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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Sep 03. 2017

내과의사, 동네 산부인과에 가다

생리 후면 어김없이 회음부의 습진이 생기는 저는 이번에 찾아온 불편감도 그냥 평상시와 같으려니 여겼습니다. 요즘 생리대의 발암물질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어서 점점 더더욱 찜찜한 마음이 들기는 하였지만 말이죠. 그런데 점점 소변을  보고 닦을 때마다 아파오고 샤워를 할 때 만져보니 0.5cm 정도 되는 압통을 동반한 결절이 생겼습니다. (이것도 나름 의학용어인데...만지면 아픈 멍울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바르톨린낭종? 헤르페스? 콘딜로마? 의과대학 시절 배웠던 감별진단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아, 내일은 아무래도 산부인과에 가봐야겠어. 

찾아보니 동네 아파트 상가에 한 군데 있습니다. 토요일 아침 문 여는 시간에 맞추어서 방문한 동네 산부인과. 깔끔한 대기공간에 각종 광고와 안내문이 탁자와 벽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질/소음순 성형수술로 자신감을 찾으세요. 3킬로그램 감량에 33만원. 6킬로그램 감량에 55만원. 디톡스와 제모시술. 개원가에 가서 이런 광고를 볼 때마다 궁금해집니다. 배운 것과 다른 일들을 하는 개원의 선생님들은 자괴감이 들지는 않을까? 아니 이런 일들이 환자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고 진정으로 믿고 하시는 것일까? 꼭 이런 것들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어쨌든 내가 진료를 받으러 온 이유는 이런 것들과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니 관심은 접어두기로 합니다. 

저는 병원에 갈 때면 제가 의사라는 것을 밝히고 진료를 받는 편입니다. 갑자기 제 입에서 의학용어가 튀어나오면 상대방이 당황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제가 의사라는 것을 알고 설명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지식수준에 맞춰서 설명하는 것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더 편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의사나 간호사인 환자를 볼 때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 만난 산부인과 선생님은 그게 별로 상관은 없었나봅니다. 진찰을 하더니 결절은 표피낭종이며, 질분비물이 있고 질염이 의심된다. (항생제와 항진균제가 포함된) 질정을 일주일간 넣어라. 그리고 겐타마이신 엉덩이주사를 맞아라. 그러고는 간호조무사에게 지시를 하고 일어납니다. 

겐타마이신?  gentamicin? 내과에선 잘 안쓰는 약입니다. 아미노글라이코사이드 계열의 항균제는 주로 그람음성균에 쓰지만 단독으로 잘 쓰지는 않습니다. 항균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 다른 항생제와 병합요법으로 쓰는 항생제입니다. 그리고 왜 근육주사를 맞아야 하나? 질염이면 보통 질정과 경구항생제로 충분하지 않은가? 주사치료가 필요한 골반염증 ( pelvic inflammatory disease; PID-자궁 및 난소 등 질보다 상부에 위치한 생식기관의 감염증을 말합니다)인가? 하지만 내 증상은 복통이나 발열을 동반하지 않았는데? 왜? 

간호조무사가 근육주사를 놓으려는 순간 "안맞으면 안돼요?" 하고 질문하니 의료진들의 표정이 변하는게 느껴집니다. 다시 환자용 의자에 앉은 저에게 선생님이 묻습니다. 

"주사 공포증 있으세요?" 내과 전문의 12년차가 그럴리가요. "아니요."

"항생제 사용에 거부감 있으세요?" 맨날 쓰는 약이 더 광범위한 항생제들인데 그럴리가요. "아니요."

"그럼 왜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항생제 선택이 좀 이해가 안된다,고 말해야 할까? 갈등하다가 순간 내뱉은 대답. "꼭 근육주사로 맞아야 하는건가 싶어서요." 

"뭐...그러면 그냥 본인이 약 지어서 드세요."

네? 무슨 말이지. 이 주말에 내가 아무리 의사여도 어디서 약을 처방받아 먹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분위기가 싸늘해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지어서 드시라구요. 질정만 처방할께요. 보시고 증상이 안좋으면 다시 오시던지요." 

하아. 알겠습니다. 


그 선생님은 저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불안감도 있었구요. 정말 PID에 가까운 심한 감염증일까. 일단 어디 가서 경구항생제를 받을 수는 없었고 (응급실에 가면 되지만 이런 일로 응급실에 가는 건 민폐중 민폐입니다), 불안하기도 해서 연구실에 있던 ciprofloxacin을 가져와서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시절 배웠던 질염에 대해 다시 공부를 했습니다. 불행히도 ciprofloxacin은 이 상황에서 흔히 쓰는 약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요로감염에는 효과가 있는 약제여서 대충 듣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질염의 흔한 원인균인  Gardnerella vaginalis 등 혐기성 그람음성균에는 항균력이 떨어집니다. 오히려 질내의 정상세균총을 파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균성 질염 (bacterial vaginosis)에 대한 표준항균요법은 혐기성 그람음성균을 커버하기 위해 metronidazole을 7일 복용하는 것입니다. gentamicin은 질염의 합병증으로 오는 PID가 입원을 요할 정도로 심할 때 clindamycin과의 병합요법으로 사용합니다.물론 일회투여는 아니고 하루 1-3회 근육 또는 정맥주사로 수일간 투여합니다. 

좀더 빠른 호전을 위해 주사투여를 권유하였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항균제의 스펙트럼을 생각해볼 때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gentamicin만 투여하려던 것은 아니고 경구항생제를 추가로 투여하여 병합요법을 고려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증상이 심했다면 추가적인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약 지어서 드시라고요 하고 보낼 정도라면 주사치료가 필요한 환자라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물론 개원가에서 사회적 상황에 맞게 변형되어 일반화된 처방에 교과서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경구약제를 처방하여도 환자가 끝까지 잘 먹지 않거나, 잊고 못먹는 경우가 흔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효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으면 환자가 끊기는 일이 허다한 상황에서는 주사치료가 일반화되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같이 짧은 진료시간으로 이해 환자의 개인별 상황을 고려하기 어려운 나라라면, 순응도가 낮은 (즉 복약스케쥴을 잘 지키지 않는) 환자에 맞추어서 처방이 표준화되다시피 변하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이것이 과연 옳은 방향인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월요일에는 아무래도 제가 근무하는 병원이나 다른 산부인과 의원을 소개받아 진료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딜 가던 자세한 설명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다시 선생님 앞에서 어버버하지 않도록 질문을 정리해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표피낭종이 맞는가? 질염이 심한 정도인가?  PID가 의심되는가?

환자의 마음에는 별별 의심과 불안이 생겨나서 의사 앞에서는 입이 굳어버리고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병을 잘 알아보고 질문을 정리해서 준비해서 가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가끔 제 스스로가 환자가 되어 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의사가 먼저 환자에게 "궁금한 것 있으세요?"라고 물어보는 것은 환자의 긴장을 풀어주고 정말 궁금한 것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마법의 질문이지만, 저도 3시간 정도 되는 한 세션에 30명 이상 예약이 잡혀있으면 쉽사리 하지 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그 말을 제가 들었더라면 차분히 저의 의문을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도 못하면서 다른 선생님들에게 '먼저 궁금한 게 있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라고 비난할 수는 없겠지요. 여러모로 답답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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