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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19. 2024

CONSCIOUSNESS

NORA in JAMES JOYCE, 탑 속에 갇힌 율리시즈의 행로

고흐(Vincent van Gogh)나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프리다 칼로(Frida Kahlo de Rivera) 같은 예술가들의 전기 영화는 장시간 즐겨찾기 목록에서 시선을 어지럽혔다. 사람의 일대기를 훑는 방편 중에는 두 시간 분량의 영화보단 삶의 자취를 길게 따라갈 수 있는 소설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는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생각을 열게 한 인물이다. 조이스의 글은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중 어디에서 먼저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한 인간을 깊이 좇는 사람이 되리라는 다짐을 했던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제임스 조이스는 한마디로 머리뚜껑을 여는 자극이었다. 당시 습관처럼 기분 좋은 글을 읽고 난 후엔 책 껍데기에 광고처럼 붙어있는 관련 작가의 목록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제목을 뒤져가며 찾아보곤 했다. 그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Ulysses를 마주하게 되었다. 마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 Being John Malkovich>처럼 작가의 머릿속에 앉아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정되는 블룸의 눈과 입으로 광고외판원이 되어 안개처럼 두터운 하루를 거닐었다. 스티븐 디덜러스(Stephen Dedalus)와 레오폴드 블룸(Leopold Bloom), 그리고 몰리(Molly), 그들과 검은 밤거리를 유영한 뒤 더욱더 선명해진 의식을 잡아끌고 침대에 누워 '사람들이 거창하게 생각하는 세계의 흐름은 인간의 머릿속 작은 우주에서 돌아가는 회전판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작가 생활의 결정이라고 말해지는 근 현대 모더니즘 글쓰기와 의식 흐름의 서막을 연 율리시즈 Ulysses》는 테오 앙겔로풀로스(Theo Angelopoulos)의 롱테이크 미학의 서사적인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 Ulysses' Gaze>이나 프랑스, 독일, 스웨덴, 체코, 폴란드, 일본, 영국, 또한 미국의 할리우드 영상과 출판물까지 영향을 미치며 세상을 바라보는 혁신적인 접근계기를 심어주었다. 그만큼 외부적인 사건과 시간의 구속에 따라 전개되는 전통적 호메로스(Homer)의 《오디세이아 Odyssey》와는 취하는 서술방식이 다르다.

1904년 6월 16일, 혼란한 더블린에서 사는 블룸의 하루를 그의 의식을 따라가며 서술하고 기록한 조이스가 없었다면 자의식을 통해 순간을 표출하는 다양한 표현 기법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깔끔함과 싸구려 네온사인에 중독된 듯한 사고 뒤흔들기는 너저분하고 인간적인 제임스 조이스의 생각을 반듯하게 정제한 결과물로 보인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Dublin).


영화 <크라잉 게임 Crying Game>에서 보듯이 IRA 무장단체와 독립운동, 제임스 조이스가 이곳을 대표한다. 나에겐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이 떠난 나라이며 의식을 교류했던 수많은 작가들의 안식처이며 특히 사랑하는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고향이기도 하다. 더블린에 대한 관심이 학습적으로 관계적으로 의식적으로 인연이 많았던 영국의 영원한 변두리에 대한 장소적인 친밀감과 내전의 참상에 대한 대학 시절의 끈질긴 호기심과 탐구에서 시작된 것인지 이제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이곳 사람들의 습관이나 기질, 삶의 굴곡은 여러모로 우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더블린 사람들이 국경일처럼 삼는 축제의 날, 6월 16일은 스스로의 뿌리라고 서슴없이 부르는 의식의 고향 제임스 조이스와 노라가 처음 데이트를 한 날이기도 하다. 가난한 술집에서 술을 따르는 시골 출신의 바텐더에게 삼류작가는 어떤 뜨거운 반응을 보일지 따라가 본다. 아일랜드인이 하루를 넘기는 필수음료, 흑맥주의 강한 냄새와 맛처럼 이들은 맥아가 채 희석되지 않은 쓰고 거친 원액을 들이켠다. 곧 한눈에 반한 모습으로 급하게 한 손을 바지 속에 넣는다. 혼미하게 뒹군 노라와 조이스가 낳은 열정의 아이는 바로 율리시즈 Ulysses더블린 사람들 Dubliners, 그리고 사고를 따르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다.

제임스 조이스, 그를 보면 영웅 율리시즈(Ulysses)가 생각나지 않는다. 방랑생활을 하는 한량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망가진 조국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거지처럼 보일 뿐이다. 누가 근작을 세상에 보이기 쉽게 허용하고 밀어주겠는가. 너무나 평범한 그이기에 자신이 태어나고 컸던 더블린에서의 일상의 기록도 정말 보잘것없는 평민의 부산물로 만들어버린다. 맥주를 파는 펍(PUB)에서 데이오프를 선언하는 노동자들과 술에 찌들어 웃고 있는 그들의 침울한 기록을 건조하게 훑어 내리며 작은 섬나라의 이름으로 거대한 대영제국의 손아귀에 노동도 착취당하는 일반인의 슬픔을 그려낸 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긴 시간이 지나 그들의 뼈가 오롯이 삭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선 이들에게 어떤 자유와 미래가 있을지 암담해진다.

영화라는 군집의 창작물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문학과 음악이란 상상의 늪에 빠져서 그런지, 한 인물을 보거나 작품을 볼 때 대중에게 칭찬받는 한 사람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인간은 그를 키운 환경이나 그를 돌보는 사람들, 그가 속한 사회, 하루에 심어지는 감정, 영감이 되는 뮤즈들에 둘러싸여 있다. 천재라고 불렸던 조이스의 이기적인 작가생활보단 그를 내조하느라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한 여성의 절망과 고독에 초점을 맞춘 영화 <노라 NORA> 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성을 떠나 '제임스 조이스'라는 이 단어에 반해 집어 들었던 <노라 NORA>는 별 재미는 없었지만 한번 더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고 부르는 이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곰곰이 살펴본다. 사랑이라는 이 언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소중하고 필수적인 존재라고 외치면서도 자신만 보도록 뾰족한 질투의 탑에 가두어두고 조금만 꺼내어 보는 욕심은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제임스의 사랑이라고 불렸던 노라가 라푼젤처럼 느껴졌다. 달리 보면 인형의 집 노라 같기도 하다. 스스로는 갇혔으나 자신을 해방시킬 누군가를 교육시키며 자신의 긴 머리를 풀어헤쳐 벽에 갇힌 사랑을 열렬히 나누고, 떠나버릴 그와 미래에 대한 비밀스러운 약속을 하면서 스스로는 벽장 속에 갇힌 부패한 공주가 되어버리는 비극의 라푼젤 말이다.

 
해방된 인간은 탑 밖에서 글을 쓰면서 명성을 얻지만 탑 속의 여자는 의식을 주면서 속까지 늙는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위대한 의식의 흐름이며 사고의 작용이라면, 견고한 물질의 탑을 넘어 기체와 같은 물길로 사람의 마음속을 지배하는 흐름은 누구의 것인지 묻고 싶다. 조이스의 천재성은 그의 것이었는지, 노라의 것이었는지, 이들의 교감이 이뤄낸 영성물이었는지 시간을 뛰어넘은 우리는 천재를 둘러싼 소소한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제임스의 글을 읽다 보니 의식의 스트리밍은 자주 버퍼링만을 반복한다. 소란스럽게 이상한 질문만을 던진다. 영상과 책과 음악과 사람과 거리와 하루와 날씨와 소리와 감정과 기분과 생각을 부산히 오가지만 자꾸 거슬러 물길 가는 의식은 과연 내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제삼자의 것인지 무척 궁금해지곤 한다. 그는 글 속에 최면제를 넣었을지 모른다. 인물 성격부터 시공의 사건까지 순식간에 바꿔버리는 비열함에 한순간 의식 자살을 꿈꾸기도 하고 꽉 막힌 사방을 벗어나 드넓은 하늘에서 유영하는 걸 그리지만, 결국 사방이 막힌 우주의 정거장에 머무르곤 어제와 비슷한 꿈으로 암흑을 도배하면서 몸부림친다.


나는 누구인가. 나와 그녀와 그는 어디에서 길을 잃었는가. 왜 떨어질 수 없게 붙어서 살아야 하는가. 몸과 영혼은 계약상의 부부인데 굳이 영속을 보장하는 믿음으로 부부의 연을 몰고 갈 필요가 있는가.


노라와 제임스 조이스. 한 몸이되 그들은 성(性)과 속(俗)이 떨어져 있었고 그 사실이 현대 창작물의 물고를 틔웠다. 사람들이 애타게 찾는 반쪽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의식과 사고를 부르는 자신의 영혼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란 바로, 신을 믿는다고 부르짖지만 서서히 자존을 잃어버리고 있는 현대판 율리시즈의 행로인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글을 쓰레기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인간의식의 난해한 세계라 떠받드는 이도 있다. 아무리 좋은 글도 한 마디 어구로 표현해야 한다며 핵심을 부르짖고 강요하는 사람들에겐 그의 소설은 어려울 수도, 또한 별 것 없는 허접한 쓰레기일 수도 있겠다. 현대인에겐 모든 게 시원찮다. 하지만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먹고 싸고 자고 노는 걸 그렸다는 건 참 의미가 있다. 우리의 일생도 그러하다. 기나긴 순간을 압축해 보자. 하루 근사하게 요약해도 생식의 순간에 의식을 더하고 시공을 곱한 그 이상이 나오기 어렵다. 율리시즈가 의미로운 것은 평범한 것도 값지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기 때문이다. 한바탕 꿈이 된 호접몽이든, 율리시즈의 방랑이든, 인류가 추구하던 바는 비슷해 보인다.


"나를 되찾기"


탑에 갇힌 율리시즈는 어떤 이야기를 지어낼 그게 궁금하다. 무영탑도 그렇고 죄수를 가둬놓았던 탑도 그렇고 이 탑(塔)이라는 형태와 속성은 궁금증 자체다. 오스카(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도 사드(Marquis de Sade)도 결국 문란한 작품이란 주홍글씨를 안고서 갇힌 곳은 탑이었다. 헨리 8세의 영원한 여인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도 그렇다. 중국이나 우리나라 같이 자연이 골진 곳이라고 말하는 곳에서는 유배지가 곧 탑의 역할을 하기에 외관상 그 담은 지극히 낮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개방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인간의 배타적인 시선과 편협된 사고가 쌓아가는 탑은 결국 같은 높이로 가슴을 압박한다.

차가운 전쟁을 부르는 건, 그리고 비틀린 의식을 키우는 건, 인간이 쌓아 둔 외골진 장소란 생각이 든다. 분열이 새로운 창조를 생성하는 원동력이라면 우리에게 화합이 정착되는 날이 있을까 싶다. 본질적으로 이건 불가능이라고 선언한다면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겠다. 말은 평화를 부르짖지만 일치의 순간은 얼마나 영속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의 마찰, 율리시즈의 시선은 갇힌 공간에서 패배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지만 하루의 항해는 계속하고 싶다. 그게 노라가 되었든 조이스가 되었든 혹은, 내가 되었든 간에 말이다.


2004. 10. 29.  FRIDAY





십 대에는 거친 세상을 항해하며 모험이 가득한 세계를 돌아다니는 '율리시즈'를 동경했다. 희망의 시절이 저물 무렵엔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문구에 더 마음이 갔다. 예술가가 뭔지도 모르면서 사색적인 상념이 흔들리는 대로 사는 모습에서 안정감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살다 보면 그저 마음 가는 대로만 살기가 쉽지 않다. 방황이 가라앉지 않을 땐 의식은 홀연히 일어나 다시 시간을 타고 표류한다. 벌써 내 안의 그들은 탑 너머로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고 있다.





[Gaze Outward] SELF-PORTRAIT of the SERIES of A STORY ABOUT A STORY 2006. 8. 8. PHOTOGRAPH by 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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