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May 05. 2024

APOCALYPSE NOW REDUX

지옥의 묵시록 | 진실(眞實)

[APOCALYPSE NOW REDUX, FRANCIS FORD COPPOLA] MOVIE POSTER. 1979.


전쟁(戰爭)과 현대(現代)의 생성주기 모델은 아주 비슷하다.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게 발가락까지 닮았다. 거대 자본을 필요로 하며 권력에 복종하는 시스템을 형성하고 내재된 폭력은 다양한 형태를 지닌다. 숨 붙은 놈이 장애가 된다면 입을 봉쇄하는 것만 아니라, 서슴없이 죽여도 상관없는 해결책이 된다. 정신을 놓아버린 상황에서 성깔을 버리지 못하고 하루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실이 가끔 믿어지지 않는다. ‘언제라도 화염이 폭발할 휴전기에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구나’ 하는 놀라움. 도덕심을 버린 건가? 그런데 삶엔 그런 게 있다. 심리전만이 아니라 사투에서 재미를 찾아가는 단련이 존재한다. 파도처럼 덮치는 공포를 던져버리기 위해선 누가 미친 돌발이라 부를지라도 자동적으로 놀아야 한다. 


<실미도>와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Redux>. 어제는 이 두 편을 나란히 봤다. 역시 TV에서 보는 것은 감상을 반감케 한다. 자질구레한 광고와 시도 때도 없는 타이틀 삽입으로 화면을 끊어갈뿐더러 덕분에 생각만 더 많아지게 만드니 말이다. 이마를 지끈 눌러가며 보았다. 대상과 장소는 달라도 같은 시기에 놓였던 군인들의 삶을 다뤘는데 이렇게 차이가 난단 말인가? 아무리 강우석 감독이 천만 블록을 넘겼다지만, <실미도>는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일 수밖에 없다. 폐쇄적인 동굴에 갇힌 인간심리와 지옥 상황을 이해하는 시퀀스(Sequence)가 기름처럼 표면을 겉돌고 있지 않는가. 오직 감동을 추구하는 줄거리는 이상하게 감성을 동조할 수 없는 분석형으로 차갑게 만들어 간다. <지옥의 묵시록>은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힘이 보인다. 코브라 같이 장면(Scène)에 대한 독기 어린 완벽한 정열. 포도주사업으로 번 돈을 모두 퍼부을 만큼 고치고 고치면서 만들어간 이야기에 다시금 푹 빠졌다. 술 먹고 주정하는 한탄은 미국의 자본엔 수긍하지 않지만 그저 그의 깊은 공포감에 고개를 떨궜다. 

세상은 모순 덩어리다. 일찌감치 감지했지만 힘을 쥐고 있는 자들이 목젖을 젖히는 모순 덩어리다. 전쟁터에 나간 자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씌우고 군용 트럭에는 속도위반딱지를 붙이는 교활한 자식들. 우리가 범죄라고 부르는 어두운 면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다. 선녀처럼 가벼운 날개를 달고 날던 자들도 천상에서 떨어지면 부엌 뒷간에서 칼을 간다. 내부공포가 극도의 전율로 바뀌는 상황에서 4성(四星) 장군이나 참모총장이 되고도 남을 자를 처단하러 떠나는 길은 신밧드의 모험처럼 길고 험하다. 

<지옥의 묵시록>에는 각양각색의 인물이 등장한다. 짧게 부서지는 파도가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리면 한 군데 진중하게 있지 않는 놈들은 공수부대의 날개를 타고 물속에서, 숲 속에서, 강 위에서, 땅 위에서 진흙을 뒤집어쓴 얼굴을 내민다. 밀물이 내려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서핑보드를 들고뛴다. 알 수 없는 스릴! 전쟁터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든지, 시도할 수 있는 도박장이 되었다. 헬리콥터와 제트기를 몰면서 커피를 마시고 바다 위의 화염은 불꽃일 뿐이라고 말하는 지휘관들. 원망할 수 없게 실패한 전쟁은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죽음을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니까. 어디가 시말(始末)인지 모른 채 집단으로 변해버린 광기의 서곡(序曲)에 놓인 사람이라면 광신도의 교향곡 반주에 맞춰 왜 움직여야 하는지 모르면서 노래를 부르고 총을 들어야 한다. 

술 중에서 특히 소주는 휘발유 맛이라 먹다 보면 비위를 건드려서 토악질을 심하게 하곤 한다. 게울 수밖에 없는 눈물이 흐른다. 역겨움이 머리끝까지 밀리는 건 돈을 쥐고 지휘권을 휘두른 자들이 누구의 냄새인지도 모를 인간 피를 말리고 불태운 휘발유를 ‘승리의 냄새’라고 부르지 않는가! 휘발유로 목을 적셔대면서 고기 탄 냄새를 맡으면 빈 속에 술 먹은 자들은 안주를 생각하겠지. 그래, 전쟁터에서 광기와 살인이 무슨 문제인가?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 것을! 눈꼴시고 마음이 저려서 볼 수 없다면 배에서 내려 규율을 거부해야 한다. 자식이 나를 원망하고 부모가 나를 안타깝게 여겨도 미안한 마음을 짊어진 채 인간답게 살아야지. 

헌데 아쉽게도 나는 말이다. 야만국에서 스스로 신(Demigod)이 되어버린 커츠(Walter E. Kurtz) 대령처럼 질질 끌어온 일들에 독자적인 판단을 해왔고 모든 걸 엎어버릴 배짱도 있지만 긴 시간 동안 전쟁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니걸의 섹스쇼도 즐겼고 금권자에게 엿도 먹여봤지만 이 빌어먹을 우유부단함 때문에, 철저하게 악마 같은 신(神)이 되지 못했다. 잔인함을 펼칠 수가 없다. 거짓말을 일삼는 당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그런 인간들은 있고 그렇게 만드는 현실이 있는데, 신속하게 현재를 바라보고 M60 기관총으로 가증스러운 반성의 머리통을 쏘아버려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미련보다 더한 공포가 덮치거든. 잃어버리고 사라진 것들로 인해 잃은 게 많은 이는 모질긴 어렵다. 조금이라도 미친 세상을 보고 싶어서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만나고 싶은 욕구의 창문(窓)을 여는 걸까? 

‘구멍가게의 심부름꾼.’ 나는 위치를 착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 기억하고 있다. 등에 수형번호를 달던, 명함에 잡다한 직업군상을 붙이던, 호칭을 뭐라고 던지던, 어디 구멍가게에 소속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날 부리는 자들의 심부름꾼인 것을 잊지 않는다. 박제된 나비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건조한 짚에 불이 붙으면 꼼짝없이 죽음이다. 형체 없는 형상. 색 없는 그늘. 움직임 없는 입술. 수북하게 쌓인 앙증맞은 팔! 원초적인 본능으로 사람 죽이는 병사들이 자신의 가족과 조국을 자랑스럽게 기억했다 하지만, 그래서 자신의 생존과 맞바꿔가며 삶의 터를 적군에게 빼앗기지 않았다고 추억을 늘어놓지만, 무차별몰살을 지시하는 명령 앞에 죽고 죽이는 자들의 행위는 한 편의 연극이 아니면 무엇이런가? 

급박한 상황에서 판단을 하면 패배하게 된다고 하던데 나 아닌 것을 보면 판단을 돌리는 나는 언제나 패배자인가. 운명에 맡기고 한번 할 수 있는 것이란 나는 질기게 살고 너를 단칼에 죽이는 것일까? 


“다 끝났어!” 


시퍼런 도끼를 휘두른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걸레처럼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쓴 미치광이의 공포, 그렇게 거창해지지 않겠지만 원점은 아니겠지. 그래서 주저하게 된다. ‘공포! 공포! 공포!’ 입 속으로 쑥 들어간 그 자식을 꺼낼 수가 없을 테니까.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눈을 뜨는 순간마다 더욱 강력해진 놈과 온몸으로 힘겹게 싸워야 할 테니까. 전쟁은 인간을 철저하게 망가뜨린다. 회복?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과연 언제쯤 가능한 것인가.


2005. 2. 12. SATURDAY



전쟁은 인간성을 파괴한다. 인간이 악귀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전쟁 후 외상증후군(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은 전쟁에서 살인을 한 자 만이 겪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 동조하고, 전쟁에 참여하고, 전쟁을 목격하고, 전쟁에서 살해당한 그 모든 사람들이 PTSD에 시달린다. 전쟁영웅은 없다. 누가 도구가 되는지도 모르고 살벌하게 뛰어야 하는 사람들 사이로, 총알이 연발된다. 빗발치는 살기 속에서 살아남는 자는 누구인가?




[THE TRUTH ABOUT EGG] 2005. 2. 11. PHOTOGRAPHY by CHRIS


“계란만이 진실을 말할 뿐이요. 흰자는 떠나고 노른자만 남으니까.” <지옥의 묵시록 | Apocalypse Now Redux> 


핵심을 건드리기 위해선 껍질을 까야한다. 그렇다면 행위를 실행하는 자 누구인가? 힘이 주어지면 약간 무거운 것은 손안에 남고, 조금 가볍거나 물처럼 흐르는 것은 손을 벗어난다는 성질을 아는 자 또한 누구인가? 가짜의 몸체(假體)와 유리(遊離)되는 본질(本質)에 다가가기까지, 달걀 하나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에게 진실(眞實)이란 보이지 않는 장벽인 것이다. 


햇빛을 받으며 평화로운 식사를 하는 와중에 우연히 노른자를 보았다 해도, 식사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에게 달걀이란, 그저 만찬코스의 재료이거나 음식 이름의 하나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손아귀의 힘을 조절하는 건 요리사가 소유할 미덕이자 비술 중 하나이다. 계란을 잡다가 손에 너무 힘을 주면 진실이든 아니든, 둘 다 떠나고 만다. 본질이란 그리 쉽게 깨어질 장벽과 쉬 상해버리는 믿음에 둘러싸여 있다. 


鷄卵的眞實 2005. 2. 11. 金





진실하면 재미없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하게 되었을까? 초라하게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거짓말이 시작되었듯이, 비밀 없는 삶을 살아가려면 억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하기에 이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내 몸의 껍질을 깨고 흰자 빼기. 이토록 열심히 살고 있는 그대는 일급 거짓말쟁이다.

2013. 6. 3. 月


작가의 이전글 KISS AND TELL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