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lon de Madame Saw Jul 15. 2020

나의 반지하 인생

영화 기생충을 보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고 만큼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드는 사람도 드물 거라 생각한다. 영화를  사람이 어떤 계층이냐에 따라, 어느 쪽에 감정이입을 하느냐에 따라 느끼는  하늘과  차이일 거라 생각하는데 나는   해당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들에게 의존하면  적도, 아닌 적도 있다.
가족들과 함께 서래 마을의 아파트나 고급빌라 여러 곳에서 살았으나 아카데미 졸업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음악으로 혼자 먹고살겠다고 나댈  반지하 원룸 이곳저곳에서도,  번은 그야말로 창문도 없고 석고보드로 칸을 나눈 일반 가정집 화장실 넓이의 공동 지하 작업실에서 살았다. 호주에 있을  7인실 워킹 호스텔, 셰어하우스, 심지어는 침대 옆에 바로 변기가 있는 카라반이나 와이파이는커녕 비가 오면 물이 줄줄 새는 텐트에서도 살아봤다.

직업은  어떠한가. 나는  가지 일을 꾸준히 하지 않았고(버티지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할듯싶다.) 여러 가지 일을 이것저것 많이 했다. 재수할  원서를 넣었던 대학  군데에 모두 낙방한  어머님께서 노하시고 앞으로 경제적인 지원을 끊겠다고 하신 적이 있었기에 (물론 결과적으로 다시 지원받았지만.) 나는 비싼 성악 레슨비를 벌기 위해 아무런 경력이 없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큰돈을   있는 일을 구해야 했다. 그때 알게  것이 바텐더 일이고 지금 생각하면 최저임금도  되는 쥐꼬리만  월급이지만 스스로 경제활동을  번도  해본 내가 보기에 130 원은 아주 큰돈이었기에 따져보지도 않고 시작을 했다. 이것이 내가 하층민(?) 삶을 살기 시작한 , 그러면서 사회의 온갖 더러움, 위험함을 알게 되는 시작점이었다. 그것이 일종의 계층 추락이라는  깨닫게   불과 얼마 전이었지만.

처음에는 클럽 바텐더로 시작을 했다. 젊은 사람들 위주로 오는 작은 힙합클럽에서 칵테일을 만들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춤을 추거나 쇼를 하는, 영화 코요테 어글리에서의 코요테들과 같은 일을 했고 그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스스로도 내가 엄청 멋진 사람으로 느껴졌고 원래 바텐더는 그런 직업인 줄 알았기에 아예 이쪽으로 쭉 나갈까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때까진 그런 바가 한국에 거의 없다는 걸, 한국의 바 문화라는 게 얼마나 저질인지 몰랐기에. 그러나 가게는 YG의 거대 자본(?)에 힘입어 오픈한 강남 엔비와 할렘의 영향으로 문을 닫아버렸고 나는 나름 전공을 살려(살리겠답시고) 역삼의 한 모던 바에 라이브 가수로 취직을 하게 된다. 말이 라이브 가수지 지금 생각하면 노래방 도우미나 다를 게 없었던 것 같다. 연주자들 외에도 접대하는 호스티스가 따로 있었으나 가끔 연주자들도 손님 테이블에 착석을 시켰다. 일단 연주자들을 여성들만 채용한다는 것부터 이상하단 걸 깨달았어야 하는데 그땐 너무 순진해서 심지어 그게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바에서 몇 개월 일을 해보니 나름 경력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에 바텐더 일만 계속했는데 몇 년간 아주 별 더러운 꼴을 다 봤다. 한국에서 바텐더라는 직업은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했고 시선도 곱지 않았다. 그땐 몰랐지만 한국 사회에서 나는 그 당시 그야말로 밑바닥 계층인 ‘술집 여자’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힙합클럽 춤 알바, 피시방 알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나 초밥 전문점 웨이트리스로도 일했었다.

어느 순간 스스로 느끼기에 나를 ‘기생’의 신분으로 만든 지긋지긋한 노래를 그만두고 아카데미 작편곡과를 졸업한 전공을 살린 직업을 갖기로 마음먹은 후부터 내 신분은 또다시 전환된다. 자칫하면 딴따라로 불리는 연주자와(그것도 노래) 창작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완전히 달랐다. 그것도 대중음악이 아닌 영화음악이나 게임 음악 감독이라니 먹고사니즘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그야말로 순수 예술가로 보였나 보다. 그리고 음향이 아닌 음악 전공자였지만 나름 DAW(Digital audio workstation) 소프트웨어 자격증 교육기관에서 교육 이수를 하고 자격증을 취득한 경력이 있어 간단하게나마 사운드 관련 일을 병행했기에 나름 아티스트이자 엔지니어였던 샘이다. 우연히 대기업 사운트팀에서 캐스팅 제의를 받고 시작하게 된 목소리 연기가 적성에 맞아 프리랜서 성우로도 일을 했었다. 이때 클라이언트들은 나를 정 감독님 또는 정 선생님이라 불렀다.
호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땐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맘 편히 공부만 하는 학생 신분이었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다시 돌아갔을 땐 클리너, 페인터, 팜 핸드라는 워킹 클래스 신분으로 바뀌었다. 귀국 후엔 호주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물류센터 일용직 육체노동자로 반년 동안 일을 했다.

이렇게 나는 부모님에게 의존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삶이 천지차이로 갈렸다. 의존을 할 때의 나는 명문대를 졸업한 운동권 출신 부모님(한마디로 사회가 말하는 좀 배운 사람들)과 런던 왕립학교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해 대기업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언니, 이름만 들으면 알만큼 사회적 인지도가 높은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삼촌, 세계적인 작곡가인 이모를 둔, 강남 부촌에 거주 중이면서 무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작가 집안, 음악가 집안 딸 같은 신분이 된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가족에게 의존을 한다 함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닌 가족들이 속한 ’계층’에 기생함을 의미한다.
아가씨에서 감독님으로, 일용직 육체 도농자에서 선생님으로, 고졸 백수에서 고학력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딸로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듯 사회적 계급이 수직이동을 한다는 뜻이다.

덕분에 나는 영화를 보면서 그 두 계층에게서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꼈다. 극 중 기우(배우 최우식)가 연교(배우 조여정)의 가족이 집 정원에서 파티를 하는 장면을 바라보던 장면을 떠올려 본다. 나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다.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사회 지도층을 초대해 파티를 열고 그들 앞에서 노래를 하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우가 그렇게 부자들의 삶을, 문화를 직접 눈앞에서 경험했을 때의 그 이질감 또한 나는 같은 강남 8 학군의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들, 내가 다니던 대학교를 졸업한 클래식 전공자들, 심지어는 가족들을 보면서도 가끔 느낀다. 빗물이 줄줄 새는 반지하 화장실에서 기정(배우 박소담)이 묵묵히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도 익숙함을 넘어 그 삶이 내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으나 우습게도 반지하 냄새에 대해 묘사하는 장면 역시 공감이 간다. 나는 그 냄새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가끔 특정 사람들에게서 느낀, 우리 집에서는 나지 않던 냄새이기 때문이다. 주거형태보단 삶의 방식이 다른, 내가 보기에 쾌적한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 보이며 그런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가정에서 반찬이나 목욕용품을 산더미처럼 집안 이곳저곳에 쌓아놓고 살 때 나는 문화적 가난의 냄새다.

나는 자격지심에 찌든 저소득층 사회적 약자들에게 수평 폭력을 당할 때 내가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클래식 전공자이자 음악감독으로 일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 나를 고생이라고는 안 해본 철부지 부잣집 딸내미로 오해하고 꼰대질을 하는 경우엔 너보다 더 혹독한 환경에서 힘든 육체노동도 해본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가끔은 내 부모님 계층만 보고 선을 긋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방법을 쓰기도 한다. 어찌 보면 비겁한, 참으로 박쥐 같은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렇게 그야말로 반지하에 사는 사람이다. 지상도, 그렇다고 완전한 지하도 아닌 반지하 말이다.
지금 나는 본가에서 가까운 서래 마을의 한 신축 빌라에서 지상의 안전함을 만끽하며 살고 있지만 창문도 없는 완전한 지하 작업실에서 살 때 역시 우습게도 그곳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극 중 근세(배우 박명훈)가 근태(배우 송강호)에게 여기서 계속 살게 해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땐 가난하지만 꿈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꿋꿋이 살아가는 음악가라는 신분 뒤에 숨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반지하에서 살 땐 오히려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내가 창밖에 펼쳐진 세상을 볼 수 있고 그들도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포스팅한 글에서처럼 내가 헐벗은 채로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사진이 창피하다던 친언니의 태도에 대해 내가 모욕감을 느꼈던 이유는 그녀가 나에게서 풍기는 그런 하층민의 냄새, 즉 반지하 냄새를 느꼈다는 걸 스스로 알았기 때문이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반지하에 계속 살면서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에 의한 수치심을 계속 느끼며 살 것 같다. 그리고 가끔은 극 중 다송이가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 복장을 하고 놀았듯, 동익(배우 이선균)이 싸구려 속옷에 대해 언급하며 아내 연교에게 “당신이 지금 그거 입고 있다면 졸라 흥분될 것 같은데....” 하며 아쉬워하듯, 밑바닥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만큼의 자극적인 요소들이 이 영화엔 없다며 아쉬워하며 마치 지상의 사람들이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를 즐기듯 그 삶을 체험해보거나 흥미롭게 내려다보며 관찰할 것이다. 그렇게 그래도 내가 자리한 이곳이 완전한 지하는 아니라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2019.06.09


정소연(무직)


#봉준호 #기생충 #영화기생충 #반지하

작가의 이전글 향유하는 자들과 그것을 지키는 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