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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21. 2024

BEFORE SUNSET

한낮의 태양이 식기 전에

“모든 인간은 각자가 쌓은 체험의 총체이며, 작가는 자신이 겪은 그런 체험을 글로 적을 뿐이다.”

천사여 고향을 보라 Look Homeward, Angel!, 토마스 울프 Thomas Wolfe 中에서



프랑스 어느 여작가의 글로 기억한다. 체험을 통한 충격적인 글쓰기로 유명해졌던 중년의 여작가에게 스무 살 연하의 청년이 다가온다. 젊은 남자는 그녀에게 오랫동안 사모해 왔다고 수줍게 고백한다. 그는 자신과의 경험을 소설로 쓰길 권유한다. 그들은 격렬한 애정을 나누며 사랑에 담긴 지배와 종속의 관점을 이상적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처음의 강렬했던 속박은 허물어지고 무너진 서로의 관계만이 놓여있었다는 이상한 결론으로 마무리된, 되돌 일 수 없는 만남이었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머릿속에서 변질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점에서 대충 봐서 기억이 진짜인지조차 확인불가다.


만남은 여러 종류가 있다. 사랑을 목적으로, 목적 없는 사랑으로, 일 관계로, 취미 생활로, 여행에서, 길거리에서, 생활에서, 부딪히면서, 그냥, 어느 날, 우연히, 어쩌다 만나는 관계까지, 체험을 적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든 누군가를 만나서 체험을 적든 간에, 글이 표현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사람을 말한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소수분자 결합 같은 만남과 이야기를 흘린다.


어릴 때부터 만남의 소중함을 되새겼지만 삶 속에서의 만남이 매번 소중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총과 폭력이 등장하고 폭탄과 고함이 매일같이 삶을 위협하지 않지만 잔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은 정말 그들만의 드라마일 뿐, 만남 속의 인생은 그렇게 거창하지도 또한 잘나지도 않은 비상적 순환구조를 가지고 흘러간다.


난 드라마를 좋아한다. 시끄러운 액션을 보면 잠을 자는 신체 구조상 영상에 있어서는 조용한 게 체질이다. 불안함이 끝나지 않는 만남 뒤 소리를 한번 지르고는 충동적으로 비디오가게에 들렀다. 언제 이 지겨운 생활이 끝날까? 날 달래야 했다. 신경질적이고 우울한 만남을 씻어낼 뭔가가 필요했다. <비포 선 라이즈 Before Sunrise>의 후편 격인 <비포 선 셋 Before Sunset>. 비디오테이프를 집는 순간부터 전편처럼 화염에서 벗어난 연인들은 정열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를 향한 다감한 말과 따뜻한 포옹 정도로 오늘 차가운 기분을 날려준다면 만족했다.


영화는 의외로 심심했다. 텍스트적인 글쓰기를 지향하는 평을 봤을 때만 해도 ‘여기엔 뭔가 있겠구나’ 했는데, 에단 호크의 심약하고 흩날리는 말투만 옛날처럼 여전히 빛을 발했다. <비포 선 라이즈>가 처음 나왔을 때, 제목을 보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의 그 유명한 스칼렛의 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야. Tomorrow is another day.”를 떠올렸던 나는, 전형적인 미국남자와 세련된 프랑스여자의 사랑이 매우 뜨거울 거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어로 번역된 ‘내일에는 내일의 태양이 있다’와 달리 '내일은 또 다른 하루(Tomorrow is another day)'가 전부였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원문 구절처럼, <비포 선 라이즈>엔 태양이 뜨기 전 남녀의 시원한 정열이 그저 또 다른 하루를 만들어냈다.


그래도 그 나이엔 풋풋한 사랑이야기도 좋았다. 첫 만남의 건전함이 짙은 곳에서 무너졌던 예상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가벼운 키스와 애무로 마무리되는 둘 사이 떨림이 다음 만남엔 혹시나 더 진해질지 모른다는, 새로운 만남이 되면 불타오르리란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마음은 같은 말을 던졌으나 입 밖에선 약간씩 왜곡되어 들려지는 연인들의 언어처럼, 사랑이 비친 세상의 거울엔 솟았던 태양도 지게 하고 져버린 태양도 솟게 하는 가벼운 트릭이 존재하는가 싶었다.


그리하여 십 년이 지났다. 다시 만난 남녀, 이들이 단 하루를 잊지 못해 책과 노래로 적었던 기억은 그들에게 어떤 마법을 실어줬을까? 남의 눈을 통해 표현되는 인생의 서술에서 나는 어떻게 보일지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곧 그들이 한 시간 반 가량 걸으며 옛날을 상기하는 게 정말 심심했다. 현실 속의 이상주의자인 여자와 이상 속의 현실주의자인 남자. 둘 다 나의 면모를 조금씩 들춰냈지만 ‘아픔이 없다면 추억이 아름다울 텐데’라고 말한 지점에서 심하게 도리질했다.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어서 추억이 삶이 되고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억측이 밀려왔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툭, 끊겨버렸다. 한 보따리의 이야기가 걷다가 끝나버려 시간 한번 잘 때웠다.  


공부하거나 일하거나 생활 속의 만남이 아닌 경우엔 만남을 세 번 이상 넘기지 않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무엇하나 시작할 수 없는 현실에서 다 상처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말로는 상대를 위한다고 했는데 돌이켜보니 회피에 익숙한 나를 위한 변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태양의 노래는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힘겹지만 둥글게 식은 뒤의 여운은 탈진으로 남는다. <비포 선셋 Before Sunset>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이런 말을 준비했었다.


“말없이 떠났던 여행, 그것도 사랑을 느꼈던 사람과 다시 한번 떠날 기회가 온다면?”

“두말없이 떠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영화는 아니었다. 기회는 찾아왔지만 떠나는 것은 사람의 몫이 아니었다. 몸 안에 담긴 마음의 몫이었다.


2005. 3. 3. THURSDAY




바쁘다고 힘들다고 사랑은 지겹다고 해 놓고, 사랑이야기는 참 많이 보고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 비디오와 책 대여점과 만화책방의 절반 이상의 이야기 주제는 사랑이었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 마무리되는 로맨스와, 싸우다가 애정을 찾아 떠나는 무협지와, 사고의 고뇌로 부르짖는 귀결점이 사랑인 철학과, 모든 문학들이 꽂아대는 사랑 이야기는 이미 설탕발림으로 귀에 두텁게 내려앉았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랑은 플롯 구조상 현실에서 한 걸음 이탈해 있기에 호감도에서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 햇살이 비추는 듯한 몽환적인 하루가 펼쳐진다. 오늘을 잊은 듯한 꿈을 꾸는 이야기 속에서 실제와 다른 감정을 분출하며 본래의 나와 다른 얼굴로 상대를 만난다. 하루를 걷고 나를 잊은 듯이 그대와의 시간을 보내고 흡사 청춘을 되찾은 듯, 시간을 감아쥔 듯 승리의 표정을 짓지만, 현실은 여행지에서 기대하듯이 왕자나 공주를 불러오지 않는다.


나의 여행에선 엉뚱한 캐릭터들과 장소들이 뜬금없이 개입되긴 했지만, 그 적나라한 탈출 속에서 언젠가는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사명을 안은 것 같은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현실과 이상의 두 갈래 통로처럼 모든 것은 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으면 어느새 다른 생각에 빠져들어서 영화를 보는지 마는지 의식은 다른 시간으로 넘어가 있다. 대상을 분석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감성으로 봐야 한다고 했는데, 태양이 살아있는 낮에는 그게 안 된다.

                                                    





[REMINISCENCE] 2024. 3. 21. PROCREATE IPAD, DRAWING by CHRIS


한낮의 수줍은 고백

그 소란한 기억

고개 숙인 노을 속에서

붉게 비춘다.


순서가 흔들려도

눈 감은 모든 말은

되돌릴 수 없게

어둠을 휘어 감는다.


저물어가는 한숨

흔들리는 바람

멀어져 가는 소리들

안녕을 나직이 부른다.


In the shy confession of noon,

That tumultuous memory,

Bows within the setting sun,

Casting its crimson hue.


Though the order may sway,

Every word uttered with closed eyes,

Irrevocably, they sway,

Weaves through the darkness.


As the breath of dusk fades,

And the trembling winds cascade,

Sounds drift further away,

Goodbye, they softly say.





2013. 7. 16 TUESDAY

태양이 있고 없고, 태양이 저물어갈 무렵, 떠오를 무렵, 태양 하나 만으로도 감정이 달라진다. "오직 너만을 사랑해!" 당신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그렇게 믿고 싶은 나의 소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With the presence or absence of the sun, at the time it sets or rises, even with just one sun, emotions can change. "I only love you!" The happiness I feel upon hearing your seemingly false words might be due to my wishful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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