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서 올라온 신환, 피지컬 해봤어?
아직…못해봤습니다.
음 그래 (하아….. 참자) ….
가서 같이 보자 (세상 많이 좋아졌군).
그래도 이번 전공의는 아직은 부끄러워할 줄은 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할 말이 없음은 알고 있다. 도대체가 환자를 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데, 의무기록으로 파악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게다가 교수님들도 대체로 환자한테 손 잘 대지 않으시잖아요, 라고 어떤 전공의가 당돌하게 묻는다면, 나는 그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때는, 이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낀세대의 설움이 솟아오른다.
흔히 ‘피지컬이 좋다' ‘피지컬이 탄탄하다'라고 말할 때의 피지컬 (physical)은 골격이나 근육량, 근력 같은 신체의 조건을 말하는 단어인 반면, 병원에서의 ‘피지컬'은 보통 physical exam을 의미한다. 보통 교과서에 나오는 한글용어로 말한다면 ‘신체검진’, 즉 의료인이 직접 환자의 몸을 보고, 만지고, 두드리고, 청진기를 대는 진단 과정이다.
‘진찰'이라는 보편적인 단어가 있음에도 굳이 이 단어를 쓰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피지컬'이라고 해야 왠지 더 특별하고 전문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맞다. 대중이 쓰는 단어와 다른 것을 사용함으로써 전문가임을 드러내고 구별짓기 위한 의도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진찰’이란 단어에 묻어있는 오글거림이 없기 때문이다. ‘진찰’이란 단어를 발음할 때 의사의 손을 거치면 몰랐던 병의 원인이 갈피가 잡힐 것 같은 기대에 찬 눈빛을 전제로 한다면, ‘피지컬’은 그저 진단의 도구일 뿐이며 환자는 객체일뿐이다. 나는 그 건조함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예전같으면 ‘피지컬’은 의사가 가진 중요한 기술이자 지적 자산이었을 것이다. 심장박동 사이에 미세하게 들리는 잡음의 강도와 패턴을 파악해서 심장의 구조적 이상을 진단해내고, 무릎의 인대를 두드려 나오는 다리의 반사운동의 각도를 보고 신경의 어느 부위가 손상되었는지 맞추는 그 신묘한 감각들 말이다.내과의사가 영어로 피지션(physician)인 것도 이 피지컬을 수행하는 감각과 추론능력이 이 전문직을 정의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일 터이다. 그 옛날 CT도 MRI도 없던 시대에 진료를 했던 원로의사들의 전설적인 피지컬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랑잎을 타고 압록강을 횡단했다는 김일성의 신화가 부럽지 않다. A 선생님은 환자의 눈만 보고도 혈청 빌리루빈 수치를 소수점 첫째자리까지 맞추더라는 이야기, B 선생님은 청진만으로 폐암의 위치와 크기까지 알아내더라는 이야기, C선생님은 환자의 배만 눌러보고도 대동맥 옆 림프절이 몇 cm까지 커졌는지를 알더라는 이야기…그런 얘기를 하면서 요즘 우리들은 정말 진료 편하게 하지, 하며 자조적으로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혈액검사와 CT를 찍으면 금방 정확하게 알수 있는 소견들인데 그런 대단한 능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마치 4차산업혁명시대의 주산암산실력같은 것이 아닐까.
‘피지컬’은 이제 의사로서의 의무를 지키기 위한 단순한 허례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단순계산도 이제 엑셀을 열어 하듯이, 종합병원의 의사들은 쉽게 영상과 혈액검사에 의존하고 좀처럼 진찰을 하지 않는다. 사실 외래진료는 환자에게 손을 대는 순간 상당한 시간이 지나버리기 때문에, 가급적 진찰을 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효율을 올릴 수 있다. 그러다보니 눈과 손과 귀는 점점 퇴화되고 의대생들이나 전공의들을 가르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 되어간다.
미국 스탠포드의대의 감염내과의사인 아브라함 베퀴즈는 “의사의 손길” (a doctor’s touch) 이라는 제목의 Ted talk에서 의식저하와 쇼크 상태에서 응급실에 실려온 한 40세의 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간신히 심장박동이 돌아온 상태에서 원인을 찾기 위해 시행한 CT검사에서 양측성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베퀴즈는 그녀가 응급실에 실려오기 전 수년간 인근병원에서 의사에게 정기 검진을 받았었고, 만약 그 때 유방 촉진을 했다면 유방암을 쉽게 진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체검진으로 쉽게 진단할 수 있는 병이 이렇게 위태로운 상태에서 사망이 임박한 상황이 되어서야 발견되는 역설은 누가 보아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의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진찰이 사라진 시대가 낳는 의외의 비효율에 대해 이야기하는 베퀴즈의 절절한 눈빛은 심금을 울린다.
나는 이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았었다. 피지컬이 사라진 시대에 대해 통탄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당 CT, MRI 기계를 보유하며 신체검진 대신 수많은 불필요한 검사를 양산하는 이 나라의 의료 현실에 냉소를 보내곤 했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저 겉보기에 사려깊은 의사가 되고 싶은 나 자신의 알량한 자존감을 만족시키는 것 이외의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라면 병원에서 검진을 규칙적으로 받는 40세 여성이 말기암 상태에서 응급실에 실려올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주로 신체검진으로 이루어져 있는 미국의 ‘checkup’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검진은 각종 영상검사로 이루어진다. 여성이라면 대부분 유방에 대한 엑스선촬영이나 초음파 검사가 포함될 것이고, 40세 이상이라면 국가암검진으로도 2년마다 유방 엑스선촬영이 무료로 제공된다. 그러니 병원에 발걸음을 아예 하지 않는 이가 아닌 이상, 유방암이 진행되어 쇼크 상태에서 실려올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처럼 ‘피지컬'의 빈틈을 영상검사의 과다한 사용으로 메우는 구조가 바람직하다 말할 수는 없지만, 기술의 발전 및 대중화가 진찰에 소요되는 시간을 점차 줄여가는 것이 되돌릴 수 없는 방향인 것은 분명하다. 현장에 ‘피지컬’을 복귀시키자며 메아리없는 외침을 반복하는 것보다, 이를 대체할 수 있으면서도 위험이 적고 저렴한 검사를 개발하고 도입하는 것이 차라리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향일지도 모르겠다. 판데믹을 계기로 원격진료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이 때 피지컬은 환자에게나 의사에게나 시간낭비이자 구닥다리 진료의 상징이 되어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퀴즈의 강연은 여전히 감동적이긴 하다. 그는 의사의 진찰을 단순한 진단과정을 넘어 <의식(ritual)>에 비유한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형성하고 질병의 과정에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식.
“만약에 의사들이 환자들의 옷을 벗기지 않거나, 환자복 위로 청진기를 대고 듣는다거나, 완벽한 검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그 의식을 속인다면, 이는 환자와 의사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것입니다.”
환자의 옷을 벗기거나 걷을 시간도 없어 대부분 옷 위로 이루어지고 있는 나의 ‘피지컬’은 <의식>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짧다. 얻어지는 정보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하지 않고는 환자를 충분히 파악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나는 어쩔 수 없는 낀세대다. 수많은 유전체와 생활습관 데이터를 해석해서 환자를 파악하기엔 정보의학 까막눈이고, 피지컬로 <의식>을 치르기엔 손이 무딘.
그러나 수 시간 내 임종할 것이 분명해보이는 환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는 의미없는 행위를 애써 생략하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당신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베퀴즈의 강연이 맘에 남아서이다. 사실 그의 말은 너무 오글거리긴 한다. 낀세대 K 의사의 마지막 피지컬은 그저 힘든 치료의 여정을 걸어온 환자에 대한 작별인사일 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