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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Mar 31. 2018

사전돌봄계획을 작성하다

어떻게 하면 환자들로 하여금 이름도 생소한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도록 안내할 것인가? 연명의료법이 시작되면서 이 점에 대해 고민을 해보다가 ‘의료진이 먼저 작성하는 것을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병원장님이나 진료과장님, 이하 저명한 시니어 교수님들이 사전의료의향서에 사인하고 이것을 들고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병원 곳곳에 게시하면 환자들도 좀더 긍정적으로 고려해볼 수 있지 않을지.... ^^; 그러나 이 아이디어를 감히 입밖에 내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를 먼저 마련해야지, 홍보를 위해 이런 것을 작성하라고 다른 선생님들께 권유드리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작년 의과대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my advance care plan(ACP)”에 대해 작성하도록 숙제를 냈던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advance care plan은 우리 말로 옮긴다면 “사전돌봄계획”입니다. 이는 사전의료의향서, 즉 advance directive를 작성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죽음의 과정에서 어떤 돌봄을 받았으면 좋을지에 대해 미리 생각해보는 과정입니다. 대개는 advance care planning facilitator (대개 간호사 또는 사회복지사가 이 역할을 담당합니다)가 환자 및 그 가족을 상담하면서 환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을 거칩니다. 사실 저는 우리나라의 연명의료법은 이러한 과정이 빠져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ACP 에 사용되는 문서 양식은 다양하게 있는데, 수업에서 사용하였던 것은 뉴질랜드의 The National Advance Care Planning Cooperative 라는 한 비영리민간단체에서 사용하는 양식이었습니다.  (www.advancecareplanning.org.nz)

뉴질랜드의 ACP 양식 표지입니다.

숙제를 내면서 저도 스스로 작성해보았던 것을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이 양식에서는 작성자에게  3가지 질문을 먼저 던집니다.  “만약 내가 죽음에 임박하여 스스로 의사표현을 할 수 없게 될 경우, 나를 돌보는 이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들” 대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저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전돌봄계획의 첫머리에 나오는 3가지 질문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어떤 것이 나에게 중요할 것인가:

- 가급적 통증이 적었으면 하는 것. 진통제로 인해 의식이 떨어지더라도 통증을 충분히 조절해주기를 원하며, 완화의료에 익숙하고 유능하며 사려깊은 의사와 간호사들의 돌봄을 받기를 원합니다. 가톨릭신자이니 (날라리 신자이긴 하지만) 종부성사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 가족, 언제나 환자가 우선인 의사로서의 사명, 그리고 글과 그림

가족과 친구들이 알고 기억했으면 하는 것들:

- 아들과 딸, 남편이 나와의 시간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동료와 환자들이 나를 사려깊고 전인적인 진료를 한 의사로서 기억해주었으면 좋겠고, 유머러스하고 재능있는 작가이자 만화가(?)로서도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런 질문에 대답하다보면 자신의 삶과 그 의미에 대해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이 가라앉는 한편 남겨진 사람들 생각에 마음이 아파집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 없이는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그 마무리가 어떠해야 하는지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 다음으로는 내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원하는지 체크리스트 형식으로 적도록 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고통없이 순식간에 저 세상으로 갔으면 좋겠다'고들 말하지만, 삶이 항상 원하는대로 되지 않듯이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고,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미리 밝혀놓으면 가족과 의료진은 최대한 그 방향으로 노력할 수 있을 뿐이지요. 저는 가급적 나를 편안하게 해줄 것, 급식튜브나 배액관 및 카테터는 증상조절에 도움이 안된다면 제거할 것,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 불필요한 약제는 끊는 것, 영적 돌봄을 받는 것에 체크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실제 말기에 도달하였을 때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체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중요하지만....^^;;;)

임종시 바라는 사항에 대한 체크리스트

그 다음으로는 선호하는 임종장소, 매장/화장여부, 장기기증에 대한 의사를 적도록 하고, 마지막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료적 처치를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를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구체적인 의료적처치의 의미와 부작용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들어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는 말기암 및 식물인간상태, 또는 기타 회복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뇌손상의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대부분의 연명의료장치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급식튜브와 정맥영양, 투석, 승압제, 체외막산소화장치 등)를 하지 않는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대신 말기암으로 사망하게 될 경우 통증 및 섬망(신체질환으로 인해 급격히 발생하는 의식혼란을 말합니다) 을 충분히 약제로 조절해주기를 원하며, 완화적 진정요법 (임종을 앞둔 환자에서 통증이나 섬망이 매우 심해 좀처럼 조절이 어려울 때 진정제 등을 이용해 수면상태에 들게 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을 받기를 원한다고 적어놓았습니다. 실제 많은 가족들이 통증조절을 하면서 진통제로 인해 환자의 의식이 떨어지면 이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식도 명료하고 통증도 조절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굳이 선택한다면 저는 의식혼란이 오거나 기면상태에 들더라도 통증이 덜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고, 아프더라도 끝까지 의식이 명료하기를 바라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미리 밝혀놓는다면 의료진과 가족들이 좀더 일관성을 가지고 환자를 돌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연명의료에 대한 의사표시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전의료의향서는 이런 구체적인 양식이 아닙니다. 연명의료를 받을지 말지 여부를 단지 5개의 체크박스에 표시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하면 쉽게 작성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이 서류의 보관, 등록, 법적효력 등에 대한 내용이 더 많고, 자신의 삶에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보다는 무슨 각서같은 느낌이 더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튼 저는 그런 연명의료들이 저의 삶에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은 많은 경험을 통해 확신했기 때문에 사전돌봄계획을 먼저 생각해보았고, 그래서 법무팀 사무실에 내려가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작성한 이야기는 또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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