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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건니생각이고 May 18. 2019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무조건 이해해줄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다 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오늘만큼은’ 정말 어린이집을 가지 않겠다 주장하는 아이와의 실랑이가 바로 그겁니다. 떼의 강도와 종류는 감히 예측 불허하고, 그들이 물러설 가능성은 결단코 없을 테니 원만한 합의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이집(혹은 유치원)을 유난히 가기 싫었던 날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겁니다. 아프지도 않고 딱히 더 자고 싶지도 않지만, 어린이집만은 유독 가기 싫은 그런 날 말입니다. 그때의 마음을 떠올려 보면, 눈앞의 '짜증유발 고집불통'인 내 아이는 어릴 적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어린이집 안 보냈어”
“왜? 어디 아프대?”
“아니, 오늘은 정말 가기 싫대. 나 어릴 때 생각해보니, 정말 가기 싫은데 가야 했던 순간들이 너무 스트레스였거든. 그래서 어린이집 안 보내고 같이 있어.”


 딸내미가 어린이집을 잘 갔는지 묻는 안부에 이어진 아내와의 대화입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야지만 '비로소' 조금의 쉴 틈이 생길 텐데, 온전히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고 또 아이를 위한 결정을 해준 아내였던 겁니다. 저보다 늘 몇 수 앞서는 아내에게 '역지사지'는 육아에 있어서도 예외 없다는 가르침을 받은 저였습니다. 이런 엄마를 둔 딸내미가 부럽기도 하면서 정말 복 받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아이를 위한 결정을 해준 아내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혹여나 버릇이 없어지면 어떡하죠?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고 의견을 존중해 주는 건 분명 긍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저의 경우, 어머니의 무한 이해로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내신 성적에 매우 예민하고 또 얽매이던 때에 중간고사 사회 과목에서 말도 안 되는 점수를 받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점수가 처음이었던 터라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공부는 물론이거니와 정말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혔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그 결과가 알려진다는 사실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었죠. 별별 생각을 다하고 있던 순간, 어머니께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숨길 새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고, 꾸지람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어머니는 그 정도면 충분히 잘했다고, 좌절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전혀 없다며 온전히 제 편에 서서 용기를 주시고 응원을 해주셨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후 공부를 놓지 않고 끈기 있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이자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내 편. 그보다 더 든든한 버팀목은 어디에도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습니다. 위에 언급했던 어린이집 등원을 두고 벌이는 실랑이의 경우, 하루 어린이집 안 간다고 큰일 나진 않지만, 이런 날이 아무런 이유 없이 반복되면 부작용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성장함에 따라 필연적 혹은 선택적으로 유치원, 학교, 회사 등 다양한 조직의 일원이 될 텐데, 이유 없는 '부재'는 불성실 혹은 무책임이라는 오명의 원인이 될 테니 말이죠.


오냐오냐의 폐해 © geralt, 출처 Pixabay


 의견 존중과 '오냐오냐'는 한 끗 차이입니다. 한두 번의 무조건적인 의견 존중은 아이에게 절대적인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겠으나, 그 이상은 신중해야 하겠습니다. 의견 존중이 오냐오냐로 둔갑하는 순간 아이는 의도치 않게 이를 이용하게 됩니다. 아이 입장에선 늘 자기 뜻대로 되는 상황들에 익숙해질 테고, 한 번이라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이해 불가능한 수준의 과하고 격한 행동으로 자기의 불만을 있는 힘껏 표현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공감과 훈육 사이


 의견 존중을 공감이라고 하면, 오냐오냐의 폐해를 막는 건 훈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아빠와 엄마가 같은 입장을 견지해야 함은 물론이고, 아이 입장에서 '오락가락'한다는 느낌을 받게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같은 행동에 대해 언젠 된다고 했다가 언젠 안 된다고 하면 어른들도 혼란스러운데 아이들은 오죽할까요. 또한, 공감할 때에는 아이가 충분히 공감받는다고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훈육할 때에는 '왜' 그러는지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공감과 훈육의 애매한 경계에서 아이가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이를 향한 공감이든 훈육이든, 모든 건 '사랑'을 전제로 해야만이 부모가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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