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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20. 2024

DER YALU FLIESST

압록강은 흐른다

[압록강(鴨綠江), YALU RIVER] 2008. 8. 30. PHOTOGRAPH by CHRIS


봄은 어떤 아름다움을 가져오지?

-산에는 꽃이 피고 계곡에는 뻐꾹새가 노래 부른다.

여름은 무엇이 아름답지?

-밭에는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담장엔 버들이 푸르다.

가을에는 무엇이 아름답지?

-들에는 시원한 바람이 속삭이고 시들은 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며 달은 고독한 뜰을 비친다.

그러면 겨울은 무엇을 가져오니?

-언덕과 산에 흰 눈이 덮이고 길에는 다니는 나그네도 없다.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中에서



"봄인데 어떻게 지내?"

"봄인데 기분은 어때?"

"봄인데 만나지 않을래?"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사람을 통해 알게 된다. 예전처럼 천지가 한번 순환하는 것뿐인데, 이 평범한 자연의 법칙이 감정과 하루를 변화시킬 만큼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돌고 도는 기울어진 인생에서 평정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깜짝쇼로 장식된 삶에서 가장 못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가 되었지만 말이다.


오늘은 이미륵(李彌勒)이 타계한 지 55주년이 되는 날이다. 타인의 기념일을 기억하다니 별일이다. 춘분을 앞두고 의지는 쳐지고 괜히 마음이 서성거린다. 하릴없이 책장을 어슬렁대다가 이맘때쯤 새가 되어 멀리 날아간 이미륵을 떠올렸다. 봄바람 따라 슬피 눈감은 그를 알게 된 건 전혜린의 글을 통해서였다. 잘 가던 헌책방에서 우연히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를 발견하고는 보물단지를 찾은 듯한 마음으로 책을 움켜쥔 채 버스를 탔었다.


덜컹대는 찻간에서 훑었던 아름답고 소박한 한국의 가계와 산천이 몇 줄의 이야기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작게 감탄을 하면서 울퉁불퉁하게 밑줄을 그어뒀다. 힘들 때 나에게 읊어주려고 말이다. 타국에서 그가 그려낸 자전(自傳)적인 묘사는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감흥보다 더 섬세하고 정겹다. 혈육을 낳고 떠나가고 헤어지는 과정은 흔들리는 기계음의 어지러움만큼 글에 깊이 빠져들게 했다. 삶의 거리는 떠난 자의 홀가분함을 전하기엔 멀고, 돌아오지 못한 그리움을 전하기엔 무거운 것 같다.


답답함이 짙어지면 훈장선생님의 교육을 받듯이 정갈하게 무릎을 꿇고 지난 삶의 이야기를 조용히 외우거나 신기한 동화를 들려주기 좋아하는 누나의 무릎을 베고 계절의 아름다움을 복창하던 ‘나’의 어린 시절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따스하고 향기로운 봄이다. 이번 한 해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은 어떤 아름다움으로 나를 찾을지, 잠시 그려본다.


2005. 3. 20. SUNDAY




[SOMEWHERE OVER THERE] 압록강(鴨綠江), YALU RIVER, 2008. 8. 30. PHOTOGRAPH by CHRIS


2008년 여름, 압록강변을 찾았던 것은 회색빛으로 가득 찬 마음에 아름다운 사계절을 비춰준 《압록강은 흐른다》, 단순히 이 책에 감명을 받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희미해진 머릿속의 그림과 세상은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오늘은 살아있다는 증명으로 붉은 기억의 흔적을 남겨야 했다.


여름의 중심 팔월, 화창했던 햇살 속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 너머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땅이 있었다. 가까이 있지만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이질적인 거리는 뜨거운 햇빛조차 성가심을 가시게 했다. 강 너머 우두커니 서 있던 북한 아이들도 보였고, 빨래하는 여인도 보였다. 군인들이 탄 지프차도 적당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다른 나라를 통해 돌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땅,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은 하나가 없는 우리의 현재였다.  


압록강(鴨綠江)이 주는 단어는 묵직했다, 육천 년 역사로부터 현재까지 나를 만들어 낸 삶의 흐름 속에서 무심히 흘러가는 물길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가자고 나를 달랬다. 북한에서 빠져나오는 기차를 배경으로 멋쩍게 탈출한 기념사진밖에 찍을 수 없었던 집안압록강대교(集安鴨綠江大橋)와, 갑갑한 유리 속에 갇힌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好太王碑)와, 소를 모는 농부가 쉬는 풀밭으로 변해버린 장군총(將軍塚)과, 호객꾼이 절반인, 반으로 갈린 백두산(白頭山)과, 그저 흐르는 물만 봐야 했던 압록강(鴨綠江)을 둘러보며 우리나라의 지금은, 벗어날 수 없던 시절의 나와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저 몇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는 압록강에서의 시간을 다시 돌아본다.




[압록강(鴨綠江), 북한(北韓), YALU RIVER] 2008. 8. 30. PHOTOGRAPH by CHRIS



답답한 생활 속에서도 가끔은 저항할 수 없이 봄바람에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연세대학교 가기 바로 전에 있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헌책방은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문 밖까지 퍼뜨리며 소란스럽게 시선을 유혹했다. 대학 때부터 단골이었던 헌책방은 교보문고에서도, 학교도서관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런 책들을 발견할 수 있던 보물창고였다. 잘 가던 헌책방은 종로 광장시장과 청계천 주변에도 있었다. 거리상 편해서 여기를 자주 갔다. 오천 원에 책 열 권은 얻어올 수 있었다. 아저씨한테 잘 만 말하면 열다섯 권도 가능했다. 가방 가득 책을 넣고선 일주일의 양식을 얻어온 기분에 든든했다.


헌책방에서 요즘 자주 거론되던 '가성비(價性比)'를 발견했다. 다만 헌책을 너무 가까이하면 목욕을 자주 해야 했다. 말로만 듣던 책벌레가 진짜 있었다. 등과 목이 간지럽다 못해 책 읽는 것을 방해하는 신경쓰임에 책들을 흘겨보고는 베란다에 하루 정도 묵혀놓곤 했다. 에프킬라를 멀리서 뿌려서 책벌레를 책 속에서 질식사시키려다가 책벌레가 작가들의 메신저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곤 관대하게 참기로 했다. 인내심이라곤 별로 없었는데, 가려움을 참을 만큼 작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만큼 흥미로웠다.


《압록강은 흐른다》를 다시 들어봐도 간지럽지 않은 것을 보니 책벌레도 시간 속에서 눈을 감았나 보다. 오 년 전인가, 업무 차 신촌을 지나갔을 때 차를 몰면서 책방의 자취를 찾아보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압록강은 흐르고 책벌레는 운명하고 헌책방은 사라지고 시간은 지나간다. 나의 오늘도 이렇게 당신과 함께 천천히 흐르고 있다.





[압록강(鴨綠江), 북한(北韓), REAL LIFE, YALU RIVER] 2008. 8. 30. PHOTOGRAPH by 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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