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가는 물고기 Oct 28. 2020

#25 달빛아래 맺은 서약

ㅡ 함곡관의 월피

함곡관은 조용하고 적막한 곳이었다.

험준한 계곡을 따라 잔잔히 흐르는 물과 깎아지르는 절벽과 월피라 부르는 초승달 모양의 작은 호수.


이 모든 것이 세상의 시간과 달리 흘러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왠지 친숙한 풍경과 여유로운 일상이 그녀는 마음에 들었다.


작은 별채를 돌아나가니 초승달 모양의 작은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교방에서나 볼 수 있는 호수. 그 이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정자는 사방이 푸른 비단으로 가려져 안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오’     


기녀들은 들어올 수 있단 건가? 휘는 찬 얼굴로 정자를 노려보았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푸른 비단이 바람 펄럭였다. 그 사이로 홀로 조용히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이 세상 모든 어둠 속, 한 줄기 빛처럼 달빛은 그를 향해 있었다.      


황하의 강물을 머금은 것 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은 강인한 턱선과 대조되어 기이한 아름다움을 뿜어 내고 있었다.


다시 봐도 참으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를 보고 세상 모든 색 色을 다 품었다 놀리던 이융기의 말은 사실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내가 지금까지 여인 하나 없이 살아왔다는 것이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그와 가까운 여인 중 끝이 좋았던 경우는 없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

앞으로가 평탄할 거란 예상을 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한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참을 서서 그를 멀거니 바라만 보는데 문득 지성이 얼굴을 돌려 그녀를 향했다.

둘 사이에 시원한 강바람이 스쳐 지났다.     


“왜 나오셨소!”

“바람이나 쏘일까 하여 나와 보았습니다.”     


휘는 그와 마주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도 한 잔 주시지요!”     


지성은 말없이 웃으며 그녀에게 잔을 내밀었다.  

   

“이곳이 마음에 드십니까?”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란 그녀였다.

좀처럼 사람의 발길을 내어주지 않는 험한 산과, 거칠고 탁한 물결이 일렁이는 황하.

그곳이 그녀의 고향이었고. 그녀의 세계였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입니다.”     


휘의 눈길이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물빛에 머물렀다.      


“다행이군요.”     


지성은 술잔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물을 바라보던 휘의 반짝이는 검은 눈이 그에게 곧게 꽂혔다.      


“그리고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샘이 날 만큼.”      


지성은 그녀가 속으로 하는 말을 실수로 내뱉었다고 여겼다.

아니면 잠이 덜 깼거나.

그가 얼굴을 돌려 휘와 얼굴을 반듯하게 마주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는 그녀의 생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생각이나 계산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느낀 그대로의 마음. 그 마음이 사랑일까.  

    

“공주께서도 이 얼굴이 마음에 드십니까?’    

 

지성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이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되었습니까?”

“잘못되었소!”


지성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나와 혼약을 맺었다가 파혼당한 여인들이 얼마나 되는 줄 아오? 아! 공주께서도 포함이 되는군.”     


삐딱하고 공격적이 말투였다. 무엇이 그를 화나게 했을까?

혹여 사내에게 아름답다 한 것?

아니면 샘이 난다고 말한 것?

휘는 말없이 술잔을 비워냈다.      


“앞으로 많은 후궁이 들어오겠지요!”     


말하는 휘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성은 픽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소?”     

“비록 폐하의 뜻에 따라 태자가 되셨으나 입지가 매우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둘 태평공주도 아니시니….”     


휘의 말은 모두 정설이었다. 그러나 그런 바른말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더러 후궁을 많이 들이라? 정말이오?”

“거짓말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단호함. 지성은 마시던 술을 내뱉을뻔했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 부여 덕장은 평생 어머니 송화부인 하나만 두었다. 어머니의 몸에서 언니와 제가 태어났으니 아비가 다른 여인을 두어 어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그녀는 본 일이 없었다.      


“저는 생각보다 참을성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알고 있소.

“그럼 ….헤아려 주시면 됩니다.”     


말하는 휘의 눈망울이 점점 저들이 앉아 있는 누각의 바닥을 향했다.


이제야 스스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닫는 중이었다. 지금 그에게 나는 질투가 심하니 나 말고 다른 후궁을 들이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달라는 소리였다.


이제 곧 장안에서 낙양에서 귀족들의 혼서가 날아들 터였다. 태자의 최측근인 그는 그 혼인을 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투기였다.      

갑자기 말이 뚝 끊긴 휘와 달리 그의 얼굴은 비추는 달보다도 환하게 빛이 났다.


조금 전까지 제멋대로 상처 주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졌다. 그녀도 여인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왕녀의 얼굴이 아닌 조금 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줄 알았다. 군더더기 없는 감정.     


‘조정의 많은 문무 대신들이 서로 딸을 주려 할 텐데. 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태평공주는 지성의 정곡을 찔렀다. 그는 감당할 수 없었다.     


사괵은 장안과 낙양을 걸친 수도의 최전선, 황실의 금군과 우림군을 포함해 막강한 군사력이 집중된 곳이었다.


황궁의 양날의 칼이라 불리는 곳.

황제에게 가장 신임을 받으면서 제일 먼저 의심을 사는 곳이기도 했다.


대대로 사괵왕은 셀 수 없는 후궁들과 처첩을 거느렸다. 자연스럽게 괵왕에게는 수많은 자식이 있었고, 비빈들의 암투는 황궁만큼이나 치열했다.     


당이 세워지고 수많은 역모가 일어났다. 그때마다 괵왕은 자식들의 목숨으로 황제의 의심에서 벗어났고, 그들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나.

그렇게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가문은 여황제가 등극하자 가장 먼저 숙청의 대상이 됐다.

사돈의 팔촌까지 그 씨를 말려버릴 것처럼 여황제의 칼춤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지성의 아비는 왕비의 목숨을 담보로 겨우 아들을 살릴 수 있었다.  그가 살기 위해 수많은 형제와 가족들이 도륙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아온 그였다.      


“나는 그대 외에 비는 들이지 않을 것이오.”    

 

갑자기 무진을 안고 걸어가던 지성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불덩어리 하나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타는 듯한 목마름과 갈증이 올라왔다.      


휘는 주섬주섬 자신의 겉옷을 벗었다.

그믐이었지만 달빛은 보름달만큼이나 밝은 밤이었다.


하얀 비단 사이로 그녀의 맨살이 비쳐 보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지성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쓱쓱 먹을 가는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바로 들어보니 제 앞에 필묵이 놓여있었다.      


“지금 하신 그 말씀 그대로 서신으로 남겨주십시오.”     


말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하하! 좋소. 내 비가 원하는 일이니 써 주리다.

    

지성은 무릎을 '탁' 쳤다. 그는 지금 몹시 기분이 좋았다. 최근에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힘이 있고, 유려한 서체였다. 한눈에 봐도 그가 쓴 글임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독특한 필체.


 그가 자신의 손바닥으로 인장을 찍자 반대쪽에 그녀도 손바닥을 펴 제 인장을 찍었다.      


“이제 마음이 놓이오?”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송구합니다.”     

그녀의 만족스러운 미소에 지성의 입가도 아름다운 호를 그렸다.      


“그럼 이제 밤이 늦었으니…….”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휘는 인장이 찍힌 자신의 겉옷을 조심스럽게 접어들었다.

그런데 지성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오늘 밤은 별채에서 함께 있고 싶은데.”     


이렇게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성의 길고 곧은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찬비에게 손이 거칠다 매일 잔소리를 들었던 제 손이 부끄러웠다.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손을 그가 잡아끌었다. 바람의 향기처럼 청아한 풀 내음이 달싹이며 그녀의 코끝에 닿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바람처럼 장소가 나타났다. 그에게 무언가 말을 하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지만, 길진 않을 겁니다.

    

엉거주춤 따라 일어난 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무언가 훔쳐먹다 걸린 사람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찬비를 들일 것이니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주겠소?”     


지성과 장소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전에도 느꼈던 불길함. 그를 잡아야 한다고 느끼던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길에서 빠져나가는 그의 아쉬움을 붙들고 싶었다. 회랑을 나서던 지성이 문득 그녀를 향해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휘는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를 본 지성의 표정이 굳은 것 같기도 했고. 머뭇거리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좀 더 예쁜 웃음을 지어 보일 것을. 그녀는 금방 후회를 했다.      


제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자신도 잘 알지 못하면서.




“아닌 사람을 오라 했다가 가라 했다가 다시 오라니. 무슨 똥개훈련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너무하지 않소?”      


밖에서 한참 장소에게 쓴 잔소리를 늘어놓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소인입니다.”     


안에서 대답이 있건 없건 찬비가 막 문을 열고 들어올 때쯤 휘는 중창을 열어놓고 차를 우리고 있을 때였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통통하고 조밀한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바깥에 장승처럼 서 있는 장소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아닙니다. 마마께서 여기 계신 것이 참말로 다행이지요!”

“다행?”

“지금 왕부가 아주 난리입니다.”

“그래?”

“두 분이 아니 계시니 유모가 아주 제집인 줄 아는 게지요. 세상에 곽유모 그렇게 안 보았는데 사람이 아주 못쓰겠더라고요. 그동안 가련한 척 혼자 다 떨더니만 사람이 아주 이상해졌습니다.”

     

휘는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들 한낮 여관에 불과한 그녀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지금 아주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무슨 소문?”     


장안의 소문이야 늘 바뀌는 것.     

 

“전하의 직위를 박탈하고 영주자사로 보낸다는….”     


‘영주로 갈까 하는데 같이 가겠소?’


‘나는 그대 말고 다른 여인은 들이지 않을 작정이요’      


그가 스스로 왕의 직위에서 내려오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자인 이융기가 그것을 허락할까? 태평공주는 과연 그대로 둘까?      


“태자께서 직접 직위를 박탈하셨다고 합니다.”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마마!”     


찬비의 목소리가 조용하고 은밀하게 변했다.  

    

“홍비가 보이질 않습니다!”

“홍비가?”

“예!”

“유모가 보낸 것은 아닐까?”

“저 그것이….”     


찬비는 더욱 소리를 죽였다.      


“곽 유모가 저를 직접 찾아왔더랍니다. 홍비를 보지 못 했느냐고!”     


그녀가 스스로 왕부를 떠난 것이었다.      


“차라리 잘 되었지요. 다만!”

“다만?”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홍비가 죽는다고? 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절대 죽지 않는다. ‘죽여주시옵소서’를 외치는 부류의 사람들은 절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


오히려 살려달라 애걸하는 사람들일수록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태평공주. 그녀가 만약 개입되었다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터.


휘는 머리를 털었다.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늘 좋지 않은 의심은 빗겨 나간 적이 없었다.      


홀로 별채를 나와 호수와 연결된 회랑을 걷고 있을 때였다. 누각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고 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누각으로 다가갈수록 이상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성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낭군이 아니라 서운하셨나 보오!”     


태자 이융기를 보자 휘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딱 멈췄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 공수했다.      


“여기가 궁도 아니고 그대까지 그렇게 깍듯한 예로 싫은 티를 낼 필요 없소.

“매우 바쁘실 터인데 이곳은 어쩐 일이십니까?”

“그야 도망 나왔다지!”     


술이 거나하게 들어간 얼굴이었다. 그는 장난스럽게 꺽꺽대며 웃었다.      


“나는 말이오. 세상에서 딱 한 사람이 제일 무섭다오!”     


태평공주!     


“태자께서도 무서운 분이 계셨습니까?”

“나는 고모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소.”     


휘는 무감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무서울 테지요, 무서운 분이시니.’     


“보명. 보전할 보에 목숨 명이라니. 괵왕비께서도 참으로 어지간히 딱하게 살아왔나 보오! 크하하하!”     


느닷없이 이융기가 흐르는 강을 보며 그녀의 아명을 풀었다.


어미인 송화부인이 지은 또 하나의 이름이었다.

제 딸에게 독을 먹이면서까지 지켜낸 목숨.      

숨이 넘어가게 꺽꺽거리며 웃고 있는 태자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웃어넘기는 눈매로 이슬처럼 떨어지고 있는 물방울이 보였다. 눈물이었다. 이융기는 아무렇지 않게 눈을 후비적거렸다.      


"오래 사시오! 공주."


그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태자 저하께서도 무사히 보위를 이으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월피를 벗어나려 했다.      


“황족의 마지막을 본 소감이 어떠하시오?”     


이융기의 물음에 그녀는 뒷덜미를 잡힌 기분이 들었다. 황족의 죽음. 갑자기 초왕 이중복의 초라하고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죽음이 곧 내가 될 수도 있고, 지성이 될 수도 있다오.”     


그녀가 돌아섰다.

작가의 이전글 #24 거푸집을 만든 노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