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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on de Madame Saw Aug 04. 2020

그 많은 소설은 누가 다 빻았을까?

나의 소설 기피증의 원인을 찾아서.


나는 원래 책을 잘 안 읽지만 그중에서도 소설을 잘 못 읽는데 안 읽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못 읽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이유는 소설이란 것을 읽을 때마다 집중을 못 하고 딴생각에 너무 쉽게 빠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 동네 어느 골목길에 붙여진 전단지...’ 같은 문장을 읽으면 우리 집 앞 골목길을 떠올리고 그에 연관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행돼 의식적으로 마음을 다잡고 책 속 문장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물론 소설을 아예 안 읽진 않았다. 몇 권 안되긴 하지만 그래도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읽었을 법한 필수(?) 고전문학이라던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법한 현대 문학 정도는 읽었었는데 거의 의무감 비슷한 것 때문에 읽었던 지라 고역이 따로 없었다. 덕분에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책 더미를 볼 때마다 나름의 열등감과 죄책감 비슷한 것이 들곤 했다. 고급진 이탈리안 씬 피자보다 모짜렐라 치즈로 떡칠을 한 상놈스러운 미국식 피자가 맛있게 느껴지는 것이 어디 감히 오리지날 피자의 잘못이겠는가. 세상 모든 이가 찬사를 아끼지 않는 고오급진 명작에 흥미를 못 느낀다니 이건 아무래도 무조건 나의 문제가 아닌가. 비틀즈의 음악에 조금의 매력도 느끼지 못했을 때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상했다시피 결국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앞서 말한 어릴 때 읽었던, 그래도 나름 조금은 재미있다고 느껴졌던 소설들도 줄거리 자체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웬만한 인간이라면 공감할 법한 요소이기 때문인지 등장인물들의 러브라인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펄벅의 대지나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나에게는 슬프거나 설레는 연애소설이었다는 의미에서 기억에 조금 남을 뿐이다.

읽으면서 특히 고통스러웠던 소설은 바로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였다. 그 당시 나름 고대 이집트 매니아였다는 이유 때문에 읽어야만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파란 하마 조각이나 황금빛 스캐럽 보다 더 가치 있어야만 했던 고대 이집트의 역사라던가 문명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아닌, 고작 환상이나 신비스러움 같은 것에만 열광하는 나 자신이 마치 미군부대 피자에 열광하는 자극적인 입맛을 가진 것만 같아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기준에서 꽤 두꺼웠던 책이었는데 다 읽고 난 후 (읽어냈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거다.) 스토리가 어정쩡하게 끝나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면서 이내 그것이 고작 1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해방이 아니라 고작 지옥문의 1라운드를 넘었을 뿐임에 절망할 정도였다. 물론 역시 파라오가 되기 전인 젊은 람세스 왕자와 이제트의 러브신 외에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람세스를 매우 재미나게 읽던 같은 반 남자아이가 나에게 혹시 2권을 가지고 있으면 빌려달라고 물었을 때 속으로 그딴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역시 이 정도 교양 수준은 되어야 대단한 고대 이집트 문명에 관심을 가질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다.

며칠 전 어머님과 술을 한잔 하면서 나는 왜 책을 읽지 못할까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설 람세스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작가이신 어머님으로부터 그건 정말 재미가 더럽게 없다는 말을 듣고 그간의 싸구려 입맛이라는 대죄에 대한 면죄부를 얻었다. 내가 그동안 소설을 읽으면서 집중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앞서 말한 내 집중 못하는 병(?)이나 입맛의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왕 면죄부를 얻은 김에 내가 소설을 못 읽는 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인지 유무죄를 좀 더 면밀히 따져보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고전문학이 초, 중학생이 읽기에 과연 알맞은가부터 따져보자. 대체 아편전쟁에 사회가 몰락하고 대지를 일구고 기아에 허덕이거나 귀족 가문끼리의 전쟁 따위가 3차 산업혁명을 넘어 4차를 바라보는 그 당시 현대의 중2병 세대로 하여금 공감이 1이나 가냔 말이다. 근대 마저 그 비슷한 것도 인생에서 맞닥뜨릴 가능성 자체가 없는 먼 옛날의 것으로 느껴지는데 하물며 고대라니.

현대문학 얘기를 해 보자. 이것은 어느 정도 내가 훗날 실제로 맞닥뜨릴 가능성이 있던 스토리였기에 시대의 잘못은 아니었던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읽을 때면 무언가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역시 그것은 분명 나의 잘못이었을 것이므로 문학을 탓하진 못했고 본래 문학이라는 것은 그러한 불편함을 감수하는 선택받은 자들 만이 소화해낼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 이질감이라는 벽 덕분에 나에게 문학은 고렙 신컨들만이 잡을 수 있는 아이스드래곤 같은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정말 자의로 재미 있게 읽은 소설들이 존재하긴 한다. 그중에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박완서는 내가 작품들을 찾아 읽을 정도로 좋아하던 ‘저자’들이었다. 신기하게도 이들의 작품을 읽을 땐 그러한 지루함이나 메스꺼움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아 단숨에 읽어내려갔고 다른 작품들을 찾게 만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발한 상상력 때문에 즐겨 찾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어느 순간 결국 비슷한 클리셰의 반복이라는 느낌을 받아 더 이상 찾지 않게 됐고 내가 아는 한 읽고 싶은, 아니 읽으면서 괴롭지 않을 글을 쓰는 작가는 고 박완서 선생만 남았는데 그 작품들은 어릴 때 읽어도 아주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이번에 박완서의 ‘꿈을 찍는 사진사’를 읽으며 작가가 소설 속에서 묘사하는 여성이 대상화된 그 무언가(누군가가 아니라)가 아니라 한 인간이라는 데에서 그 답을, 문학 고자로서의 합리화의 지점을 찾았다. 제인 에어와 작은아씨들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었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그러니까 내가 수많은 문학작품을 읽으며 구역질을 했던 이유는 바로 어려서 어디서 풍기는 것인지 조차 찾아낼 수 없었던, 예컨대 소녀의 복숭아 같은 젖가슴이나 물고기 냄새가 나는 생리혈로 대표되는 중년 남성의 쉰내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경험이 별로 없는 자가 무슨 판단을 할 수 있겠냐만 그러한 가설을 세우고 나니 소설 공포증을 이겨낼 용기가 조금 생기는 것 같다. 적어도 어디서부터 파 내려가야 할지는 정해진 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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