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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음 Apr 06. 2021

아직 청춘 한 발 남았다.

02. 1년은 무시하자

아직 청춘 한 발 남았다.


재취업 vs 책 읽기, 위태로운 줄타기에서 나는 책 읽기를 선택했다. 1년 동안의 책 읽기 목표가 끝나도 29살, '아직 청춘 한 발 남았다'라는 생각이었다.




자퇴를 하고 나서 맥놓고 걸어가던 하굣길이 생각난다. 막상 일을 저질러놓고 나니 이제부터 내 앞에 놓인 길은 어디나 뒷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나는 이제 의사나 법관이나 관료나 학자나 사업가나 존경받을 장래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스스로 잘려나온 것이다.
                                                                                                        (황석영, 2008: 186).

계획한 대로 책을 읽기 시작한 지 한 달째, AOMG에서 채용이 시작됐다는 메일을 받았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마음이 흔들렸다. 음악 일을 했었기 때문에, 퇴사하면서도 막연하게 AOMG, 하이어 뮤직, 하이라이트 레코즈 등 레코즈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28살, 나름 대기업 출신, 관련 업계 경력 1년, 직무 관련 대외활동 유, 재취업하기 딱 좋은 때였다. 취업 시장에서 선호도가 높다는 중고 신입이었다. 하지만 때를 놓치면 더 이상 fresh 하지도 않고, 신입도 경력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가치가 떨어진다. 재취업 vs 책 읽기, 위태로운 줄타기에서 나는 책 읽기를 선택했다. 1년 동안의 책 읽기 목표가 끝나도 29살, '아직 청춘 한 발 남았다'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채용 창이 닫히자 마음이 심란했다.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스스로 내 가치를 깎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전염 속도가 빠르다. 한 문장이었던 생각은 순식간에 여러 문장으로 퍼졌고,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바보 같은 결정을 한 건가 싶었다. 사실 책 읽는다고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삶의 간절함이 없어 보였다.




시키는 대루 하기 싫어할 뿐이지 나두 노력하구 있어.
노력은 무슨······ 아무렇게나 사는 거지.
그게 나쁘냐? 나는 말야, 세월이 좀 지체되지만 확실하게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거다.
학업을 때려치우면 나중에 해먹구 살 일이 뭐가 있겠어?
어쨌든 먹구살 일이 목표겠구나. 헌데 어른이나 애들이나 왜들 그렇게 먹구사는 일을 무서워하는 거야. 나는 궤도에서 이탈한 소행성이야. 흘러가면서 내 길을 만들거야. ...
                                                                                                         (황석영, 2008: 41).

부모님에게 퇴사를 말했을 때, 그 자리에서 온갖 쌍욕을 순식간에 들었다. 퇴사라는 생각이 아예 사라지도록 더 상스럽게 욕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때 알았다. 나는 한 번도 세상 흐름에 거역해본 적이 없었음을. 입사를 말리는 부모는 없다. 하지만 퇴사는 어떤 부모든 말린다. 왜? 그건 세상의 흐름에 역류를 일으키는 일이다.


나는 모범생이었다. 학생으로서 하지 말라는 것은 대부분 안 했고, 해야 한다고 하는 것들은 충실히 이행하려고 노력했다. 공부도 그랬다. 명문대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작은 동네에서 공부를 곧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매번 더 나은 점수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대학교 때도 역시 열심히 공부했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졸업 전 무난하게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음악에 빠져있던 것도 일탈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 학점도 좋았고, 장학금도 받았고, 대외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결국 음악 회사에 취직을 했다. 결론적으로 결이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인 거지, 역류를 일으킨 건 아니었다. 하지만 퇴사는 달랐다. 완벽한 역류였다. 부모님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만약 퇴사를 한다면 월 100만 원씩 입금하라고 계좌번호까지 주셨다. '입사는 내 마음대로 했는데 왜 퇴사는 내 마은 대로 못하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내가 간절하지 않다고 했다.


  "돈이 없어 빚내서 학교를 다녔던 애들은 네 나이에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는데, 너는 그런 생각도 안 하는 걸 보면 너무 편하게 공부했나 보다. 응. 그래. 내가 자식 교육을 잘못시킨 거지, 뭐."


나는 반문했다.


  "아니, 나는 빚지고 학교 다니기 싫어서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았는데, 그건 간절한 게 아니야? 성적이 낮은 대신 나중에 일해서 학비를 갚는 것은 성실한 거고, 성적으로 학비를 갚는 건 편했던 거야? 학생일 때 공부를 더 한 게 나태한 거야?"


부모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몇 주뒤, 나는 계획대로 사표를 냈고 그날 돌아와서 부모님께 사표를 냈다고 말씀드렸다. 전처럼 욕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짧게 "알겠다. 네 인생 네가 잘하겠지"라고 씁쓸하게 수긍하셨다. 그렇게 나는 인생 처음으로 세상을 등지고 역류를 일으켰다.




... 그의 노래가 이제 막 거문고의 가락에 얹히려는 참에 줄이 탁 끊어졌다. ... 광대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밤 가운데서 진실로 오랜만에 평화로운 잠을 잤다. 그는 노래로부터 놓여난 것이다. ...
                                                                                                        (황석영, 2008: 244).

'어쩌면 반대로 음악으로부터 놓여난 게 아닐까?'


역류는 일으켰지만 그것을 유지할 힘이 없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퇴사 이후 나만의 철학이 없었다. 책은 돈을 주지도 않고 밥을 주지도 않지만,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최소한 개똥철학은 만들어준다.


나는 대단한 프로듀서가 되려고 작곡을 배웠던 것은 아니다. 음악으로 성공을 바라지도 않았고, 그걸로 업을 삼으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선명하지 않았던 음악의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한번 알아보려고 도전했던 것이다. 덕분에 음악 회사에 취직했지만, 거기에 큰 뜻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점점 익숙해지다 보니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때문에 퇴사 후에도 계속 음악에 머무르려 했다. 그러나 책을 통해 음악에 대한 줄을 끊고, 이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군가 내면에 지는 것과 외면에 나타나는 게 다르다는 것은 그가 세게를 올바르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황석영, 2008: 42).

돈은 어떻게든 벌어야 한다. 삶에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생 돈을 벌려 발버둥 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어떤 것인지',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면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은 평생에 얼마나 있을까?


'1년은 무시하자. 인생에 있어서 한 번은 내면을 다질 시간도 필요하다.' 그렇게 다짐하고 다시 책을 읽으러 서점에 갔다.






<참고문헌>

황석영. (2008). 개밥바라기별. 경기: (주)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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