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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놀이과 되새김질

오은, <다독임>

by OncoAzim

말놀이를 즐긴다는 오은 시인의 책을 읽고 알았다. 나도 말놀이를 좋아한다. 빼도박도 못할 아줌마 나이가 되었지만 아재개그와는 거리두기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말 한마디에 담긴 맥락과 사유를 즐긴다는 점에서는 나도 말놀이를 좋아한다. 그게 말꼬리 잡기와 한끝 차이라 쓴소리를 섞으려면 조심해야 하긴 하지만. 남들도 웃어주기를 바란다면 진짜 아재개그가 되어버리고 말지만, 혼자 상상해보고 싱긋이 웃어보는 오은 식 말놀이는 죄가 없다. 아버지와 목욕을 하고 때를 밀고 나서는 떼보와 때보, 때부자와 떼부자 이야기를 하며 때때옷을 입읏듯한 미소를 띄우기. 힘입다'에서 실제 옷을 입듯 힘을 입는 상상을 해보기. 그래서 나도 써보고 싶어졌다. 병원이라는 세계에서 새로 배운 말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것이 의료인이라는 언중의 행동과 생각을 어떻게 반영하고 또한 규정짓고 있는지를. 언젠가는 해보고 싶던 작업에 대한 의욕을 이 책을 통해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아픈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며 생각한 ‘기다리다’라는 말의 의미는 말놀이라기보다는 고통스러운 되새김질에 가깝다. 기다리면서 오가는 감정들 때문에 형용사인가 하다가, 그 북받친 감정으로 움직여지는 몸짓을 보면 동사라고 결론을 짓는 과정을, 나는 잘 알면서도 잘 모른다.


"아무리 많이,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기다림은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다리다'라는 단어는 동사지만, 왠지 형용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특정한 동작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가슴속에서 무수히 많은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감정이 여기서 저기로 나아갔을 것이다. 개중 어떤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되돌아왔을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은 계속해서 법석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기다리다'는 동사가 맞는 것 같다." (189p)


큰 병원에서 치료 받기 위해 먼 길을 건너 오는 이들을 매일 만난다. 두려움에 질려있으면서도 희망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눈빛들을 안다.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친절하거나 이해심 깊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 그들에게 약간의 위안은 될 지도 모르지만 그 '기다림'에 담긴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대개 역부족인 것도 안다. 그 무거운 기다림을 받아 냉정하게 저울에 재어 도움이 되면 도움을 주고, 아니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내 일이요 일상이다.

그래서 나는 모른다. 모르려고 애쓴다. 내 한마디가 상대의 마음 속에서 어떤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지. 그래서 "가슴을 쓸어내리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발을 동동구르는" 동사로서의 기다림을 가늠해보기가 두렵다. 그걸 다 알아서는 의사라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르고서도 잘 할 수 있을까. 침을 삼키고 다시 한번 읽는다.


"주치의가 더이상의 항암치료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는 말, 할 수 있는 것이 더이상 없다는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좀체 떠나지 않았다." (211p)


암환자에게 항암치료만이 의미있는 치료인 것은 아니다. 통증과 영양,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는 완화 치료 역시 중요하다. 그래서 '무의미하다', '할 것이 없다' 이런 말로 말기 통고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암환자와의 의사 소통의 원칙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항암치료를 하지 않으면 대형병원에서의 치료는 종료되는 것이고 대개는 호스피스로 옮기게 되니, 어떤 말로 포장해도 실제로는 저 말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기대를 하고 희망을 간직하며 견디는 것이 사람의 본능인지라, 늘 나빠질 수 있다는 말을 해도 마음은 풍선처럼 다시 솟아오르기 마련이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은 약간이라도 더 나아지는 내일을 바라며 둥둥 떠 있는 마음의 공기를 강제로 빼서 현실로 끌어내리는 단호한 수단 중 하나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는 말처럼 되지 않음을, 순식간에 공기가 피시시 빠지며 착 가라앉는 것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역시 '준비'라는 말을 해부하여 보여준다.


"아무리 준비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마음일 것이다. 물질적 준비는 차곡차곡 모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적 준비는 상상을 요하는 것이다. 소중한 대상이 떠나고 난 다음 장면은 쉽사리 그려지지 않는다. 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어떤 것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만다." (212p)


작가가 아버지를 포함해 황현산 평론가, 허수경 시인같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최근에 떠나보낸 시기인 2018년과 2019년의 글들에는 슬픔을 마주하고 살피는 일상이 담겨있다.

"고쳐쓰는 일이 잦아졌어. 어떤 감정을 슬픔이나 안타까움 등 한 단어로 묶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는 순간이었어." (254p)
"슬픈 이야기는 나를 더 슬픈 상태로 몰아넣는 대신,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연대하게 해 주었다" (262p)


슬픔을 극복하고, 딛고, 잊고, 묻고. 이런 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슬픔은 자꾸만 이야기하고 똑바로 바라보아야 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슬픔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사회적 관습이다. 나 역시 슬픔에 대한 책을 쓴 사람이지만 아직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이 있다. 최루성이다, 슬픔을 전시한다는 평을 내 앞에 대고 한 사람은 아직 없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슬픈 이야기는 더 슬프게 하기 보다 연대하게 해 주었다는 말이 나에게도 위안이 되었다.

아마도 '슬프면서도 좋은 거, 그게 바로 문학이다' (p.147)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연대하고, 교감하게 해주기 때문에. 순간의 시간과 장소에 담긴 의미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슬픔에 깊숙이 잠겨있으면서도 우리는 웃을 수 있잖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도리질을 하면서도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창문을 열어 바깥공기에 몸을 내주잖아. 그리고 천천히 떠올리기 시작하지. 함께했던 시간을, 내가 몸담고 있는 여기의 시간과 상대가 묵고 있을 거기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어서, 기억할 것이 남아있어서 실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p.254)
"... 아빠와 함께 산책하던 근린공원을 걸어갈 때마다 옆에 누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외출할 때는 혼자였지만 귀가할 때는 매번 둘이 손을 맞잡고 돌아온다.
나는 아빠가 앉곤 하던 벤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벤치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그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건네기도 한다. 아빠와 함께하던 사계절의 색깔과 냄새를 기억하고 있어서 실로 다행이다.... "
(222-223p)


반추동물의 위장은 산도가 낮지 않아 되새김질을 해도 큰 지장이 없다고 한다. 반면 사람의 위에 들어갔던 음식물이 다시 식도로 올라오면 위산이 식도 점막을 헐게 하는 역류성 식도염이 생긴다. 사람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은 아니지만, 말과 기억을 다시 곱씹는 것에 대한 은유인 '되새김질'라는 것은 왠지 식도 역류로 인한 가슴 통증- heartburn을 일으킬 것만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시인은 식도가 아닌 마음이 헐고 데이는 시간을 거쳐 토해낸 말들을 내놓은 것 같아, 아름다운 문장을 즐기기가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 가슴에 다가와 단박에 얼어붙어버린 순간에 대한 이야기' (161p)를 접한 기쁨은 크다. 그리고 나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게 된다. '나를 향한 이야기, 나로부터 발아해서 나에게 가까쓰로 도달하는 이야기 (161p)'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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