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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Oct 29. 2022

올리다/내리다

중환자실은 20세기 임상의학의 발전이 집약된 최전선의 공간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온갖 신화와 전래동화에 나올 법한 일들이 이곳에서 실제 일어난다. 물론 병을 앓기 전 온전한 몸으로 순식간에 돌아오는 그런 마법이 아니라, 온갖 번거롭고 위험하고 고통스럽고 지루한 과정을 통해 겨우겨우 누워서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이지만 말이다. 요단강을 건너는 누군가를 질질 끌고 뭍으로 데려와 눕혀놓는 그 지난한 일을 해내는 일이 중환자실 의료진의 일이다. 

모든 내과 전문의가 중환자실 근무에 익숙한 것은 아니다. 중환자실에서 근무해본 것은 20년전 전공의 2년차 때의 두 달이 전부다. 에크모도 지금처럼 자주 사용되기 이전의 시대였다. 그동안 중환자실에서 쓰는 약제와 기계도 진일보해서, 지금 중환자실 환자의 오더를 보면 잘 파악이 안된다. 그래서 지금 거기서 일하라고 하면, 솔직히 내과의사로서 부끄럽긴 하지만 자신이 없다. 


그러나 그 때의 느꼈던 감각만큼은 기이했고, 아직도 중환자실이 있는 병원  3층의 통제구역 복도를 지날 때마다 기억이 난다. 환자의 몸을 온전히 통제하고 있는 듯한 전능감, 그만큼 위중한 상태이기에 허락받은 권능이라는 자각과 긴장, 한편으론 24시간 모니터와 간호사의 눈 아래 환자가 감시되고 있는 것에서 오는 역설적인 안도감. 

중환자실은 보통 병원의 2층에서 3층 정도에 위치한다.일반인의 접근이 쉬워서는 안되고 감염을 줄여야 하니 유동인구가 많은 1층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수술실이나 혈관조영실 등 고위험의 처치를 하는 장소와는 붙어있어야 하므로, 고가의 무거운 장비가 놓일 수 있는 비교적 저층에 위치하게 된다. 그래서 병동에서는 환자를 중환자실에 보내는 것을 “내린다”라고 표현하고, 응급실에서는 “올린다”라고 말한다. 

‘내리고’ ‘올린다’는 말 뒤에는 “이제 내 손을 떠난다”는 안도의 한숨이 숨어있다. 위태로운 환자를 인력과 장비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에서 조마조마하게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의료진에게, 그리고 환자에게도 가장 긴장되고 고통스러운 순간은 중환자실에서가 아니라 ‘올리고’ ‘내리기’ 직전의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중환자실 진료가 어떤 것인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일반인들도 이전보다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중환자실이 부족한 것은 팬데믹같은 특수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뉴스에서 나오는 중환자실 병상 수를 보면 우리가 선진국에 비해 생각보다 꽤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환자실 병상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은 팬데믹 이전의 의료현장에서도 늘 있던 일이었다. 팬데믹 중 중환자 병상 수는 늘렸지만 실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의료진은 그만큼 단기간에 늘지 않는다. 2020년 나온 대한중환자의학회의 백서에 의하면 전담의사가 있는 중환자실은 전체의 40%에 불과하고, 80% 이상의 중환자실에서는 간호사 1인이 3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는 열악한 구조다. 정말 제대로 된 중환자 진료가 가능한 양질의 중환자실은 실제 병상의 절반 정도로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짐작된다. 


중환자실 의료진들은 병상 수만큼이나 시급한 것이 어떤 환자가 중환자실을 이용하느냐에 대한 합의라고 이야기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중환자실 치료는 비싸고, 희소한 자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그리 좋지 못하다. 다수가 중환자실에서 사망하고, 살아서 나온다고 해도 침상에서 벗어나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모든 중환자를  중환자실에 보낼 수 있는 사회가 이상향이 될 수는 없다. 결국은 누구를 ‘올릴’ 또는 ‘내릴’ 것인가는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늘 고민해 왔고 앞으로도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위중할수록 중환자실 입실의 우선권을 가지는 것과, 중환자실 치료의 결과가 좋을 가능성이 높은 환자가 우선권을 가지는 것. 첫번째 방식은 소생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에게 집중하느라 살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비극을 내포한다. 한편 공리주의에 바탕을 둔 두번째 방식은 ‘살 사람을 살리자’는 것이어서 살지 못할 가능성이 큰 사람들, 노인이나 장애인이 차별받을 수 있다는 문제를 낳는다. 어떤 방식도 절대선은 아니다. 의료윤리학자 김준혁은 어떤 방식을 따르던 간에 한 사회가 의료자원을 배분하는 원칙을 세우고 합의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말한다. 그러나 그나마도 최근 수년간 관심을 받았던 이 문제는 이제 기나긴 팬데믹의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다시 잊혀지고 있다. 


대한중환자의학회는 2021년 12월, 코로나19 전파가 한창이던 시기 기자회견을 열어 ‘89세 확진자가 중환자실에 입실했는데 35세 임산부 확진자가 중환자 병상이 없어 여러 병원을 전전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는 호흡곤란으로 숨을 헐떡이는 89세 환자의 가족들에게 ‘중환자실에 가셔도 소생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입실이 어렵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중환자실에 가지 못하고 임종을 맞이하였을 때 그 결정을 한 의료인과 가족들은 살인죄로 고소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반대로 89세 환자의 가족들이 강력히 중환자실 입실을 요구할 때 이를 뿌리치고 대신 구급차로 실려오고 있는 35세 임산부를 받을 준비를 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엄중한 윤리적 고민들이다. 

암이 전이되거나 재발되어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내 환자들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대부분 중환자실 치료의 대상은 아니다. 암이 진행된 상태에서 호흡과 맥박이 불안정해진다면 중환자실까지 가도 소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분들이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고통 속에 임종하는 일을 가급적 줄일 수 있도록 미리 충분히 상담을 하는 것이 종양내과의사로서의 소임이라 여긴다. 그러나 사실 ‘충분히 상담’이란 것이 우리 현실에서는 대체로 가능하지 않기에 대개는 환자에게 중환자실 치료가 주는 고통과 그곳의 비인간적 풍경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목구멍에 넣은 튜브에 기계를 연결해서 겨우 숨을 쉬는 상태로 가족과 떨어져 누워 지내야 하는 것이거든요. 대부분 그 기계를 뗄 수가 없고 연결된 상태로 임종하셔야 하는거구요” 

겁주기같지만 이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실제 중환자실은 환자로서는 평생 가고싶지 않은 곳이다. 목숨을 건지는 댓가로 인간으로서의 자율성을 일시적으로 모두 박탈당하고 숨쉬는 기능마저도 기계와 약물에 의탁해야 하는 그곳. 많은 가족들이 처음에는 중환자실에 환자를 보내달라고 했다가 그 이후엔 인공호흡기를 떼고 고이 보내달라고 읍소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환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낼 때면 늘 “당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릴 가치가 있지 않은 사람이니 미리 포기하라”고 말하는 듯한 죄책감을 벗을 수가 없다. 심지어는 나 자신부터 ‘소생가능성이 매우 낮을 경우 중환자실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미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증서를 환자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하는데도, 이 윤리적 결정의 무게는 그 어떤 수단을 써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중환자실은 의외로 평온하다. 병동이나 응급실에 비해서는 말이다. 환자들 대부분은 말을 못하고 의료진들만이 오가며, 기계음으로 가득차 있고 24시간 불이 켜져있다. 물론 사지를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일 것이다. 실제 ‘섬망’이라는 정신착란상태에 빠지는 환자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혈압, 맥박, 산소포화도 등을 실시간으로 언제든지 파악할 수 있고 폐, 심장, 콩팥의 기능을 도와주거나 대체할 장비가 구비되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료진에게 큰 안도감을 준다. 여기선 내가 결정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리고 여기까지 했으니 후회는 없을거라는. 그리고 적어도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핑계에서는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는. 그것은 통제구역 바깥의 보호자 대기실의 조바심 또는 통곡과 대비되어 묘하게 더 고요하고 차분하게 느껴진다. 세균 번식을 막기 위해 늘 건조하고 차갑게 유지되는 이곳의 공기가 살에 스칠 때면 더욱 그렇다. 

이 공간의 목표는 단지 하나 뿐이다. 환자가 스스로 숨을 쉬고 심장박동을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살려놓는 것. 살아있기 위해 잠시 살아있기를 포기하는 곳.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저승과 가장 가까운 곳. 

이곳의 서늘한 공기를 마시면 떠오른다. 중환자실에 내렸다가 결국 후회했던, 다시 올라오지 못한 많은 환자들. 한편 설득해서 내려가지 않고 병실에서 임종을 맞이했지만, 정말 그게 맞았나 싶어 수없이 맘속으로 되돌아봐야 했던 또다른 환자들. 이곳은 십수년 묵은 마음의 짐을 결국 내려놓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살아있는 이들의 움직임이 아득하다. 



참고문헌 


1. <중환자실 위기, 이대로 못 버틴다> 서지영 대한중환자의학회 차기 회장 인터뷰 

출처 : 의협신문(http://www.doctorsnews.co.kr) https://www.doctor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549

2. 누가 먼저 백신을 맞아야 할까- 코로나19와 의료 자원 분배의 윤리. 김준혁, 북저널리즘 2020 

3. <표 되는 문케어에 밀린 중환자실 투자…병상 대란 불렀다>  중앙일보 20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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