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난 환자들을 기억하며
환자들이 주시는 선물이 종종 있습니다. 나름 마음을 표현하느라고 주시는 것이지요. 고맙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운 점이 더 많습니다. 암이라는 질병의 특성상 언제든지 나빠지고 재발할 수 있지요. 그런 상황에서 환자에게 받은 물건들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것이 염치없는 짓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을 빌미로 나에게 좀더 잘해줄 것, 신경써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어 괜히 찜찜하기도 합니다.
물론 의사에 '촌지'를 주는 문화는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기는 하였습니다. 30여년전 아버지가 암 수술을 받으러 입원하였을 때 어머니는 당시로선 큰 돈이었던 수십만원을 담당의사에게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게 관례라고 들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혹시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스러워서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의대생 시절 외과 실습을 돌 때 알게된 것은 이런 촌지를 관리하는 담당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지금은 없어졌겠죠) 각 병동마다 '엥'을 관리하는 역할은 바이스 치프, 즉 3년차 전공의가 한다고 했습니다. '엥'은 당시 속어로 촌지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어머니도 아마 3년차 전공의에게 돈을 건네셨겠지요. 바이스치프는 가정 같으면 예전의 어머니 역할을 했던 모양입니다. 4년차 치프는 수술장을 지휘하고. 3년차는 병동을 책임지고 일하며 ‘엥’을 모아다가 하루의 고된 일과가 끝나면 하루종일 밥을 먹을 새도 없이 일하던 1,2년차와 인턴들을 데리고 나가서 고기와 술을 사주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풍경이었지요. 환자들이 준 촌지는 그런 식으로 전공의들이 극한의 육체노동을 버티어나가는 재원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내과 레지던트가 되었을 때는 특실주치의를 두달 하면 엥을 받아 차를 한대 뽑는다는 얘기들도 공공연하게 하고들 했었습니다. 특실에 입원하는 부유한 이들 입장에서는 푼돈에 불과한 돈이었겠지만 대개 수백만원씩 담당전공의에게 성의표현을 하기 마련이었을 것이고 (그러면 교수에겐 얼마를 주었겠느냐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그것을 두달동안 모으면 소형차 한대는 뽑을 수 있다...그럼에도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쉽지 않으므로 특실주치의 역할이 그리 인기있는 것은 아니기는 했었습니다.
김영란법이 발효되기 이전에도 이미 촌지문화는 사회의 변화와 함께 많이 사라지고 있던 상태였지만, 이젠 받기 껄끄러웠던 촌지를 명확히 사양할 법적인 명분이 생겼으니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의사들이 많습니다. 제 직장같이 시스템이 갖춰진 대형병원에서는 법무팀에서 상당부분을 해결해주기도 합니다. 돈봉투나 선물을 주고 도망치듯 진료실을 나서는 환자가 있으면 환자의 인적사항과 물품을 인계하고, 법무팀에서 직접 환자에게 연락하여 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받고도 돌려주지 못하는 선물들도 있습니다.
돌려줄 사람이 이제 세상에 없는 물건들.
저는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 물건들을 쓰기도 합니다. 촌지보다는 유품으로 여겨지니까요.
이 지갑은 40대의 단정하고 아름답던 여성분이 준 것입니다. 이미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수차례 받고 오신 상황이었고 말기암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점점 말초부종이 심해지고 신장기능이 나빠지고 있는 것을 악성 림프부종에 따른 이차적인 장기부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협진의뢰를 내었던 신장내과 선생님이 흉부 엑스레이를 보고서는 다행히 진단을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악성 심낭삼출로 인한 심탐폰이었습니다. 심낭에 카테터를 꽂고 액체를 배출시킨 후 신기능은 물론 호흡곤란도 호전되었습니다. 저는 엑스레이를 제대로 보지 않아 오진을 하여 그녀를 위태롭게 만든 것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녀가 입원기간동안 고맙다며 선물로 준 지갑은 차마 쓸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야 저는 지갑을 꺼내 쓸 수가 있었습니다. 저의 부끄러운 오진을 기억하기 위해 지갑을 계속 써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갑은 매일 가지고 다니는 것이니, 볼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은 잊지 않을 수 있겠지. 7-8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을 보니,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지킨 것은 같습니다만 역시 진료를 하며 제대로 된 결정을 하였는지를 돌아보면 늘 부끄럽습니다.
이 양말인형은 늘 미소를 지으시던 50대 여자분이 주신 인형입니다. 그녀는 항암치료를 많이 힘들어했지만,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겨내려고 많이 노력하신 분입니다. 항암을 마친 후 쉬는 기간동안 양말로 인형을 만들었다면서 주고 가셨습니다. 제가 직장을 옮기기 직전에 재발을 하였고, 그 재발은 사실 상당히 높은 확률로 예상된 것이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녀의 낙심한 얼굴이 지금도 종종 떠오릅니다. 항암치료를 하면 손발이 많이 저리기 때문에, 수작업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인형을 만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볼 때마다 안쓰러워집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많지 않은 희망을 조금 더 부풀려서 얘기해야 했을까요. 재발의 위험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늘 상기시키며 준비를 시켜야 했었을까요.... 늘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저의 일상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완치와 죽음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사이의 삶을 잘 살아보자고, 함께 하겠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최선이었을 테지만 저는 가장 힘들 때 그분을 떠나야 했고, 아직도 그것이 너무나 미안합니다. 그녀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 객관적으로 가능성은 매우 낮기는 하지만- 너무나 기쁠 텐데요. 이 인형은 지금 제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입니다. 폭신폭신한 감촉이 좋아 매일 껴안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걸 볼 때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솟아납니다. 슬프면서도, 포근하고, 아련한 무엇이.
이 아름다운 파우치는 얼마전 돌아가신 60대 여성분이 손수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남편분이 환자분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임을 매번 설명드림에도 불구하고 남편분이 회진 후 따라나와 꼭 낫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저로서는 내심 부담스럽기도 하였지만, 제가 아프면 제 남편이 이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돌봐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환자분은 치료가 길어질 수록 몸은 물론 마음도 지쳐 가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좀더 오래 같이 하고 싶은 가족분들의 소망과, 힘든 항암치료를 접고 쉬고 싶은 마음이 매번 교차하는 듯 하였습니다. 몇 번의 갈등 끝에 가족들은 환자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고, 결국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였습니다.
파우치의 섬세한 무늬와 꼼꼼한 바느질을 보면 그분의 단아한 말씨와 몸짓이 떠오릅니다. 나이가 들면 저런 스타일이 되고 싶다고 느껴지는 그런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 중 한 분이었습니다. 환자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그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이제 세상에 없는 그분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삶의 여정과 변화를 보며 내 마음에 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 어쩌면 저에게 주어진 특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