각할 수 없는 고가의 치료를 그는 받았고, 계속 받을 예정이라는 것이다. 반면 60대의 내 환자는 보험적용이 돼 한달에 본인부담금 십만원 남짓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세상에 불평등이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초생활수급자 선정이라도 빨리 되어서 환자가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치료받을 수 있게 해줄 수는 없을까? 그럼 무료간병인 신청도 가능하다는데. 환자나 노인, 장애인들에 대한 소위 사회적 돌봄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현실적으로는 약제가 비싸서라기보다는 환자를 돌볼 사회적 지지체계가 부족해서 치료를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이런 상황은 점점 더 늘어나는 느낌도 든다. 의료가 미래 먹거리 산업이라고 띄워주고 의료한류, 의료세계화 얘기가 나올수록 막상 현장 의료진의 눈에는 이런 환자들이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