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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재경엘리트 가족의 미시사

<전라디언의 굴레> 조귀동, 생각의힘, 2021

by OncoAzim

아빠는 제주상고를 졸업했다. 제주에서 전통적인 명문고로 쳐주는 제일고나 오현고에 가지 않은 것은 애초에 어려운 집안 형편에 본인이 대학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어 원래 계획이었던 은행원이 되는게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고의 출세코스였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고 했던 것이 좌절되면서 아빠에게는 일종의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4.3에서 ‘폭도’로 몰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가족이라는 딱지, 그리고 당시 살아있었던 연좌제는 그의 육사 진학을 막았고, 그 길로 그는 대학입시에 도전했다. 원래는 서울대 경제학과에 가고 싶었는데 당시 입시 경쟁률이 높아 하향지원을 해서 농경제학과에 합격했다.


최근 화제의 책 “전라디언의 굴레”를 읽으면서 아빠 생각이 났다. 저자는 지방 출신의 엘리트가 서울로 유학와서 자리잡으면서 서울의 기득권이 되고, 그들의 자녀들은 강남 송파 출신의 서울사람으로 자라나며, 그들의 이해관계는 지방 사람들의 그것과 점점 다른 것이 되어간다고 말한다. 주로 현재 민주당과 호남과의 괴리, 수도권과 지방의 정치경제적 거리가 멀어지는 기전 중 하나다.

아빠 역시 ‘지방출신 재경 엘리트’ 중 하나였다. 그는 대학졸업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KIST) 경제분석실 연구원으로 취업했다. 노량진에 단칸 신혼살림을 차린 후 잠실주공 2단지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주했다. 그대로 거기 있었다면 나는 지금의 리센츠아파트 단지에 있는 잠신초등학교에 갔을 것이고 (그때 막 학교 공사를 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잠신초는 81년에 개교했다) 송파구 출신 (당시는 강동구였지만) 서울사람으로 자라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고 81년 제주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잠실 아파트를 팔고 대출을 더 받아 제주시 연동에 2층 단독주택을 지었다. 훗날 돌아보면 그게 우리 가족의 부의 축적을 정지시킨 첫번째의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두번째는 91년 그가 사망하면서 가장의 정기적인 노동소득이 사라지게 된 시점이다.


그는 왜 고향으로 되돌아갔을까? 제주에 계신 홀어머니 곁에 있기 위해서가 1번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70-80년대에도 아빠는 할머니를 뵈러 일년에 몇 번이나 제주도에 다녀왔고, 아마 할머니에게 서울로 올라오시도록 설득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할머니가 움직이지 않으니 결국 가족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이주하는 결정을 한 것이 아닐까. 아빠는 그 모든 것에 있어 어머니가 최우선인 대단한 효자였고 그래서 그런 면에선 별로 좋은 남편이나 아빠는 아니었다.

그런데 과연 그게 효심 때문만이었을까? 모든 결정에는 단 한가지의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이를 먹어가며 알게 되니 아빠의 이직의 이유도 새삼 궁금해졌다. 표면적이지 않은 여러 잡다한 이유들은 한결같이 고결하지만은 않고 다분히 현실적이고 충동적인 면도 존재한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그런 다른 이유들이 조금씩 나오기는 했다.

“KIST에는 유학파들이 많았는데 너희 아빠는 그러지 않았고…”

“존경하던 상사가 다른 대학으로 옮겼고....”

“경제학과가 아니라 농경제학과 출신이라는 자격지심도 있었고…”

나에게도 왜 경기도의 ㄱ 병원에서 서울의 o 병원으로 옮겼냐고 물어보면 사실 한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는 것처럼 아빠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가끔은 후회하기도 하면서 그래도 지금의 자리에 충실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국회도서관에서 검색해보면 아빠의 논문은 7개가 뜬다. 80년대 초 아빠의 관심 대상은 주로 철강 및 석탄 산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수강의 수요구조분석 및 예측 : 거시적 접근법을 중심으로 (1980)” “ 철강공업에 있어서 한일간 산업내분업의 동향과 전망에 관한 연구 (1983)” “석탄화학공업의 육성방향에 관한 연구 (1984)” 이것들은 그가 KIST에서 하던 연구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 아닐까 싶다. “KIST 경제분석실은 1970년대 초에는 주로 기술경제적 타당성 분석과 관련된 용역사업을 다양하게 수행하였”고 대부분이 아마 당시 주력산업이었던 철강산업에 관한 분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KIST 경제분석실은 철강산업의 수요예측분석을 통해 지금의 포스코 건설을 이끌어낸 정책 산실이었기 때문에 철강산업 분석은 당시의 소위 ‘핫한’ 주제였을 것이고, 30대 연구원이었던 아빠가 그 조류를 따라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빠의 철강 및 화학산업에 대한 관심은 내 기억속에도 아주 조금 남아있는데 당시 제철화학 (지금의 OCI) 주식을 산 것이다. 아빠는 신문 한면 가득한 그날의 주가를 면밀히 살폈고 엄마는 ‘경제학자가 주식해서 재미보는 것도 아니더라’라며 비웃었으며 역시 제철화학 주가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반면 제주대에 자리를 잡고 몇년 후부터 그가 쓰는 논문들은 기조가 달라진다. “지방시대와 지역 경제 (1985)” “ 제주도 농가소득의 실태와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 (1988)” “제주도의 지역간 농가소득 격차 요인에 관한 연구 (1988)” 등 지역산업문제에 집중했다. 아빠는 당시 막 시작되려 하고 있던 무역 개방 속에서 지역 산업이 살아날 길을 모색하려고 했고 앓아눕기 전까지는 감귤농업에 대한 얘기를 자주 했었다. 본인이 주말에는 과수원에서 귤 농사를 짓던 농부였기 때문에 (취미로 하던 게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해서 같이 농약을 치러 다녀야 했던 엄마가 아주 싫어했다) 농업의 부흥을 통한 지역의 발전에 아빠가 진심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만약 아빠가 KIST에 계속 있으면서 서울에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KIST 경제분석실의 주 관심분야는 70년대의 철강 및 화학산업과 관련한 용역연구에서 80년대의 과학기술정책연구로 옮아갔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STEPI) 및 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전신으로 일컬어지는 이 직장에 아빠가 계속 있었다면 그의 관심과 전공분야도 중공업에서 과학기술정보산업의 경제적 분석으로 옮아갔을지 모르는 일이고, ‘전라디언의 굴레’에서 말하는 ‘산업화의 로켓’을 주도하는 수도권의 엘리트 중 하나로서 살아갔을 것이다. 물론 서울에 있었어도 91년에 암으로 사망하는 스토리는 바뀌지 않았을 것 같지만, 적어도 80년대 말 까지는 말이다. (엄마는 아빠의 암이 80년대 대학가에서 최루가스를 너무 많이 마시고 시위에 나가는 학생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발병했다고 믿고 있지만, 확률상 40대에 발생하는 암은 환경보다는 유전 또는 우연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그가 다시 고향에 내려오고, 학문적 관심이 중공업에서 농업으로 바뀌고, 잠실 아파트를 파는 과정은 “서울이 머리가 되고 지방이 손발이 되는 경제적 역할 분리” “개별 지역의 불균등 발전” “탈산업화로 인한 지방경제의 쇠퇴”라는 한국사회의 모순의 축적방향에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그의 사망 이후 우리 가족의 목표는 다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되찾는 것이 되었는데, 그 결과는 당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서울로의 재이주가 되었다. 모순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다가 결국 다시 모순을 심화시키는 ‘순리’에 적응해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인생경로는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고 취업한 것까진 그와 같지만, 펠로우를 마치고 제주대학교병원에 갈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가지 않은 것은 다르다. 수도권의 병원에 취업하고, 이후 더 큰 병원으로 옮기고, 경기도에서 서울 송파구로 이사를 온 것도 아빠와는 다른 선택이다.

그러나 그의 선택이 아쉽기만 하지는 않고, 오히려 약간의 질투와 비슷한 감정까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시류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서 갔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가 아닐까? 그게 앞으로 더 번영할 만한 길이건 아니건간에, 정말 이 사회에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 말이다. 평생의 주제를 아직도 찾지 못하고 시류에 따라 이것저것 하는 생계형 연구자로서는 부러운 뚝심이다. 역시 그러한 뚝심과 예민한 눈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존경스러운 연구자 조귀동은 ’전라디언의 굴레’에서 지역문제의 해결책으로서 “지역의 사람들이 온전히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들만의 언어와 논리로 구축한 담론” “중앙에 예속되지 않는 스스로의 성장 전략”을 말한다. 아빠가 추구했던 것도 비슷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수도권의 메인스트림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천적 학문 세계를 구축하려 했던 이가 내 아버지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제 내 인생에서 그럴 기회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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