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 아르테 2019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두 번째 페미니스트>를 읽었다. 즐겨듣는 팟캐스트’책읽아웃’에서 이 책을 추천했던 엄지혜기자는 표지가 워낙 “세어 보여서” 선뜻 손이 안갈 수도 있겠다며 염려를 했었는데, 처음 책을 대했을 때 내 느낌 역시 빨강과 노랑의 배색, 명조체 제목의 표지디자인이 좀 아쉽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어가면서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갔다. 왜 그런 표지를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일상의 투쟁의 기록이구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성과와 효율이라는, 사회의 기본 틀에 대한 온몸의 저항의 기록이어서 이런 역동적인 곡선과 색깔을 택했구나. 표지의 일렁이는 붉은 색 파도처럼 그의 말과 실천의 힘이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라고 쉽게 말하기는 스스로를 돌아볼 때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나의 생활과 소비의 방식은 그가 보여준 대안과 너무나도 동떨어져있다. 한 달에 백만원이면 산다는, 보다 공동체와 육아에 집중하기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그의 가족이 몇 개월은 먹고 살 만한 금액을 일주일의 휴가에 날리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느껴지는 부끄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여행에선 카드혜택도 잘 이용하고 꼭 제대로 스노클링을 하고 말겠다는 다짐으로 필요한 준비물을 적어놓는 나. 한달에 백만원 넘는 금액을 두 아이의 과외비로 지출하고 있는 나. 새로운 삶의 방식에는 공감하면서도 그것을 일부라도 내 공간으로 들여놓지 않는다면 이런 책을 읽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지.
한편으론 녹내장을 앓아 실명에 가까워진 아내를 위해 침술과 디톡스, 양생술을 익히는 것, GMO 농산물을 먹지 않는다는, 뭔가 자본주의를 피해 극단으로 가다보면 만나는 안아키 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도 하여 마냥 공감할 수만도 없는 또다른 내가 보인다.
하지만 책표지의 성난 빨간 파도는 독자를 힐난하거나 꾸짖지 않는다. 처음 줄을 그은 문장은 ‘나는 여전히 흔들리지만 무너지지 않는다(책 25페이지)’였다. 이름에 어머니 성을 같이 쓰면서, 전형적인 남성가장의 역할과 달라서 받는 수많은 비아냥과 도전에 스스로가 굳건하지만은 않다는 고백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단어 역시 그는 사랑과 연결지어 이야기한다/198페이지) 여성적, 생태적, 반자본주의적 삶의 추구는 종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단단해지는 과정일 뿐이라고. (페미니즘은 언젠가 도달해야 할 세계의 이름이 아니다. 물음과 시도와 행위 속에서 늘 실현되는 것이다/ 책 291페이지) 그러니, 당신도 당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다는,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듯하다.
책은 대안적 삶을 위한 투쟁기라고만 말하기엔 아름다운 글들로 가득차있다. 시인 특유의 말의 리듬감을 살린 산문은 맑은 수면을 통통 경쾌하게 스쳐가는 듯한 즐거움을 준다. 임신과 수유를 거치는 아내와 아기의 탄생과 성장을 통해 그리는 생명의 묘사는 남성작가에서 흔히 보는 타자화된 시선 (‘젖무덤’ ‘신비’ 따위의 단어가 들어가는)의 끈적임 없이 담백한데, 그것은 그가 육아의 고단함과 즐거움에 온전히 ‘남성아내로서’ 잠겨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맘충”이라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쓰며 여성과 돌봄노동을 비하했던 친구에게 못다한 한 페이지짜리 빨간 분노 (빨간 활자로 씌여있다)는 일종의 청량감을 주기도 한다.
한편 차상위계층 신청을 하여 ‘능력없음을 증명하여 쌀을 받아오는’ 속상한 경험을 지켜보노라면, 전자차트의 환자 이름과 병록번호 옆에 있는 ‘의료급여1종’ 딱지로 그 사람이 원하는 치료의 목표와 가치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던 내가 떠오른다. 돈이 없으니 가성비 낮은 치료는 원하진 않을 거라는, 치료로 인한 소득의 손실을 최소로 만들어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늘 있었다. 그러나 경제력으로 구분되는 딱지만 가지고, 환자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고 나 스스로 만들어낸 일방적 압박이 아니었는지.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아니라 무능력을 증명하여 얻어내야 했던 쌀과 같은, 존중이 아닌 일방적 호의였던 셈이다.
어떻게 그가 보여준 삶을 내 삶에 조금이라도 담을 수 있을까, 의 고민으로 돌아가 보자. ‘책임’이라는 단어에 대한 그의 설명이 마음에 가장 많이 남는다. ,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에서 빗겨나 있어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책임감이 없다는 편견에 맞서 그는 “response”+ “ability”라는 단어의 어원을 제시하며, ‘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책임’이며 그것은 ‘타인과 함께 리듬을 맞추는 능력’이라 말한다. 아이들이 나에게 다가와 하는 재잘대는 이야기들을 경청하는 능력. “엄마 내 말 듣고 있어요?”라는 말 더 이상 나오게 만들지 않는 능력. 남편이 걷은 빨래를 말하지 않아도 개어서 서랍에 넣는 능력. 내 고단함을 신경질이 아니라 가족들이 알아듣는 단어로 표현하는 능력. 서로 반응하고 소통함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부터 시작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