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가는 물고기 Oct 31. 2020

#26 빈전의 노인

- 향로의 비밀

천하에 두려움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사내. 그가 지금의 태자 이융기였다. 

형들과 아비인 예종도 그에게 함부로 하지 않았다. 장자인 송왕은 스스로 태자 자리를 물리고 동생에게 양보했다. 당륭정변의 성공이 가져다준 권력. 그 정점에 그가 있었다.      


“나는 세상에서 죽는 것이 제일 두렵소. 그런데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생겼소!”     


죽는 것보다 두려운 것.      


“내가 죽은 뒤, 내 자식들이. 나의 혈육들이 무참하게 도륙되는 것 말이오!”     


이융기의 단정한 이마가 구겨지듯 주름졌다.      


“내가 평생 살수만 있다면 말이오! 혹! 그 신물이라는 것을 손에 넣으면 오래 살 수 있소?”     


휘는 그가 이토록 삶에 집착적인 인물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의 삶이 위태로웠기에. 대담하고 용감한 인재라고 생각했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냥 죽는 것이 나는 제일 두렵소!”

“태자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죽일 것이오!”     


이융기의 안광이 섬뜩하게 번들거렸다.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아! 그렇지! 내가 여기에 직접 온 이유를 말하지 못했구려.”

“괵왕 이지성은 오늘부로 직위를 파하고 영주 자사로 좌천됐소!”

“왜!”     


휘는 말을 머뭇거렸다. 왜 무엇 때문에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건지.     


“그분께서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하셨습니까?”

“태평공주와 내통한 죄!”

“내통이라니요!”     


휘는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꼭 쥐고 소리를 질렀다.     


“그간 곽무진. 지성의 유모로 있는 여자가 왕부에 대한 정보를 태평궁에 흘렸소.”     


어째서 그 여인의 죄가 지성의 죄가 되는지.      


“죄명은 왕부에 불을 지른 죄!”     


무현각! 왕부에 들어와 처음 빠진 함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살의가 느껴진다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왕야께서 자사로 좌천이 되셨는지요!”     


그녀의 음성이 제법 날카로웠다. 

이융기는 얼굴을 들어 휘의 검은 눈을 쏘아보았다.      


“좌천? 흥! 그렇지 좌천! 그런데 난 말이오. 본인이 원해서 된 것은 좌천이라고 보지 않소!”

‘영주에 좀 다녀올까 하오!’     


설마하니 영주를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자사로 가겠다는 뜻이었던가?     


“그가 옆에 없어 곤란한 것은 나요. 하지만 어쩔 수 없소! 그의 말이면 들어주어야지 나는!”

“그리고 그대에게도 소식을 하나 알려주리다.”

“무엇을 말입니까?”

“건안성에서 그대를 보내 달라 청을 해왔소! 말이 청이지 그렇지 않으면 쳐들어올 기세라.”

“농이 지나치십니다.” 

“아무튼, 지성은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황명을 어겼으니 잠시 대리사에 있어야 할 거요. 어쩔 것인가?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던가, 아니면….”

“지금 건안성으로 가지요!”     


이융기는 빙긋 웃었다. 지성이 말했듯 휘는 명료한 여자였다. 선택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다. 언젠가. 선택 앞에서 주저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뚝 솟구쳤다.      

이미 그는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건안성이라는 말 한마디에 간단하게 움직여지는 여자였다. 

왕비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지성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그나저나 걱정이군. 내가 건안성으로 보낸 걸 알면 이번에는 진짜 칼을 들고 나타나겠는데?”


괵왕은 상황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거나 나설 때를 아는 사람이다. 이융기는 이번 기회에 그를 꼭 옆에 둘 작정이었다.     


 금군과 우림군의 총관이 되라는 황명을 어기고 스스로 영주로 가겠다 고집을 부렸다.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닌 황제마저 대로하여 그를 대리사에 가두라는 황명이 떨어졌다. 

감옥을 밥 먹듯 드나드는 인간이니 큰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당은 영토확장을 하면서 변방으로 많은 유민을 대거 이동시켰다. 요동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서쪽에는 돌궐을 동쪽에는 말갈. 남쪽으로는 거란과 해족을 중심으로 기미주를 만들어 다스렸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공격하면서 당의 군사 조직은 서서히 무너져갔다. 

당의 군사제도인 부병제. 말 그대로 각 부에서 병사를 모으는데 그 근간은 균전제였다. 각 인구수대로 토지를 나누어주고 조세와 군역의 의무를 지는 제도. 여기서 좀 특이한 점은 각각의 부병은 무기를 스스로 준비해서 전쟁에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리한 영토확장과 그로 인한 인구 증가로 균전제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자연히 부병은 부패했다. 거기다 총괄 책임자를 중앙에서 내보내니 현지 상황을 모르는 지휘관 아래서 당나라 부대는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타서 돌궐이 스스로 독립을 했고, 고구려는 유민들을 모아 진이라는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은 각종 정변과 조정의 혼란으로 이들을 제재할 힘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변방의 혼란과 조정 내의 태평공주의 세력이 들끓는 상황. 

예종은 불안했다. 비록 자신이 황위에 올랐으나, 그의 입지는 부족했다. 8명의 재상 중 요원지와 장렬, 송경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은 모두 태평공주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태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유민들을 중심으로 말갈과 백제 유민들까지 흡수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었다.      

이럴 때 부여씨의 공주가 나서준다면 백제 유민들까지 휩쓸리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태자 이융기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성의 생각은 달랐다. 절대 그녀를 보내선 안 된다 끝까지 반대했다.      




“왔느냐!”


시름을 잔뜩 끌어안은 사람처럼 부여경은 구부정하고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흥! 알 것 없다!”     


따듯한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일까?     


“차를 마시겠느냐?”


부여경의 말에 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채 바르르 떨었다. 


“아직도 제가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부여경이 허리를 펴면서 싸늘하게 웃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너는 왜 아직도 내 앞에 살아 있는 것이냐!”

“숙부님!”

“네 어미가 도대체 너에게 무엇을 먹였길래 듣질 않더란 말이냐!”     


휘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아직도 제가 고작 그런 것으로 죽을 수 있는 어린아이로 보시는지요?”

“감히!”     


부여경의 입술이 금방 새파래지면서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네가! 감히! 하늘 연못에 갔더란 말이지?”

“낙양에 계시는 분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왜 그들을 버려두었는가? 그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제가 죽으면 대방군께서는 조금 편해지시겠습니까?”     


부여경은 대답 대신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그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나가라는 말을 대신할 뿐이었다. 휘가 나가자, 그는 격렬하게 기침을 하고는 기어이 피를 토했다.  

    

“결국, 나도 다 왔는가.”     


왜 제가 중독될 거라는 생각은 못 했던 것일까?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어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그는 이제야 절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송화부인.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휘의 얼굴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가슴을 베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다 자란 그녀가 제 어미와 똑같은 얼굴로 곧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바로 너라고.      


“이곳은 왜 오셨습니까?”     


제 앞에 선 휘를 보고 무천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제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입니까?”

“낙양에 계셔야 할 분이 여기 계시니 하는 말입니다.”     


휘는 못내 서운했다. 자그마치 3년 만에 돌아왔는데 반겨주지는 못할망정.      


“볼일이 끝나셨으면 어서 낙양으로 돌아가십시오. 안주인께서 왕부를 버리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고금에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태자께서 보내셨지요.”     


무명천으로 연신 칼을 닦던 무천의 손이 멈췄다.      


‘누가 보냈다고?’

그의 눈빛이 일그러지는 것을 휘는 놓치지 않았다.      


“엄연히 왕부에 계셔야 할 분입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 줄 아십니까?”

“아무것도 모르셔야 합니다!”

“영노를 만나고 싶습니다.”     


영노가 보이지 않았다. 그를 만나 하늘 연못과 향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영노는…….”     


무천이 말을 머뭇거렸다.      


“어디 계십니까?”

“꼭 만나셔야겠습니까?”     


무천의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녀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금전산 빈전에 있습니다.”     


빈전이라는 말에 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무천이 따라서 일어났다.      


“함께 가겠습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휘는 무천의 말을 단칼에 자르고 자리를 벗어났다. 

빈전. 죽어가는 성안의 궁인들이 머무는 곳. 그곳에서 돌아가신 조상들의 제를 지내고 그들의 마지막 생을 끝내는 곳이다. 영노가 그곳에 있다면.     


금전산을 오르는 길은 힘들지 않았다. 이곳 나무하나 풀 한 포기마저도 익숙한 곳. 그러나 빈전에 다가갈수록 그녀의 눈앞이 흐려졌다. 


활짝 문이 열린 곳에는 헝클어지고 흐트러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백발이 성성해도 항상 단장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눈빛만은 성성이 살아 있었다.    

  

나이 든 노인의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백제의 마지막 대장장이. 

그는 태학에서 유일하게 교육을 받은 박사였다. 그의 손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무너진 왕을 따라 당으로 흘러들어온 백제의 마지막 숨결.      


그는 꼭 죽은 송장처럼 변해 있었다.  

   

“영노께서 왜 여기 계십니까?”     


영노는 휘를 보자 검게 변한 손을 들었다. 휘는 항상 그래왔듯이 그의 뼈만 남은 검은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왕부인마마!”     


그가 부른 것은 송화부인 이었다.      


“모든 노력을 했음에도 그 물건이 세상에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 향로는, 향로는….”     


흐릿하고 탁해진 눈을 들어 연신 사죄했다. 알아볼 수 없는 얼굴에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르신! 접니다. 휘!”     


휘는 연신 고개를 내리는 영노의 몸을 바로 했다. 

노인의 몸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가벼웠다. 

그러자 영노가 얼굴을 바로 들어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공주님! 공주님!”     


다급하게 공주를 부여잡았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공주께서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향로에서, 향로에서 연기가 납니다!”

“연기가 나는 것이 어찌해서요!”     


향로에서 연기가 나는 것이 뭐 그리 큰일이기에 휘는 되물었다. 

북에서 현무가 일어나니, 큰 기러기를 바랄 것이다.      


금동대향로, 제단에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백제의 대향로.  향로는 개로왕의 향로가 신물이 된 이유는 딱 하나였다. 한 많은 개로왕의 피가 섞인 향로였기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자식들이 모두 죽자, 개로왕은 향로를 만들어 제를 지내 죽은 이들의 넋을 달래려 했다. 


이후부터 향로는 스스로 향을 피워내기 시작했고, 향로가 스스로 향을 피워 연기가 오르면 어김없이 큰 재앙이 닥쳤다.  개로왕은 이후 고구려군에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하는 순간에도 향로는 스스로 향을 피워냈다. 그렇게 향로는 저주의 신물이 되었다. 그는 당으로 건너오면서 자신이 만든 향로를 사비성 후미진 곳에 깊숙이 묻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게! 누구도 가져갈 수 없도록.      


향이 피어오르면 혈족의 피를 이어받은 이는 반드시 죽었다.      


"다시 향이 피어오르면 공주께서 변을 당하십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신물이니 혈족이니. 그런 것은 이미 그녀에게는 무용한 것들.      


"영노께서 많이 상하셨습니다. 어서 의원을…."

"다 소인 때문이지요! 그것을 사비에 두고 올 것이 아니라 저를 묻었어야 했습니다."

   

다시는 그 물건을 만들지 못하도록. 자신도 사비성에서 죽었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만든 것은 그냥 대향로. 신물을 본떠 만든 가짜였다.     


본래 신물을 만들 때는 혈족의 피를 이은 자의 머리카락이나 옷을 태운 것을 섞었다.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었으며 하늘의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백제의 오랜 풍습이었다. 

사람 대신 바치는 제물.     

 

자신은 아무것도 넣지 않았는데 향로에서 연기가 피어났다. 

사타무의가 그가 만든 거푸집에 휘가 당긴 활을 태워 넣은 것은 그 후에 알게 된 일이었다.      


“소신의 소원은 하나였습니다. 공주님이 무사히 크는 것을 보면 동료들이 기다리는 하늘 연못으로 갈 수 있다는….”     


그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어찌합니까. 죽어서 어라하와 군부인을 어찌 본단 말입니까. 저는 이제 그곳에 갈 수 없습니다!”

“어르신!”     


귀신처럼 변한 노인은 시시각각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 슬퍼했다가 미친 사람처럼 울었다가 마치 금방이라도 큰일이 벌어질 것처럼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큰 화를 당하실 것입니다!”     


함정은 뒤로 갈수록 치밀하고 위험한 것. 


“신탁이 그리 내려진 것이라면 피한다고 피해지겠습니까?”

“그분은요! 하얀 공자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영노는 지성을 하얀 공자라고 불렀다. 


“제가 그리 부탁드렸건만. 절대로 공주마마를 이곳으로 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그녀의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건안성의 공기 흐름이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어날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작가의 이전글 #25 달빛아래 맺은 서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