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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Apr 12. 2021

치다-항암


환자에게 주사약을 처방하고 이것을 환자의 혈관이나 근육, 피하에 투여하는 행위. 이를 묘사하는 동사는  공식적으로는 ‘하다' 이다.  정확히는 ‘주사하다’ ‘투여하다’ ‘주입하다’. 이런 한자어와 ‘하다’가 결합된 단어들로, 일상어로 사용하기에는 비경제적이다. 영미권 병원에서도 ‘administer’ ‘infuse’ 정도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실제로는 간단히 ‘give’로 쓰는데, 우리도 일상적으로는 그냥 동사 ‘주다'를 쓴다. 열나는데 컬처(세균배양검사)하고 안티 (항생제) 좀 줘. 물 (수액) 좀 주면 나아질거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약들은 ‘준다’고 말하면서 항암제는 종종 ‘친다'고 한다. 케모(항암제)치고 튜머(종양)가 절반으로 줄었어. 환자 컨디션이 나빠서 케모를 칠 엄두가 안나네. (물론 공식적인 회의에서나 문서에서 ‘항암친다’라고 말하거나 쓰진 않는다. 약간 속어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되겠다)

왜 유독 항암제는 ‘치는’ 것이 되었을까. 아마도, 항암제라는 단어에서 ‘주다'라는 동사에 담긴 베풂과 배려의 의미를 연상하기는 어려워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사실 약 중에 이 정도로 힘든 약은 없는 것이 사실이니까. 다른 약들은 아무리 부작용이 많아도, 예를 들면  ‘스테로이드 친다'라고 말하진 않으니까. (아, 자가면역질환에서 입원해서 투여하는 고용량 스테로이드 펄스 (pulse) 요법은 ‘펄스친다'라고는 하는 경우는 있다. 어쨌든 소위 ‘독한'약일 수록 ‘친다’고 말하는 건 맞는 것 같다)


국어사전에서 14개나 되는 “치다”의 의미 중에서 ‘항암을 친다'고 말할 때의 ‘치다'는  “기계나 식물이 더 좋은 상태가 되도록 기름이나 약을 바르거나 뿌리다”라는 뜻일 것이다. 더 좋은 상태가 되도록,이라는 부분에서 왠지 아련한 느낌이 드는 건 결과가 꼭 그렇게만 되지는 않아서일 것이다. 항암제의 원리를 설명할 때는 보통 농약에 비유하곤 하는데, 농약 역시 ‘친다'라고 말한다. 농약을 ‘준다'라고는 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잡초도 죽이지만 농작물을 죽이기도 하고 흙에 녹아들어 환경을 망치기도 하는 것처럼 , 항암제 역시 종종 그렇다. 좋은 상태가 되길 바라며 하는 행위 치고는 감내해야 할 위험과 손해가 큰 일을 ‘친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친다'라고 발음할 때의 느낌은, 적어도 내 느낌은 이렇다. 눈을 딱 감는 마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지만,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예상하며 각오하는 마음. 그 고통을 겪는 주체가 내가 아니어서 드는 죄책감. 시간이 지나고, 농작물이 시련을 견디고 살아났을 때, 환자가 부작용을 견디고 회복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좋아진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그걸 ‘친다'라고 말한다.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아요.”

‘항암' 하면 말갛게 변해버린 두피와 끝없는 욕지기를 떠올리는 환자들에게 보통 이런 말을 먼저 꺼낸다. 물론 그렇게 말하면서 머릿속에는 힘든 부작용으로 응급실에 실려온 이들이 떠올라 뜨끔하기는 하지만,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관점에서 볼 때 ‘생각만큼 힘들지 않다'는 말은 진실이다. 적어도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이미지에 비해서는 의외로 견딜만한 것이 항암제다. 효과적인 항구토제들이 개발되면서 탈수를 일으킬 정도의 심한 구토는 드물게 되었다 (없는 건 아니다). 가장 무서운 부작용인 호중구감소성발열은 백혈구촉진제와 항생제가 널리 쓰이면서 역시 상당수 줄어들었다 (역시 없지는 않다). 그러나 부작용이 덜하다는 말의 비교대상은 어디까지나 과거이고, 대중문화에 비춰진 과장된 이미지다. 환자에게 ‘힘들지 않다’의 비교대상은 항암치료 전의 일상이니,  언제나 생각보다 힘든 건 당연할런지도 모르겠다. ‘생각만큼 힘들지 않다'는 말을 ‘안 힘들다'라고 해석하고 싶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당연한 마음을 온전히 공감하려 해선 안된다. 항암을 ‘치는' 마음은 그런 것이다. ‘힘듦'을 정량화해서 냉정하게 결정해야 한다.

환자가 머리카락 사이로 듬성듬성 보이는 두피를 보여주며 말한다.  

“선생님이 머리 많이 안빠진다고 했잖아요! 이것봐요, 엄청 빠졌어요!”

“네 조금 빠질 수는 있는데… 그래도 홀랑 다 빠지는 약들도 있거든요. 그것보단 덜하다는 애기지요.”

“전 가발 안사도 될줄 알았는데…. 사야겠어요. 사람들이 한마디씩 해요.”

머리는 도대체 언제 나느냐는 환자의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항암 중단하면 나지요. 그런데 항암 중단하면 암도 자랄테니까. 그냥 맞으세요. 머리카락보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사는게 중요하니까. 머리카락이 반 이상 빠지지는 않았으니  grade 1이다. grade 1 alopecia, persistent (1도의 탈모, 지속됨). alopecia (탈모를 가리키는 의학용어)는 grade 2 까지밖에 없다. grade 3 이상 되면 항암을 중단하거나 보류해야 하는데, 탈모 때문에 항암을 중단하거나 보류하는 일은 없다는 얘기다.   

어떤 이는 얼굴은 비교적 괜찮아보이는데도 푸념을 잔뜩 늘어놓는다.

“어유 항암 맞고 속이 너무 안좋아서 며칠간은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었어요! 밥도 못먹고….”

“전혀 드시질 못하셨어요?”  

“아니 죽은 먹었죠.”

“음… 그래도 드실 수는 있었다니 다행이네요.”

회복하면서 더 든든히 먹었는지, 전보다 오히려 조금 더 오른 몸무게를 보면서 ‘grade 2 anorexia, recovered (2도의 식욕부진, 회복됨)’로 기록한다. 이번 항암 용량은 그대로. 견딜만 하구만. 일일이 그가 겪은 어려움에 공감하다가는 제대로 된 용량을 처방할 수 없다.  용량이 자꾸 줄어들면, 당신의 암은 스멀스멀 더 빨리 자랄 지도 모른다. 눈 딱 감고, 항암을 “친다.”  

그러고는 내가 뭔가 잘못먹고 탈이 나서 배를 붙잡고 뒹굴 때, 써야 할 논문과 메일 처리를 미뤄놓고 누워있으면서 한숨을 쉴 때, 혹시 이거 설마 암은 아니겠지, 라고 난데없는 생각이 떠오를 때, 환자들 생각을 한다. 이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겠지.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닌가, 두려웠겠지. 그러고도 별탈 없이 회복되었다는 이유로 나는 grade 2 라고 했지. 그래도 조금 용량을 낮출 걸 그랬나.... 아냐 항구토제를 좀 추가했으니 다음엔 좀더 낫겠지.  


어떤 약을 써야 하나, 약 용량을 좀더 줄여야 하나, 이번에는 건너 뛰어야 하나. 종양내과의사가 매일매일 내려야 하는 결정은 과학적이어야 하지만 하나의 답이 있지는 않은, 과학적 사실을 해석하는 주관과 철학이 개입되는 문제이다. 어떤 이는 좀더 과감하게 항암을 ‘친다'. 가능하면 용량을 줄이지 않고, 힘들더라도 가장 효과가 좋은 약제의 조합을 쓴다. 어떤 이는 이런 저런 이유로 용량을 줄이고 안전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약을 고른다. 나는 전자의 의사를 이상향으로 삼는 시대에 수련을 받았다. 세포독성 항암제가 암과 대적하는 주된 무기였던 시기다.

 현대 항암제의 역사는 1940년대 제 2차 세계대전 중 사용된 생화학 무기에서 시작되었다. 전쟁 때 쓰이던 독가스가 우리 몸에서 가장 활발히 분열, 증식하는 세포인 혈구세포를 주로 죽이는 데 착안하여, 정상세포보다 빠른 암세포의 분열과정을 방해하는 약으로 개발된 것이 오늘날 항암제의 근간을 이루는 세포독성항암제 (cytotoxic chemotherapy)이다. 조절되지 않고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나는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상조직의 손상도 일부 감수하고 항암제를 투여해야 한다는 것이 항암치료의 기본 원칙이다. 항암제의 용량이 늘어날수록 효과는 올라가지만 부작용도 커진다는, 그래서 기대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부작용은 참고 견딜수밖에 없다는, 소위 ‘좋은 약은 입에 쓰다' 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세포독성항암제의 용량에 따른 효과와 부작용을 그래프로 그린 용량-반응 곡선 (dose-response curve)은 대개 S자 곡선으로 비교적 단순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항암치료를 처음 도입하셨던, 지금은 상당수는 돌아가신 종양내과계의 원로 교수님들의 치료 철학은 그러한 용량-반응 곡선에 뿌리내려 있음을 나는 몇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아주반트(adjuvant)는 다름 아닌 생존률을 올리는 게 목적인데 그렇게 어정쩡하게 할 수가 있나? 안할 거면 몰라, 할거면  제대로 해야지!”

학회에서 재발방지를 위한 보조화학요법 (adjuvant  chemotherapy)을 어떤 약제로 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할 때 어떤 원로 교수님이 내뱉던 사자후는 아직 뇌릿속에 남아 있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주사약보다 부작용이 약간 더 낮지만 효과 역시 조금 떨어지는 경구약제를 고려할 수도 있다는 누군가의 말에 치료의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일침이었다. 어떤 의사들은 환자가 조금만 힘들다고 하면 너무 쉽게 용량을 줄이거나 중단한다는 통탄도 잊지 않았다. 부끄러움과 저항감이 동시에 솟아올랐다. 아 나도 종종 그랬지….그런데 웬만하면 세게 해야 한다는 건 너무 옛날 개념 아니야? 환자의 개별성도 고려해야지. 효과가 항상 기대한 대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항암제 강도를 낮추는 것이 부작용으로 인한 원망을 당장 덜 듣기 위한 타협이 아니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게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반영한 “공유의사결정(shared decision making)”이라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는가? 환자가 겪게 될 고통도 다 책임지고 과감하게 치료를 하겠다는 저 노장의 온정적 간섭주의 (paternalism) 앞에 나는 과연 당당한가?   


바야흐로 표적항암제와 면역항암제의 시대가 오면서 항암을 ‘친다’라고 말하는 일은 이전보다 줄어든 것 같다. 일단은 이전의 세포독성항암제보다 덜 힘들고, 예상 외의 부작용들이 생기기는 하지만 완전히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쳐야” 하는 약이 아니게 된 거다. 또한 부작용에 대한 인식도 변했다. 용량-반응관계의 개념은 새로운 약들이 등장하면서 바뀐 지 꽤 되었다. 대신 용량에 관계 없이 예측하기 어려운 부작용들이 등장하고, 이것이 더 위험한 중증 부작용의 전조증상은 아닌지 더 면밀히 관찰하고 판단해야한다. 이는 마치 코로나바이러스 백신과도 비슷한 상황인데, 약제의 효과로 인한 전반적인 이득은 크고 대부분에겐 비교적 안전하지만, 일부에게 특수하게 일어나는 미지의 부작용에 늘 촉각을 기울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직은 세포독성항암제가 치료의 상당수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향후 십수년 안에 암 치료의 주류는 면역항암제로 바뀌게 될 전망이다. 높은 위험, 낮은 불확실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위험, 높은 불확실성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는 오히려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항암을 ‘치는' 시대보다는 나은 것 아닌가. 당신은 힘들겠지만 이것 외엔 방법이 없으니, 명운을 걸어보자고 환자를 이끄는 노장의 과감함은 점점 더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과감함이 있었기에 ‘치다'라는 동사의 ‘더 좋은 상태가 되도록'의 확률은 점점 더 올라왔음을 기억해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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