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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음 Apr 09. 2021

적응하는 걸까, 잃어가는 걸까?

03.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적응하는 걸까, 잃어가는 걸까?


'이래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거구나...' 괜히 회사에서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강조하는 게 아니었다. 개성이 강하면 함께 일하기 불편해진다. 그 불편한 사람이 나였다.




회사 생활 6개월 차쯤, 나는 팀 차원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론칭할지는 모르지만 회사에 새롭게 제안해보자는 서비스였다.


새로운 음악 콘텐츠에 들어갈 카피를 위해 팀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부담 없이 말해달라는 상투적인 표현과 함께 아이데이션 회의가 시작됐다. 나는 그동안 해보면 재밌겠다 싶은 생각들을 과장님에게 말했다.

    "'빠끄' 같은 단어 넣어보는 건 어때요?"
    "빠끄가 뭐야?"
    "요즘 염따라는 아티스트가 유행시킨 말이에요. 'ㅅㅂ꺼'라고 계속 입버릇처럼 얘기하다가 '빠끄'가 언젠가부터 유행이 됐어요."
    "욕이잖아. 안돼."

조금 시간이 지나고 다시 제안했다.

    "그러면 욕은 안 하고 욕 같은 단어는 괜찮나요?"
    "어떤 거?"
    "요새 '가. 족같다'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런 비슷한 단어 넣어도 재밌을 것 같아요!"
    "그러면 xx(필자)가 그 생각으로 따로 한번 만들어봐. 회의에서 나올 내용으로 제작할 콘텐츠와 별도로 xx가 따로 제작한 콘텐츠도 그때 한번 보자."
    "네! 알겠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마감기한까지 밤새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었다.


하지만 기대에 부푼 것과 달리 내 안은 10초도 안돼서 넘겨졌다. 제대로 된 피드백도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갔다. 애초부터 내 생각이 궁금했던 게 아니라, 제외당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회의가 끝나고 허탈한 마음에 커피를 시켜 테라스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어릴 때부터 개성이 중요하다고 배웠는데, 정작 그 개성 때문에 프로젝트에서 나는 제외당했다. '이래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거구나...' 괜히 회사에서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강조하는 게 아니었다. 개성이 강하면 함께 일하기 불편해진다. 그 불편한 사람이 나였다.


어른들이 말했던 인간관계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최소한 중간은 가야지 했던 나의 생각은 해당 사건으로 산산조각 났다. 나는 중간은커녕 가장 위험하다던 ‘튀는’ 사원이었다.




...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사람이 더 싫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Hermann Karl Hesse, 1919/2013).


그때부터였다, 나를 나의 적으로 만든 게.


나는 세상에서 튀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세상이 인정해줬던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세계관을 죽여 나갔다.


함께 회의를 할 때, 사람들의 말을 다 들은 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회의를 방해하는 게 아닌지 생각하며 말했다.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표현도 둥글둥글하게 했다. 그때부터 나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 기록을 많이 했다.


직장에 적응하려 서툴지만 조금씩 계속 노력했다. 과장님은 그런 나의 모습이 기특해 보였던 것 같다. 그즈음부터 과장님은 나에게 팀 회의 정리를 나에게 맡겼다. 작지만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 자기 밖의 모습들을 현실이라 여기고, 자기 안에 있는 본래의 세계가 발언할 수 없게 하니 말이지. ...
                                                                                 (Hermann Karl Hesse, 1919/2013).


'다들 이렇게 현실에 적응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때부터 취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일을 해도, 회식을 해도 취하지 않았다. 뭘 하던 집에 와서 소주를 한병 까고, 외제 맥주 만원 어치를 먹어 치우지 않으면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Hermann Karl Hesse, 1919/2013).


그때 나는 적응한 걸까, 나를 잃어간 걸까?







<참고문헌>

Hermann Karl Hesse. (2013). 데미안. (안인희, 옮김). 경기: (주)문학동네. (원서출판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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