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등짝에 페미니스트라고 커다랗게 쓰인 자켓을 입고 있었다. 그는 대학생 때 내가 일하는 단체에서 활동했었다며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빠르게 가까워진 우리는 함께 미투, 위드유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고,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행진에서 깃발을 흔들었다. 그리고 4년 후, 나는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여성단체 상담실에 앉아있다.
나는 지난 4년 동안 나에게 일어난 일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이룬 경제공동체, 그게 문제였을까. 대기업에 다니는 그와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나의 임금 차이는 해가 지날수록 몇 배로 벌어졌다. 그와 동거할 때는 이게 문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혼 직후 그는 나에게 인권단체를 그만두고 영어학원이나 대사관에서 일하라고 거듭 말했다. 내가 응하지 않자 나의 집안일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가정 경제에 기여가 적은 만큼 집안일을 더 하라는 거였다. 그가 집에 돌아오기 15분 전이면 나는 집안의 정돈 상태를 점검했다. 어쩌다 지갑이라도 잃어버린 날엔 집에 가기가 무서워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그가 매섭게 화를 낼 게 뻔했다. 집은 거대한 무덤 같았고, 그 무덤 속에서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느 날 집에 고양이 형제가 나타났다. 종종거리며 엄마 고양이를 따라다니는 아기고양이 형제. 그와 나는 계단 한 켠에 보호소를 놓고 밥을 주며 고양이들을 돌봤다. 무서움을 많이 타서 경계심이 심한 고양이는 ‘무섬이’, 호기심이 많고 활발한 고양이는 내가 좋아하는 애니 주인공의 이름을 따 ‘소피’라고 이름 지어주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조금씩 기대가 실렸다. ‘오늘은 고양이들이 밥을 잘 먹었을까? 집에 가면 고양이들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그렇게 고양이들과 인연을 맺은 지 3개월, 현관문을 열어놓은 사이에 고양이들이 집안에 들어왔다. 한파 경보가 내려졌던 겨울날이었다. 그와 나는 고양이들의 간택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양이는 마치 위태로운 우리의 결혼생활을 간신히 이어 붙이는 테이프 같았다. 그와 다른 얘기는 딱히 하고 싶지 않았는데 고양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었다. 그와 대화하기를 멈추고, 섹스를 멈추고, 그저 고양이만 바라보았다. 나에게 집은 고양이가 편히 머무는 곳이면 되었고, 고양이 얘기라면 그와도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고양이를 건강하고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면” 그의 경제력이 필요했다. 나는 최저임금을 받는 활동가고, 그는 대기업 회사원이었으니까.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니가 최저임금 받으면서 자아실현할 때 나는 노예처럼 일해. 왜 날 돈 벌어오는 기계 취급해?” 그의 비난을 온몸으로 부정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고양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솟아올랐다.
그는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졌다. 화를 내며 고양이 케이지를 이층 창밖으로 던져 부숴버렸고, 내 스웨터를 고양이 화장실에 처박아버렸다. 줄곧 욕을 퍼붓더니 고양이에게도 욕을 하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알아듣지 못하니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양이 장난감을 손수 만들었다. 부품들을 사서 끈으로 이어 붙이고 방울을 달아 장난감을 만들었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행복해했다. 그는 나를, 고양이를, 사랑하는 걸까? 헷갈렸다. 어릴 때 학대를 받았다는 그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 걸 거라며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이혼을 결정하고 나서 나를 가장 압도했던 두려움은 고양이와 헤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고양이와 헤어져서 살 수 없었다. 이미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싸움을 반복하며 서로 “고양이는 내가 데려갈거야”라고 날을 세우곤 했었다. 각방을 쓰며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상황이 고통스러웠고, 싸늘한 얼굴로 그와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그럼에도 퇴근 시간만 되면 꼬박 집으로 향했다. 고양이를 돌보는 주도권을 그에게 넘겨주기 싫었다. 마침 고양이의 정기검진이 다가와서 혼자 낑낑거리며 고양이들을 병원에 데려갔다. 통장에는 비상금 100만원이 있었고 75만원을 고양이 검진으로 써버렸다.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제 고양이는 내 책임이니까.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고양이 양육권을 순순히 넘겨줬다. 내가 고양이들을 더 잘 돌보고 근무시간도 유연하니 내가 키우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고양이를 데려가는 대신 재산이나 가전가구를 나눌 때 자기 몫을 더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속으로는 그럼 니가 고양이 양육비 줄거냐는 말이 튀어나왔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고양이를 내가 데려가는 게 더 중요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안심하고 고양이 두 명과 함께 집을 나왔다. 원룸에 사는 친구가 고맙게도 나와 고양이 두 명을 받아주었다. 고양이 캣타워를 해체하고 택시 기사님의 눈총을 받으며 택시에 싣고 다시 친구네 집에 조립했다. 고양이 화장실이며 밥이며 장난감이며 고양이 짐만 한 짐이었다.
나에게는 패딩 하나, 니트 두 장, 청바지, 그리고 신고 나온 어그부츠가 있었다. 같은 옷으로 3개월을 버티며 출근을 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친구 결혼식에도 갔다. 이따금씩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고양이와 내가 지낼 수 있는 거처를 찾아야 했다. 아빠가 빌려준 보증금 천만원으로 고양이와 함께 살만한 집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큰 창문이 있어야 하고 너무 좁지 않아야 했다. 최저임금에서 월세 오십을 빼면 얼마가 남는지도 생각을 못했다. 집이 제일 급했으니까. 그가 우리를 찾을 수 없는 낯선 동네의 부동산을 샅샅이 뒤졌다. 고양이들이 창밖을 내다보며 나른한 오후를 보낼 수 있고, 캣타워와 화장실을 놓아도 내 침대 놓을 공간이 남는 그런 집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늦은 봄, 이사를 했다. 다행히 고양이들은 새로운 집에도 잘 적응해주었다. 내가 침대에 누우면 고양이들은 폴짝 뛰어올라와 내 다리 한짝씩을 껴안고 잠을 자고, 내가 늦잠을 자면 밥을 내놓으라고 내 앞머리를 쥐어 뜯는다. 고양이들과 침대에서 부비작 거리는 아침이 감사했다. 내 집 어디서도 욕이 들리지 않고 물건이 날아들어올 불안도 없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이게 너무 낯설어서 어색해하면서도, 내가 쟁취한 평화가 자랑스러웠다.
후우-. 한숨을 돌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계산기를 두드린다. 월급 174만원에서 월세 50, 관리비와 공과금 20을 빼면 104만원이 남는다. 거기에서 고양이 몫의 적금 20만원과 양육비 30만원을 빼고 남는 돈은 54만원. 필수 생활비와 내 병원비를 고려하면 매달 마이너스였다. 결혼 전이었다면 나름 버틸 만한 임금인데, 고양이가 온전히 나의 책임이 된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고양이와 나의 안전한 삶을 위해서는 고정으로 지불해야 할 비용이 있다. 지금 임금으로 얼마를 더 버틸 수 있을지 계산을 이어 나간다. 3개월이 채 안 되겠구나.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정장을 꺼내 입고 면접을 다닌다. 결혼여부를 묻는 무례한 질문에 웃으며 애매한 대답을 해내면서, 크고 사람 많은 국제단체의 관료제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준비를 한다. 내가 사랑하는 동료들, 잘해내고 싶었던 일들을 떠날 준비를 한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단체를 떠난다는 소식을 그가 들으면 고소해할까? 역시 자기를 희생양 삼았던 게 맞았다고 의기양양해할까? 그 따위 생각들을 하니 다시 도랑에 빠져버린 것 같다.
그가 나에게 욕을 하며 비난을 쏟아냈을 때, 그는 내 최저임금 노동을 볼모로 삼았다. 그의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으면 생활비를 더 내라고 협박했다. 그가 손에 쥔 권력은 너무도 많아서 나는 힘으로도, 욕으로도, 돈으로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관계를 끝내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비로소 나는 안전지대에 와있다. 욕과 물건이 날아들지 않는 고양이와 나의 안전지대. 나는 과연 이걸 안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가 휘두르던 폭력에서 벗어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소중하게 여겼던 꿈을 내려놓는다.
내가 사는 세상은 그의 손에 너무도 많은 권력과 그걸 부릴 수 있는 정당성을 가져다주었다. 기울어진 사회에서의 결혼생활은 역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결혼탈출을 감행한 이후에도 나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안전지대를 유지하는 데에는 비용이 들기 때문에. 나는 정말이지 그 비용이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