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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밴, 병원, 그리고 이태원

by OncoAzim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318113?sid=110


애청하던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크라운>의 시즌 5가 시작되었다. 내가 본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2019년 방영된 시즌 3에 나오는 ‘애버밴’이다. 1966년 영국 웨일스의 마을 애버밴에서 일어난 참사를 다룬 이 에피소드는 다음날 학교에서 부를 노래연습을 하는 아이들의 일상으로부터 시작한다. 마을을 둘러싼 탄광에서 나온 쓰레기더미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이 전날 내린 폭우로 붕괴되며 학교와 마을을 덮쳐 총 144명이 사망하였고, 이중 116명이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7-10세 사이의 어린이였다고 한다.

재난 직후 영국 정부와 왕실의 모습은 왠지 그리 낯설지 않다. 정치권이 미리 예방하기 어려운 천재지변이라 책임을 회피하는 것, 다른 정파간에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 위험신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누적된 부조리까지. 참사 현장에 본인이 왜 가야 하냐며 망설이다가 떠밀리듯 가서 유족을 만나 난감해하는 여왕의 모습까지, 거의 50여년 전에 일어난 참사인데도 어디선가 본 것만 같다.

당시의 영국총리였던 해럴드 윌슨이 사고 당일 여왕의 전용기를 빌려 현장으로 가는 장면이 인상깊다. 총리는 이 상황을 그저 사고일 뿐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관료들의 분위기에 “상황이 급격히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그의 보좌진은 “예측하지 못한 폭우로 일어난 사고이니 정치와는 관계가 없다”라며 총리를 안심시키려 애쓴다. 이것도 참 익숙한 말들이다. 예측 불가능성. 불확실성. 그것은 많은 사고와 재난에 대해 책임자들이 호소하는 한계이자, 고통을 당하는 이에게는 한낱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변명은 부끄럽게도 내가 병원에서 종종 했던 말과 비슷하다.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거나 사망한 이유를 묻고 싶어하는 가족에게 의사는 "예측할 수 없었다" "병의 경과일 뿐" "의사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는 없다"라고 종종 말한다. 실제 많은 것이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고, 일부에서 나쁜 결과가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기도 하다. 언제 어떤 경로로 세균이 몸으로 침투하는지, 어떤 약이 어떤 환자에게 특이한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소리소문없이 자라던 암덩어리가 언제 장기에 균열을 일으키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환자가 언제 넘어져 골절상을 입는지, 언제 인공호흡기 연결호스를 스스로 잡아빼는지도 100% 예측할 수 없음도 물론이다. 그러나 그런 비극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지는 조건과 환경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많은 것들이 경험과 연구를 통해 알려져 있으니, 이를 바탕으로 100% 막을 수는 없어도 기존의 데이터를 이용해 최선의 대비를 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 최선을 다 했느냐가 될 것이다.

전공의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것이 의료행위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아무리 준비를 잘 했어도 피할 수 없었던 결과였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러나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인 지금은 그런 말부터 내뱉어선 안된다는 것을 안다. 일단은 환자와 가족을 위로하고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진료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살펴보겠다고 말해야 하며, 환자안전부서와 협력해서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무엇보다 진료의 최전방에 있는 전공의나 간호사의 탓으로 돌리면 안된다. 대부분의 문제는 잘못된 시스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며,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면 그런 문제는 앞으로 또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환자안전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원칙이다. 사회의 안전문제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애버밴’에서 윌슨 총리는 ‘모든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며 담담히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자 언론이 여왕을 비난하도록 은근히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 제 할 일을 하는 정치인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흔하진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인력배치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누군들 폼나게 사표를 던지고 싶지 않겠냐’면서 참사의 책임에서 너무나도 자유로운 언어를 구사하는 건 기상천외한 일이다.

얼마 전 서거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언젠가 인터뷰에서 ‘재위 기간 중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애버밴 참사 현장을 바로 찾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70년간 재위한 군주에게 가장 마음아픈 비극으로 남은 이 사건보다 이태원에서는 더 많은 이들이 죽었다. 이 죽음들을 가벼이 여기는 어떤 말들도 우리는 용서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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