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극의 시작
여름이 짙어진 칠월, 견우직녀 달.
유난히 크고 붉은 만월이 음산한 바람에 밀려온 구름 떼에 가리자, 달빛은 금방이라도 피를 흘릴 듯 붉게 물들었다.
“세, 세자께서 임금을 시해하..!”
누군가의 흔들리는 절규는 마치 날카로운 것에 벼린 듯 단숨에 잘려 나갔다.
아들인 세자 이 유가 병석에 있는 아비인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 위에 오른 그날 밤,
산실청에서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만 참혹한 침묵을 깨뜨렸다.
늙은 왕의 어린 계비가 오랜 산고 끝에 낳은 아이.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고, 공주님이 태어나시면 절, 대 아, 아니 될 것입니다.”
성수청의 국무당 안 옥환은 떨리는 목소리로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으나, 왕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연유는?”
왕의 차가운 목소리가 어둠 속을 가르자, 옥환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죽 흘러내렸다. 뒷목으로 전해지는 얼음보다 더 냉혹한 왕의 시선이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나 코 끝에 스치는 피비린내와 선듯한 살기 때문에 옥환은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툭, 그녀 앞으로 피 묻은 왕의 사인검이 땅에 박혔다. 옥환은 움찔 거리며 더욱 머리를 수그렸다.
박힌 칼날에서 방금 전 몸을 푼 계비 윤 씨의 피가 흙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태어나는 공주께서 가지신 특별한 능력 때문이옵니다.”
“특별한 능력이라...”
그녀의 대답이 의심스러운 듯, 왕의 눈초리가 더욱 가늘어졌다.
‘왕이 공주를 죽이는 일은 반드시 없어야 할게야.’
선대국무당 영무의 유언이 옥환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녀로서는 목숨을 건 도박과 다름이 없었다.
“공주께서는 이 나라 재앙의 씨앗이 될 것이옵니다.”
옥환은 온몸의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왕은 말을 맺는 대신 손을 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길어지는 침묵에 옥환은 두 주먹을 꼭 쥐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마지막을 선택하는 일이 없기를...
“하지만, 사내아이도 아니고. 능력이 있다 하나 고작 계집인 것을.”
그는 아직 식지 않은 피 묻은 사인검을 아무 감정 없이 내려 보며 말했다. 그제야 옥환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들이켰다.
지난밤, 궁에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다. 어린 중전은 산통 중이었고, 병이 든 왕은 침전에서 어의의 시료를 받고 있었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세자는 부왕에게 하사 받은 사인검을 들고 거침없이 침전으로 향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세자 이 유, 궁 안에 모든 이들이 어진 동궁이라 칭송했고, 경당의 학자들도 입 모았던 모범적인 국본이었다. 선왕의 유일한 아드님이셨으며, 조선 제일의 세자로 그의 앞 날은 말 그대로 탄탄대로였다.
거기다 선왕의 병이 위중한 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그가 왕위를 이어받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굳이 그가 이런 패륜적인 일을 벌일 필요조차 없었다. 때문에 궁 안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자가 미쳤거나, 귀신이 들렸다 떠들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다시 묻지. 그 능력이란 것이 무엇이냐?”
옥환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자칫 이 자리에서 제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그. 그것은...”
그녀는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어린 핏덩이가 죽는 것은 차마 못 볼 일이었다. 산통을 겪으면서 내내 제 치마 자락을 붙들고 애원하는 중전의 소원을 차마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신녀로 태어나셨으나, 그 기운이 상서롭지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다. 붉은 만월, 저승 달을 몰고 온 아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운을 타고 태어났다. 비록 신녀로 태어났으나, 그녀를 받아줄 신은 이 세상에 없을 터. 탁! 그가 이번에는 거칠게 땅에 박힌 칼을 뽑아 들었다. 옥환은 다시 한번 바닥에 납작 엎드려 눈을 꼭 감았다.
“그래? 훗!”
“송구하옵니다. 전하!”
“신녀 따위...”
엎드려 벌벌 떠는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 왕은 조소했다.
“그 말인 즉, 공주가 너와 같은 족속이라는 뜻인가?”
그의 손에서 피 묻은 사인검이 빛을 발하며, 옥환의 눈가를 스친다. 이내 그녀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선왕의 죽음도, 계비의 죽음도 알지 못했던 네가 감히, 내게 예언을 하는 것이냐? 그런 무녀 따위. 옥환아! 목숨이 그리 아깝더냐? 나더러 이제 막 태어난 핏덩이를 죽이라니. 그것도 왕자도 아닌 고작 계집아이를 말이야.”
그는 칼끝으로 옥환의 턱을 치켜올렸다.
“허, 허나, 사실이옵니다.”
“능력이 있다 한들 계집아이일 뿐이야. 그런 아이를 죽여 무엇에 쓴단 말이냐? 어리석은 것. 네가 모시는 신도 참으로 멍청한가 보군.”
“...”
옥환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씹었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지만, 이가 다닥다닥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라.”
서늘한 왕의 목소리에 옥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서 지독한 피비린내가 났다. 붉은 핏발이 선 왕의 검은 눈동자는 텅 빈 듯 공허했다. 옥환은 서둘러 고개를 떨궜다.
“앞으로는 그 신보다도 내 말에 우선 해야 할 거야. 이제부터 자네 목을 지켜주는 것은 그 신이 아닌 과인이니 말일세.”
그는 옥환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인 후, 피 묻은 칼 끝을 지지대 삼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핏덩이는 그대가 알아서 하든지.”
“예?”
돌아 나가려던 그가 힐끔 옥환을 돌아보았다.
“그 입으로 그러지 않았던가? 공주는 살아서는 안 된다고. 그러니 자네 손으로 죽이면 더 좋겠지.”
검을 어깨에 걸치고 느릿하게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 뒤로 어둡고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순간 그녀의 가슴 한 켠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몇 시진도 지나지 않아 옥환의 손에 작은 핏덩이가 안겼다. 아이는 붉고 도톰한 입술을 연신 조물대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간신히 왕의 칼 춤에서 벗어난 공주였다.
'만신'
핏덩이에 불과했으나 아이의 기운은 옥환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가 그토록 바랬던 공주이자, 이 성수청의 진정한 주인이 될 여인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왕에게는 재앙의 씨앗일 뿐이었다.
옥환은 하늘을 올려 보았다. 만월의 붉은 달은 여전히 그 음산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저승 달이다. 저 승달에 태어난 신녀.’
저승 달에 태어난 신녀를 받아줄 신.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는 오직 하나였다. 오늘, 그는 분명 그곳에 나타날 것이다. 저승 달이 뜨는 핏빛 보름에 귀도를 열고 나타날 단 하나의 존재. 이 아이의 운명은 오로지 그의 손에 달렸다.
옥환은 강보에 싸인 아이를 단단히 몸에 묵고, 성균관 뒤편에 있는 계성사로 향했다. 그녀는 불상 앞에 절을 올린 뒤, 향을 하나 꽂아 두고 서둘러 응봉을 올랐다.
향이 다 탈 때까지, 산에서 그를 만나길 옥환은 간절히 빌었다. 음기가 짙어 귀鬼들이 가득한 산 응봉. 무녀들도 악귀에 잡아 먹힐까 꺼리는 흉산이었다.
'한 번쯤은 나도....'
탁탁탁!
문득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그녀는 자리에 멈췄다. 고개를 둘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힘이 그녀를 짓눌러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옥환이 본 것은 산을 위아래로 관통하듯 펼쳐진 뿌연 안개 길이었다. 귀도鬼道였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는....
“무녀가 어린 핏덩이를 안고, 저 승문에 든 이유가 무엇이냐?”
부드럽고 맑은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옥환은 고개를 들어 남자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6척이 넘는 큰 키. 머리부터 다리까지 온통 밤을 몰고 다니는 것처럼 어두운 옷을 입은 그 허리에는 붉고 푸른 비단으로 감은 긴 환수도가 매여 있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와 마주칠 찰나, 옥환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간신히 그녀의 시선에 걸린 것은 창백할 만큼 하얀 턱선과 여인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붉은 입술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순식간에 남자의 눈이 옥환의 내려 뜬 시선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남자가 일부러 고개를 숙인 탓이었다.
옥환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남자의 가는 눈초리에 담긴 눈동자는 분명 검은색이 아닌 금빛. 본능적으로 절대로 그 눈과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놀란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바싹 엎드렸다.
"안 옥환이라 하옵니다."
“안 옥환이라. 무녀가 제 발로 찾아올 일이 대체 뭘까?”
이름을 들은 그는 만족스러운 둣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안고 있는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살. 살려주십시오.”
“저승사자에게 살려달라?"
그녀는 바닥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빌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잠든 것처럼 조용하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남자의 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런, 어미의 죽음과 아비의 살기를 타고 태어난 아이구나. 참으로 비참한 운명이야.”
불쌍히 여기는 말투와 달리 그의 입가엔 자조적인 미소가 번졌다. 옥환은 놀란 얼굴로 품에 있는 아이를 서둘러 제 옷소매로 가렸다.
“그 아이를 내게 다오.”
그러나 옥환은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고개를 저었다. 아이에게 시선을 둔 채, 손을 내밀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살려달라하지 않았느냐?"
“설마 이 아이가 필요한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저승사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산에 열린 귀도와 아이가 연관이 있습니까?"
눈도 똑바로 뜨지 못하고 따박따박 따지듯 질문하는 옥환을 남자는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관련이 있든 없든 그것은 함부로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허면, 쓸모없는 무녀 나부랭이 따위가 이곳에는 왜 왔지?”
여전히 아이에게 시선을 두었던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옥환에게 돌아왔다.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냐?”
“알고 있습니다.”
“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부디 이, 불쌍한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그는 저승사자 현림. 하나의 죽음으로 수 십, 혹은 수 백, 때로는 수 천의 영혼을 거두어들이는 지옥의 신어었다. 염라 대황이 가장 아끼는 인황차사요, 저승의 오대천황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저승 신 중 하나. 옥환은 지금 그에게 아이를 살려달라 부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영무가 말한 그분이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일 것이다. 잠깐 옥환에게 돌렸던 시선은 칭얼대는 소리에 내려갔다. 현림의 금빛 눈동자가 아이의 눈과 마주치자 아이는 금방 방긋거렸다.
“그래서? 내가 이 아이를 살려 주면? 국무당이 데려온 아이이니, 보통의 아이는 아닐 터이고?”
“신녀이십니다. 훗날 차사님이 신내림을 내려 주시옵소서.”
현림의 붉은 입가에 어이없는 미소가 걸렸다. 저승사자를 모시는 신녀라, 저승의 오대천황이 분노할 듣도 보도 못 한 일이었다. 그는 방긋 웃는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고민하듯 이마를 쓸었다.
작은 손 발을 연신 꼬물거리며 웃는 아이를 보는 것이 그에게는 퍽 난처한 일이었다.
쉭! 그때 화살 하나가 정확히 옥환이 아닌 아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는 날아오는 화살을 아무렇지 않게 한 손으로 쳐냈다.
“신녀라.”
그의 신경은 이미 날아오는 화살에 있지 않았다. 쉭! 윽, 이번에는 옥환이 어깻죽지에 화살을 맞았다. 그녀가 화살을 맞든 말든, 현림은 쓰러지는 옥환의 손에서 아이만 달랑 안아 올렸다.
“네가 정녕 나를 신으로 모실 것이냐?”
대답이라도 하는 듯, 아이가 연신 까르르 웃는다. 그런 아이의 얼굴을 보며 현림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그럼, 어디 이름이나 하나 생각해 볼까?”
그는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숲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다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만월의 붉은 달이 마치 아이처럼 그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밤이라, 불운한 운명에게는 딱이구나. 너와 나처럼.”
그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방긋 웃는 아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붉을 ‘단’에 그림자 ‘영’이 좋겠구나.”
날아오는 화살을 가볍게 떨치며 그는 숲 안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