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음 May 25. 2021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만으로 친구가 될 수 있다.

29살 삼촌의 육아일기 #10

조카가 다니는 어린이집 근처에 놀이터가 하나 있다. 하원을 시킬 때, 종종 그 길로 가면 조카는 여지없이 놀이터로 발길을 돌린다. 그동안은 날씨가 쌀쌀해서 야외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요새는 날도 따뜻하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 놀이터에 가기 딱 좋은 날씨다.


조카 혼자 미끄럼틀을 타거나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놀고 있다 보면, 비슷한 시간에 하원을 한 또래의 아이들이 어디선가 하나둘씩 나타난다.


아직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아이들이지만, 함께 노는 데는 서로의 이름 말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친구가 나타나면 "오?" 하는 감탄사와, 새는 발음으로 부르는 친구의 이름이, 함께 노는데 필요한 것의 전부다.


이렇게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만으로 친구가 된다.




내 이름 앞/뒤에 무언가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자기소개를 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서로를 소개할 때, "저는 XXX입니다. 나이는 OO살이고, 현재 XX 일을 하고 있습니다"가 가장 기본적인 멘트였다. 상황에 따라 소개 멘트가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형식은 위처럼 이름 앞/뒤에 나이와 직업 등 뭔가 나를 수식하는 말들을 항상 넣어 소개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정해주지는 않았지만, 사람들 모두 한결같이 비슷하게 말했다.


그건 신뢰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보는 사람을 무턱대고 믿기에는 너무 험난한 세상이다. 그럴 때 이름 앞/뒤에 붙는 직업이나 나이 등의 정보는 그 사람에 대한 판단기준이 된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조금씩 불신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새로운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약 10년 정도 사람을 사귀어 왔는데, 서로의 이름으로만 친구가 되는 아이들을 보면서 오랜만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사실 우리도 친구를 사귈 때, 이름만 있으면 충분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름보다 이름 앞/뒤에 붙는 수식어 즉, ‘라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름으로만 만났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제 ‘라벨’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사회 초년생들이다. 어떤 친구들은 좋은 곳에 취직을 하기도 했지만, 또 어떤 친구들은 운이 좋지 않아서 아직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한 경우도 있다. 매일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가끔 그 친구의 근황이 궁금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저 선뜻 연락하기 어렵다.


연락을 하면 우리는 의례적으로 "요새 뭐하고 지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겉으로만 보면 네가 요새 뭘 하는지 궁금하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속 뜻은 "요새 무슨 일 해?"와 비슷한 말이다. 정말 잘 지내고 있는 친구한테는 별로 부담 없는 말이지만, 만약 근황이 좋지 못한 친구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도 있는 말이다. 부담을 주기도 싫고, 부담을 받기도 싫어서 연락이 점차 뜸해진다.




그에 반해 아이들은 오늘도 그런 걱정 없이 함께 뛰어놀고 있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름으로만 다가갈 수 있는 저 아이들의 순진무구함이 부러워지는 날이다.

이전 09화 엄마는 손자 육아가 끝나면, 자식 육아를 시작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