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다”라는 동사를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검색해보고는 놀랐다. 동사의 뜻이 무려 14개가 수록되어 있었다. 의외로 이 간단한 동사가 쓰이는 곳이 정말 많아서 영어에서의 빈도로 치면 take 나 get 수준의 위상으로 대접받아야 할 것 같다. 비나 바람이 내리는 것 (“비바람이 치다”), 무언가로 둘러싸는 것(“그물을 치다”)을 이르는 동사 ‘치다’가 있는 반면, 셈을 맞추거나 어떤 상태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뜻 (“사실이라 치자”)도 있다. 도통 비슷해보이지 않는 이렇게 많은 의미들이 같은 소리로 발음이 되다니, 한국어의 난이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치다’는 그 본디의 뜻에서 파생되어 병원에서도 여러 용례로 사용된다. 그 중 대표적인것은 “CPR 치다” 가 아닐까. 물론 공식문서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긴 하지만 의료인 간의 일상 표현으로는 종종 등장한다.
"아...어제 당직 때 CPR 치느라 너무 힘들었어..."
"이 환자 곧 CPR칠 것 같으니까 ICU에 연락해!"
이 때의 ‘치다’는 국어사전에 나온 “치다”의 의미 중 “손이나 손에 든 물건으로 세게 부딪게 하다”일 것이다. 엄밀히 말해 CPR (cardiopulomnary resuscitation), 즉 심폐소생술 중 이루어지는 행위 중 일부인 심장마사지만이 이 “치다”라는 동사로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심장마사지와 30:2의 비율로 하게 되어 있는 인공호흡은 점차 생략되는 추세이고, 제세동도 중요하지만 일단 심장마사지 후에 하는 것이니 그냥 ‘치다’라고 표현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 인공호흡은 일반인이 하기에는 호흡기 감염의 위험 (판데믹 시대에는 정말 하기 어렵다)은 물론, 중간에 이걸 하느라고 우물쭈물하다가 심장마사지를 오히려 지연시키는 위험도 있다. 솔직히 키스가 연상되는 자세 때문에 여러 예능방송과 코미디에서 희화화된 점, 이로 인해 심폐소생술을 주저하게 만드는 문제들도 아마 인공호흡을 굳이 강조하지 않게 된 것에 기여했으리라 짐작해본다. 무엇보다 인공호흡을 하지 않더라도 심장마사지를 제대로 하는 소위 ”hands-only CPR”만으로도 성공률이 꽤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물론 이것은 일반인의 CPR에 국한된 얘기이긴 하다. 병원에서 하는 CPR은 ‘치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확보, 제세동, 응급약물 투약까지 포함해야 하지만, 어쨌든 ‘치는’행위가 그만큼 중요하니 속어로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CPR은 세상의 모든 공이나 악기보다도 잘 “쳐야” 한다. 홈런볼은 못 쳐도 안타는 기본으로 쳐야 한다. 쇼팽 콩쿨 1위는 못해도 음대 입학할 정도로는 쳐야 한다. CPR을 한다고 해서 숨이 멎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심장 박동이 되살아날 정도, 즉 ROSC (Return of spontaneous circulation)가 될 정도로는 쳐야 한다. 물론 항상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질병관리청의 자료에 의하면 급성심정지 환자의 생존률이 2006년의 2.3%에서 2019년에는 8.7%까지 증가하였다니 정말 다행한 일이다. 병원 내 의료인 교육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심폐소생술 교육을 보급하고자 하는 여러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치다”는 동사로 표현되는 스포츠, 악기 연주들이 그렇듯이 CPR은 머리로 치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 치는 것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대부분의 문제를 머리로 해결해내던 사람들이었고, 내가 수련을 하던 2000년대 중반까지도 CPR은 외워서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학생 때 또는 신입 인턴교육에서 배운 지식으로 우왕좌왕하며 ‘치던’ CPR에서 당연히 소생이 잘 될 리가 없었다. CPR 방송이 나면 하던 일 모두 집어던지고 달려가며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는 나 자신에게 잠시 취하기도 했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하면 아비규환이었다. 인턴어딨어! 손 좀 바꿔줘! 에피아트로핀 1분마다 주세요! 인투베이션이 안됩니다! 마취과 불러! 제세동 기계 빨리 가져와! 비키세요! 다인 병실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CPR은 울부짖는 보호자들과 공포에 떠는 옆 병상 환자들까지, 마치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풍경을 장식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모습은 심폐소생술 거부 각서 (DNR: do not resuscitate)를 받는 것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DNR은 심폐소생술이 의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말기 질환 환자에게 받는 것이지만, 당신의 숨이 꺼져갈 때 꺼지도록 두겠다는 내용의 각서에 서명을 받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럴 때는 환자에게 품위있는 죽음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얼마 전 병실에서 일어났던 심폐소생술의 끔찍한 풍경을 묘사하며 위협하는 것이 더 쉽고 빠르다. “이렇게 해서라도 목숨만 부지하는 삶을 원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라며 묻고는 공포에 질린 보호자에게 서명을 받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피곤에 절은 전공의의 일상이었다.
CPR을 잘 "치려면" 지식과 경험이 있는 의료인들도 반복해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야구배트처럼, 피아노처럼 반복해서 "쳐서" 몸이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의료계와 국가가 인식하고 제도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국내에서 최초의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이 나온 것은 2006년이다. 그 이후 의사와 간호사들이 주기적으로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도록 하고 CPR이 얼마나 신속하고 적절하게 진행되었는지를 모니터링하는 것이 병원 진료의 품질을 증명하기 위해 해야 할 필수적인 절차가 되었다.
“소리 지르는 니가
(챔피언)
음악에 미치는 니가
(챔피언)
인생 즐기는 니가
(챔피언) 니가
(챔피언) 니가
(챔피언)~”
기본소생술교육에는 늘 싸이의 ‘챔피언’ 음원이 준비되어 있다. 분당 100-120회정도의 속도로 심장마사지를 해야 하므로 이것을 몸에 익히기 위한 비트로는 이런 빠른 댄스곡이 제격이다. 싸이의 신명난 외침에 맞추어 연습용 인형의 흉골 아래 1/3부분을 두 손바닥을 모아 힘차게 체중을 실어 내리치며 리듬에 몸을 싣는다. 교육은 늘 ‘소중한 목숨을 살리는 여러분들이 챔피언~!’ 하며 끝난다. (‘강남스타일’이 아니라 굳이 ‘챔피언’을 트는 이유도 이것 때문인 것 같다) 미국심장협회가 일반인에게 CPR을 보급하기 위해 채택한 CPR 용 음악은 Bee Gees가 1977년에 발표한 디스코곡인 Stayin’ Alive 이다.비트도 적절한 데다가 제목마저도 마치 심폐소생술을 위해 작곡된 것 같다. 사실 실제 상황에서 이런 곡을 머릿속으로 재생시키며 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 지는 가끔 좀 궁금하기는 하다.
갑자기 청천병력같은 CPR에 온 병동이 뒤집어지던 것도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다. 병원에서 입원해있는 환자에게 CPR까지 일어나기까지는 대개 수많은 중간과정들이 있다. 대개는 호흡이나 심장박동이 불규칙하고 빨라지는 현상이 먼저 일어나며, 지병이 악화되어 일어나는 일들이다. CPR이 일어날 위험이 높은 위중한 환자들은 가능하다면 중환자실에 미리 옮겨놓는 것이 상책이다. 중환자실까지는 아니어도 대개는 고위험 환자들은 1인실이나 처치실 등 일반 환자나 보호자들의 시선으로부터는 분리된 곳에서 좀더 면밀히 관찰하게 된다. 요즘 웬만한 규모의 대학병원에서는 긴급대응팀이 병동환자를 모니터링을 해서 CPR 상황에 대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선제적인 조치를 하는 목적은 무엇보다 CPR까지 가는 상황을 안 만드는 것이고, 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다인실 한가운데서 CPR을 하며 가족들과 다른 환자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변화도 어쩌면 ‘잘 치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악보대로 틀리지 않게 치는 것을 벗어나 좀더 노련하고 자연스럽게, 감정을 담아서 치는 숙련자의 피아노처럼, 다음 넘어갈 건반이 어딘지 미리 알고 있는 여유를 이제는 조금은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은 5년마다 개정된다. 작년 개정작업을 거친 한국형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이 곧 새로 발표된다고 한다. 이 가이드라인의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2020년 미국심장학회 가이드라인에서는 심정지 생존자의 신체, 심리적 재활과 구조자의 심리적 트라우마에 대한 내용이 추가되었다. 코로나19 유행상황에서의 소생술 관련 내용, 그리고 그동안 성인 소생술에 포함되어 따로 다루지 않았던 임산부의 전문 소생술 알고리듬 역시 추가되었다. ‘치는’ 일은 새롭고 신박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보다는 하고 있던 일의 디테일을 조금씩 보정해나가는 일이다. 악기의 미세한 소리의 떨림과 울림을 조정하는 것이 의외의 큰 차이를 만들어내듯 CPR을 ‘치는’ 것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