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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Mar 11. 2024

기꺼이 사랑하겠다는 마음

유니세프 광고가 전한 세상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마음

흑백 화면 속,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 법한 배우들의 얼굴이 연속으로 등장한다.

‘나 한지민은. 나 박해수는. 나 한효주는. 나 고수는. 나 박보영은. 나 이진욱은. 나 추자현은. 나 정우는. 나 이병헌은.’


‘우리는 유니세프 팀입니다.’

그들을 한 명 한 명 촬영하는 모습을 멀리서 담은 씬들이 이어진다. 배우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단체 샷을 촬영하기도 한다. 그들의 손에는 똑 같은 형태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

‘유니세프 팀 한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이면, 전 세계 어린이에게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유니세프 팀 반지로 당신의 힘을 더해주세요.’


마지막 장면에는 17명의 배우들이 옆으로 나란히 서 있다. 그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나는 유니세프 팀입니다.

I'M UNICEF TEAM.’


기부에 참여함으로써 한 팀이 될 것을 제안하는 유니세프의 캠페인이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정기 후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니세프 팀에 합류한다는 증표’로서 반지를 제공했다. 이로써 세상의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게 했다. 이는 신념에 대한 동의, 지지, 연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Meaning Out(미닝 아웃)소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꽤 매력적인 아이템이 될 것 같다. 한편, 개인적으로 이 캠페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키워드는 ‘팀’이었는데, ‘우리가 한 팀이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 3세계 국가 뿐 아니라,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도 고통은 종종 목격된다. 마땅히 슬픔을 겪어도 되는 사람은 없지만, 살면서 고통은 늘 예상하지 못한 때, 예상하지 못한 사람에게 찾아간다.


2023년 연말, 우리는 한국을 대표했던 한 명의 영화배우를 잃었다. 사실이 확인되기 전부터 낙인을 찍어버리고, 연예인을 가십의 대상으로만 소비하는 우리 사회의 현 주소를 볼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고통을 구경하고 방관했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퍼트리기도 했다. 그는 연예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외로움에 취약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초래한 잔인함을 목격하며, 그 해 겨울 바람은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꼭 연예인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우리는 꽤 가혹하다. 몇 년 전에는, 내 또래의 여성이 같은 회사 여러 명의 남성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가십성 소식지를 카카오톡으로 받았다. 그 소식지에는 그들의 실명과 사진, 개인적인 사연까지 적나라하게 들어가 있었고, 그녀를 질투한 주변 사람이 이를 유포시켰다고 한다. 이를 나누며 웃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법적 대응으로 피해 보상을 받게 되더라도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미 상처의 흔적이 새겨진 내면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기에. 만약 내 가족이었다면, 내 친구였다면, 하고 생각하니 일면식도 없는 그녀의 마음이 걱정되었다.


문제는 우리가 많은 순간 사람들을 ‘타자’로 규정하고 눈감아 버린다는 것이다. 사람은 평생 몇 천명의 이름을 접하지만, 그 중 기억하는 사람은 몇 백명 정도이고,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건 서른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밖의 나머지 사람들은 결국 편의에 따라, 타자라는 집단으로 분류되어 버린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약 그들의 목소리 하나하나에 귀 기울여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제서야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커다란 슬픔인지 보인다.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져 버렸음을, 그들이 얼마나 거대한 외로움을 온 몸으로 맞고 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그의 재난 영화 3부작 중 하나인 <너의 이름은>에서 일본 대지진 피해자를 잊으면 안 되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그려냈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난 날 잃어버렸던, 잊고 살아갔던, 한 여성과 재회하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다. 누군가를 계속 찾고 있었다는 그의 말은,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그리움을 평생에 걸쳐 살아낼,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로 들렸다. 단순한 집단을 벗어나 개인의 고유성을 부각한 ‘미츠하’라는 이름은, 어느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인생의 빛이었던 것이다.


작년 가을, 내게도 가까운 곳에서 고통을 지켜보고 위로할 일이 있었다. 둘째 출산을 딱 한 달 앞두고 배가 산 만하게 불러 있는 절친한 친구가 모친상을 당했다. 티 없이 맑고, 부러울 게 없을 정도로 풍요롭게 살고 있었던 그녀가 검은색 한복을 입고 퀭한 눈으로 손님을 맞고 있는 걸 보니 인생은 대체 왜 이럴까 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허무했다. 가족, 사랑, 돈, 일 등 인생의 모든 방면에서 때가 묻지 않은 사람은 본인의 건강이 문제되거나, 이른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기도 한다는데 바로 그 친구의 일이 그랬다. 불행은 세상을 떠돌다가 행복한 사람을 기어이 찾아내 습격하는 건 아닐까 해서 그 뒤로 나 역시 한동안 삶이 두렵게 느껴졌다. 그 때 빈소에서 친구를 안아주고 함께 울며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중 필연히 아픔을 겪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 사랑할 사람을 찾아 때로는 마음을 터놓고 울면서 위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 역시 절망하고 있는 누군가를 곁에서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의 꿈은 자신이 마지막 슬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의 선택은 언제나 세상의 슬픔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에게 위안은 세상에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커피숍 한구석에 커다란 나무 테이블을 두고, 그 위엔 형형색색의 실과 크고 작은 바늘을 올려놓았다. 바느질을 할 줄 알거나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그 자리에 앉아 수를 놓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앞에서는 사람들이 속내를 잘 털어놓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슬픔이 이슬 맺힌 새벽 꽃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조심 다뤘다.’*

정혜윤 작가의 저서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참을 멈춰 있었다. 삶에서 아픔을 겪은 사람이, 정작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이, 다른 이들은 자신만큼 슬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세상을 살피고,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도우면서 다시 살아갈 용기를 냈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슬픔의 크기만큼 타인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 참 먹먹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것이 우리 모두가 나아가야 할 길의 방향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나눌 수는 있고, 많은 이야기를 접함으로써 타인을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두려움에 맞서는 방법은 결국 이 세상과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인디언 단어에 따르면 친구는 ‘슬픔을 함께 지고 가는 존재’라고 한다. 내가 어두웠을 때,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곁에 있음을 알리고 나를 밝혀주었듯이, 나 역시 타인의 슬픔에 냉담해지지 않고 싶다. 누군가의 고통을 막아줄 수는 없지만, 소외된 사람들 대신에 울어주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있다. 사회에 거창한 희망을 줄 수는 없어도,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고, 따뜻한 시선이 담긴 언어를 꺼내 위로와 애도, 사랑을 전할 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쓰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다. 접하고 나면 주변을 살피겠다는 마음을 얻게 되는 그런 글을, 타인의 외로움에 무감각했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혼자만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지만, 그런 진실된 구원의 마음들이 흐르면 결국 이 사회에 온기를 더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거대한 슬픔이 다가와도, 세상은 여전히 희망을 품은 모습일 테니까.



*정혜윤의 에세이집 <슬픈 세상의 기쁜 말>로부터 문장의 일부를 인용해 재구성했습니다.

*인용한 광고 : Unicef Korea, <배우들의 손에서 빛나는 유니세프 팀 반지, 45”>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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