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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04. 2024

KISS AND TELL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적인 시간과 현재의 심상

[THE PASSWORD FOR EVERYTHING : S] 2008. 8. 19. PHOTOGRAPHY by CHRIS


나는 관찰자로서 대상을 바라보는 걸 즐기는 편이다.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있다면?’ 이런 가정은 그리 유쾌하진 않다. 첫 키스를 막 치른 소년처럼 성공공포증이라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이전의 행위와 분리되어 있는 존재의 중압감 때문에 상대 앞에서 얼굴은 굳어지고 말을 더듬을지도 모른다. 내가 주체가 되어 내 마음을 주시하는 행위는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부끄럽더라도 몇 시간 정도는 견딜 수 있다. 발설을 하지 않는다면 박스의 상태가 먹물처럼 까맣더라도 오롯이 추억으로 묻히고 말 테니까.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뒤적거렸다. 여행 중에는 책을 읽기가 어렵다. ‘여행’이라는 단어는 ‘책’과 무척 가까운 사이면서도 주체가 놓인 세계의 성질이 안팎으로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현실과 이상 사이에 동시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하긴, 삶은 대상을 탐구하기를 멈추지 않지만, 새로움에 빠진 인간의 머리는 가끔 정신을 놓고 집중을 게을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생각을 환기시키는 이야기가 목젖 밖으로 웃음을 토해내게 만든다는 경험도 잊어버릴 만큼 여행은 수다스러운 입을 다물어버리게 종용하거든.


“사람들의 어린 시절이란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꿈 이야기 같아요. 이 분, 십 분 정도는 재미있지만 그러고 나서는 보통 모호해지죠. 듣는 사람보다는 언제나 말하는 사람이 훨씬 흥미로운 그런 얘기거든요.” 

Isabel Rogers, in the Book of Kiss and Tell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화자가 말한 지 이십 분 정도가 지나면 흥미를 잃어간다.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생각의 정형화가 낯선 여행지에서 여행의 외부적인 것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여행객만큼이나 무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이 간다. 보통 배낭을 꾸려 매고 한 도시에서 방황하던 여행자의 심리가 오로지 그날 먹고 자고 노는 것에 초점이 맞춰질 때가 많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아! 중국은 말이지."

"음, 인도 사람은 그렇다니까요!"

"오! 유럽의 거리는 그래요."


정말 세상은 설명에 앞서서 감탄사가 필요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이긴 하다.


우리가 말하는 한줄기 비밀이라는 것은 까만 비닐봉지에 들은 잡동사니처럼 까보면 아무것도 아닐 때가 많다.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 안의 것이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의 역설을 안고 있다. 결국 은밀한 사생활은 듣고 보면 털어놓는 사람만 홀가분한 거지 듣는 귀에겐 피곤한 노랫소리 같다. 


키스 앤 텔 Kiss and Tell,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프루스트(Marcel Proust)적인 시간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민감한 코 앞에 흔들어댔다. 냄새를 맡으니 살살 군침이 돌았다. 지난날들도 생각나고 이사벨의 이야기와 부합되는 어떤 시간들이 괜히 무안해졌다. 그런데 레토르트 음식(Retort food)엔 빨리 질리는 것 같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백세카레를 역시, 전자레인지에 돌린 햇반에 부어 크게 한 입 떠먹다 보면, 어머니가 뜨거운 밥 위에 얹어주던 막 담근 빨간 김치 한 포기가 더 간절해지듯이 말이다.


어쨌든 대상에 대한 사랑을 오래 감미 할 요량이면 섹스를 하던, 키스를 하던, 바람을 피우던 사실을 털어놓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더라도 꾹 참는 게 조금은 자신을 근사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방편이지 아닐까 싶다. 별 것 아니면서도 솔직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우리네 인생이다.


2008. 8. 16. SATURDAY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 50 First Dates>도 있지만, 첫눈에 반한 상대가 단기 기억상실로 인해 매일이 첫 데이트, 첫 키스, 첫사랑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흥미로운 도전이 될까? 아니면 일상적인 생활이 될까? 호르몬이 가져다준 뜨거운 떨림은 시간이 지나서 마음에 차분히 안착될 수 있을까?

  

나의 첫 키스는 언제일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첫 키스의 기억이 없다. 적어놓지 않아서 기억에서 가물거린다. 나는 그냥 육탄전으로 돌진한 건가? 시간이 지나고 보니 처음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처음 이 땅에 놓인 생명이 발걸음을 계속할 수 있느냐, 처음 가졌던 마음가짐이 현재의 이 순간과 함께 하느냐가 삶의 관건이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여행 중에 읽었던 알랭  보통의 이야기들요즘  사람이 한국 TV에서 보인다보통은,  알려진 명사(名士)인가사물의 이름만 덩그란 명사(名詞)인가보통인가대단한가청순한 얼굴의 보통이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서 다가오니 유치하게 이름 가지고 놀고 싶다. 책은 재미있었다. 지금은 내용이 전혀 기억이 안 난다.

2013. 6. 20. 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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