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게 나는 없다. 한평생 그런 특기 하나 없이 그때그때 필요한 기술만 그럭저럭 해내는 수준으로 하면서 살아왔다. 학생 때는 그림을 좀 그렸으나 그것 역시 우와! 하는 수준은 아니었고 그것을 전공할만한 상황도 되지 않았다.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체육이나 음악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어서 고려할 적성이 없이 그저 성적에 맞춰 적당한 전공을 골라 대학을 갔다. 당연하게도 그 전공도 적성에 맞지 않아 전공했다고 하기도 무색할 만큼 지식을 쌓지도 못 하였다.
나에게 특기가 없다는 것을 처음 인지한 것은 구직을 하면서 당시에는 꼭 기입해야 했던 특기란을 마주했을 때였다.
내 특기는 뭐지?
처음으로 나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내가 잘하는 게 뭐가 있을까?
그럭저럭 얼추 해내는 것은 몇 가지 있었지만 그것은 특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고, 특기란에는 직무와 관계있는 것을 적거나 아예 면접에서 확인이 불가능한 것을 적어야 한다는 것이 룰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회사에 도움이 될만한 특기는 없었고 거짓으로 지어낼만한 무언가도생각나지 않았기에 나에게는 특기가 없다는것을알게 되었다.
특기 하나 만들어 보고자
취향이 없어 딱히 적극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야가 없었던지라, 회사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기술 하나씩 습득하는 것으로 특기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엑셀을 배우고 PPT도 혼자 다루어 봤다가, CAD와 MAX를 배우고 전산회계 수업도 여러 번 들었다. 그리고 무엇하나 자격증조차 따지 못한 채 그럭저럭 해내는 수준에서 멈춰버렸고 그런 나에게 세상은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럭저럭 하는 수준조차 증명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대신에 그럭저럭 해내는 인간을 이래저래 여러모로 쓰고자 하는, 적은 월급에 다양한 일을 해야 하는 회사에서만 나에게 관심을 가졌다. ERP도 쓰고 회계사무소 전까지의 장부 작성도 하고 엑셀로 온갖 양식을 만들고 CAD로 도면도 치고 처음 거래하는 외국 업체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수입도 진행하지만 최저시급에서 조금만 더 줘도 되는 그런 자리 말이다.
왠지 억울한 기분도 들고 이게 다 특정 기술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퇴근 후 무언가 준비해보려 했지만 근무시간 동안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양한 일을 해내다 보면 기력이 소진되어 무엇을 해 볼 생각조차 하지를 못 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무엇을 내 특기로 만들 수 있을지 선택할 수가 없었다. 이미 인테리어 설계직을 선택했다가 중도하차했다는 실패 경험이 나는 쉽게 포기하는 어정쩡한 인간이라는 테두리 안에 나를 가두었던 것이다.
회사는 그저 돈이나 벌고 특기나 취미는 회사 밖에서 하자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어린 나이에나 가능했던 것이지, 이것저것 다 할 체력이 되지 않아 업무를 줄이고자 하는 특기 없는 30대 후반은 아무리 연봉을 낮춰도 갈 곳이 없었다. 눈을 낮춰 취업한다는 것은 이제 연봉만 낮추는 것뿐만 아니라, 휴일도 보장받지 못하면서 기존에 하던 온갖 업무를 다 해야 하는 자리로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얼마 전 취업센터에서 알선한 일자리는 경리 일에 운전도 해야 하고 다른 이의 업무까지 보조해야 하며 연차 없이 최저시급보다 몇백 원 더 받는 자리였다.
정말 이게 특기 없이 살아온 나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일까?
특기는 없지만 점점 잘하게 될 거라는 믿음
마지막 퇴사 이후 내가 한 것은 읽고 쓰는 것이었다. 심각한 우울증으로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제대로 휴식 시간을 갖지 못 한채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현실이 더욱 기력을 빼앗았는데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 읽고 쓰는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딱히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매일 책을 읽고 블로그에 독후감을 썼다. 서평단을 신청해서 서평을 작성하기도 했고 예전에는 잘 읽지 않았던 분야의 책도 읽으면서 무심하게 읽고 쓰는 것을 반복했다. 특기는 없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게 심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기력이 조금 회복된 후에는 영어공부를 시작했고 영어도 읽고 쓰기 위주로 공부를 했다. 목표로 했던 토익 점수는 무사히 받을 수 있었고 읽고 쓰는 정도만이라면 영어를 사용하는 업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서평단을 신청했을 때 선정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나서 혹시 내가 글을 잘 쓰나 라는 착각에 빠졌다.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몇 번 떨어졌던 브런치 작가에 다시 지원을 했고, 그동안 블로그를 쓰면서 쌓인 노하우가 있었는지 특별한 내용 없이 지원했다 생각했는데 당당히 합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목차를 갖추어 잘 정돈된 글을 쓰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냥 블로그처럼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자유롭게 쓰고 있다.
몇 개월째 백수로 지내면서 한국어와 영어로 읽고 쓰고 이력서를 넣는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꾸준하게 반복해 온 그 생활이 조금씩 나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인터넷 세상에 내가 쓴 글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동안 읽었던 책들이 내면에 단단히 굳어가고 있다. 남들과 비교해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것도 아니고 여전히 특기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타인과의 경쟁에서는 여전히 뒤처져 있고 어떻게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감을 못 잡고 있다.
그저 어제의 나보다 책 한 권 더 읽고 글 한 편 더 적고 영어 표현 하나 더 익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남들만큼 잘하거나 남들보다 잘하는 것을 특기라고 한다면 나에게 아직 특기는 없다. 특기가 없어 남들보다 불리하지만 조바심 내지는 않을 거다.
남들과 비교하느라 남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나의 속도대로 노력하는 것이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꾸준하게 한 가지 일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지 스스로를 원망하고 비하했었는데, 그것은 남들이 원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가 원하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점점 더 나은 수준으로 끌어가려고 한다. 남들 기준에는 한참 모자라고 속도도 느려서 경쟁이 되지 않는다며 세상에서 밀려날지 몰라도, 내 세상에 비난받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어느 길을 가도 남들의 기준에 못 미친다면 내가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길 위를 걷는 것이 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