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다녔던 의대에서는 교수님들을 모두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모든 의대가 그런 줄 알았는데 나와보니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의대마다 호칭 문화가 조금씩은 다 다르다. 지금 근무하는 곳에서는 주로 교수님이라고 부른다.) 사실 대부분의 의대 커리큘럼은 고등학교와 다를 것이 없다. 한 학년의 모든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기 때문에 수강신청 같은 것도 따로 하지 않고 일괄 처리된다. 그래서인지, 교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데 딱히 괴리감은 없었다.
본과 2학년 2학기 때부터는 임상과목 수업을 들었는데, 흰 가운을 입고 들어오는 한층 권위있어 보이는 어른들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저분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너서클에 내가 속해 있다니. 한 학년에 200명 가량 되는 수많은 학생들 중 하나에 불과한 나였지만 왠지 으쓱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압구정동 K 선생님에게 요리를 배우는 강남 며느리같은 기분이랄까.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주는 친밀감은 선생보다는 학생을 높이는 것 같은 착각을 선사했다. 그 착각이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병원에 들어가서 만난 ‘선생님’들은 가혹했다. 그들은 당연히도 친절한 요리선생님들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살갑고 다정한 느낌도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림자도 밟지 말라던 고전적인 사제관계의 위엄을 표현하기에도 썩 안성맞춤인 단어였던 것이다. 지금도 모교의 은사님들의 성함에는 ‘선생님’을 붙여도 조금도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하나 둘씩 정년을 맞아 고별 강연을 하고 연단을 내려올 때마다 되뇌게 되는 단어는 역시 ‘선생님’이다. 내 의사로서의 여정에 그들이 드리운 깊은 자취를 깨닫고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알게 될 때 말이다. 당신이 쓴 차트는 인포마티브하지 않아, 라며 한 마디 던지던 선생님의 냉랭한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내 진료는, 내 연구는 인포마티브한가. 정말 환자에게, 동료에게, 세상에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가. 선생님, 당신이 적어도 부끄러워하지는 않는 제자가 되고 싶어요.
#2
"간호사가 니 선생님이냐?"
병동 레지던트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본과 3학년 때 실습을 같이 돌던 동기가 병동의 간호사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른 게 화근이었다.
"야, 선생님은 너에게 뭘 가르치는 사람이 선생님이지. 너 간호사한테 배울거야? 의사는 간호사를 가르치는 사람이야, 배우는 게 아니라."
"...네"
"너같은 애들이 인턴 되어선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더라. 넌 의사야, 간호사가 아니라."
나중에 내가 레지던트가 되고, 그 과정을 거쳐 돌아볼 수 있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가 간호사를 선생님으로 부를 수 없던 이유는 자기 자신도 아직 '선생님'이라고 여길 수가 없어서였다는 것을. 그 땐 레지던트가 뭐든지 다 아는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자기 자신과의 인정투쟁 중이었다는 것을. 그 인정투쟁을 나 역시도 혹독하게 겪었다.
“선생님 오더나 제대로 내시지요.”
레지던트 1년차 때 병동 간호사들이 제대로 협조가 안된다며 수간호사에게 불평을 늘어놓자마자 한 방 먹었던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의사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지? 본인은 병원 정규직이다 이거지. 비정규직인 어린 레지던트 따위한테 굽힐 이유 없다 이거지. 온갖 분노가 뭉글거리며 솟아올랐고 열불난 가슴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내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오더를 제대로 내라는 말은 내 오더가 모호하고 자주 변경되며 간호사의 판단에는 근거가 불분명하여 두번 세번 확인하느라 그들을 힘들게 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아서 더 분노했던 것이다. ‘선생님’들에게 당할 지적질을 감히 수간호사 따위에게 당하다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힘없는 레지던트이니 그런 걸 거라고, 저 자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이 병원의 교수가 되는 것 뿐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럴 자신은 별로 없었다. 일단 당장은 그런 지적을 안 당하는 게 내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가끔 더 힘든 오더 (바이탈 사인 점검을 하루 3회에서 10회로 늘린다던지)를 내어 간호사들을 극한으로 몰아부치며 갈등에 불을 붙이는 용감한 자들도 있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도도하게 말하고 싶었다. 전공의의 태도가 냉랭해도 일단 오더가 깔끔해지니 쌀쌀맞던 병동 간호사들은 금방 누그러졌다. 그러나 수간호사는 끝내 손을 내밀지 않았고 나도 그가 지나갈 때마다 노려보았다.
간호사들과의 갈등은 대부분 레지던트 1-2년차때까지다. 지금 되돌아보면 경험이 턱없이 부족한 의사가 내는 오더를 수행하느라 그들도 잔뜩 불안하고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 이후에 만난 대부분의 간호사들은 나보다 더 경험이 많아도 나를 정중하게 대했고 내가 잘못하는 것을 발견해도 조심스레 귀띔해주었다. 회진때 스쳐가는 높으신 ‘선생님’들의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적는 것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오더가 어떻게 수행되는지, 컴퓨터 화면 안의 오더와 현실은 어떻게 다른지, 내가 놓치고 있는 환자의 상태, 내가 모르고 있던 환자의 습관과 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는 이들을 나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20년이나 지난 지금은 비로소 알겠다. 철없는 레지던트에게 충격요법을 구사한 그 수간호사 역시 나의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3
“교수님 회진오셨습니다”
병동에 도착하니 레지던트가 펠로우를 부르며 전화를 한다. ‘교수님’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든다. 이전 직장은 대학병원이 아니었는데도 제약회사직원들은 나를 찾을 때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의료계에서 ‘교수님’은 그 사전적 의미보다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유명병원의 전문의’를 높여서 부르는 말에 가깝다. 한편으론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정규직 전문의에게 부여하는 겸직교수, 기금교수, 임상교수, 촉탁교수 등등 다양한 이름의 호칭의 인플레를 반영하는 것 같아서 뜨끔하다. 어찌어찌 하여 테뉴어 트랙의 교수가 되기는 했지만 그 자리를 바라는 수많은 이들이 아니라 너여야 할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이 그 호칭을 들을 때마다 귀를 맴돈다.
일반 종합병원의 의사 소개를 보면 모두 원장이나 과장이다. 한 병원에서 모여서 진료를 하고는 있지만 각자 자기 환자를 보는 시스템이니 각자의 위신을 다 세워주어야 하는 필요에서 오는 호칭의 인플레같다. 저 환자의 의사는 과장인데 내 의사는 대리이면 왠지 믿음이 안가니 말이다. 대학병원에서는 모두 교수이니 그중 한 명만 과장이어도 괜찮지만, 일반 병원에서는 적당히 높은 직위를 나타낼 만한 단어가 없으니 모두 과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1내과 과장 2내과 과장 이런 식으로…
이런 호칭의 인플레를 접할 때마다 ‘선생님’이라는 고전적 호칭이 그립다. 내가 레지던트나 펠로우를, 간호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면 좋겠다. 내가 그 때 교수님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을 때 담았던 경외심을 갖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냥 그들의 좋은 동료가 되었으면 한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고 그 때의 선생님들의 시대는 저물었으니까. 출중한 개인의 능력이나 카리스마로 의학과 의료의 발전을 이끌었던 시대는 이제 갔다. 그들 덕분에 만들어진 좋은 시스템을 잘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담아 선생님이라 부르는 좋은 팀워크을 만드는 것이 내 시대의 사명이 아닐까, 하고 감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