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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25. 2024

MORNING FLOWER

魯迅,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朝花夕拾)

[魯迅纪念馆] SHANG HAI. 2007. 11.29. PHOTOGRAPH by CHRIS



1.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우리들은 같은 말을 쓰지만 입 밖으로 내어진 말은 자신의 얼굴처럼 또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오늘 내가 만난 말들이 해맑고 지혜롭고 화사한 얼굴이라면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얼마나 즐거울까?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이런 간단한 문장은 기분을 좋게 하는 동시에 하루를 돌아보게 하는 명상의 힘을 전달해 준다. 꽃보다, 씨앗보다, 나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흙이라고 하였다. 아침에 뿌려둔 것이 가시 있는 장미일지 꽃도 없는 가시나무일지 저 빈 농토는 묻지 않는다. 품에 안고 자라길 기다린다. 사람들은 해지기를 기다릴 줄 모르고 꿈틀거리는 땅을 향해 피어나라고 소리친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들은 빛이 사라지면 자취를 감춘다. 인적이 뜸한 밤길, 당신이 찾던 꽃잎은 힘없이 널브러져 있다.




2. 살아있다는 것은 외마디 비명을 듣는 것


죽는 자는 <으악>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는 희열을 느낀다. 그 <으악>하는 소리를 들으며.  《폭군의 신민(暴君的臣民), 1919, 노신(魯迅)》


폭력은 견뎌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폭력과 함께 내부의 무언가가 성장하는 것이고, 집단적 분노와 함께 자신의 내벽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는 잔인한 형벌이다. 외마디 비명이란 무섭다. 살아있다는 희열은 미리 다가온 죽음을 감지하는 예지의 선험적 고통일 것이다. 가끔은 살아있다는 것이 힘들다.  




3. 밤의 송(頌)


밤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노신의 《밤의 송(頌)》은 따뜻한 군불의 여운을 남긴다. 나는 그 못지않게 밤을 사랑한다. 밤의 알싸한 향기와 밤에만 변할 수 있는 성정의 기지개까지도 반긴다. 모던 걸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지면 위로 경쾌히 뒷굽을 튕기며 살아야겠다. “끝없는 어둠의 솜이불 속에서 알몸으로!”




4. 야수를 광대로 만드는 방법 = 목민심서(牧民心書)


야수를 무력이나 주먹으로 다룰 수 있다거나 억누를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그것은 원시인들이 야수를 다룰 때 쓰는 방법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고 애용하는 방법은 그들이 사람에게 믿음을 갖도록 사랑의 힘으로, 따뜻한 정으로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조련사는 야수들의 신임을 얻고서야 조련을 시작할 수 있다. 첫 단계는 앉고 설 위치를 알려주는 일이고, 다음은 건너뛰는 법과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동물을 어떻게 훈련시킬 것인가? 야수 훈련법 중에서, 외국서커스단 지배인》


현대인들을 야수라고 지칭하는 것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권리를 가진 사람들을 폄하하는 언사일까? 점차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시각적인 것에 자극을 받고, 달콤한 다짐들에 짓눌려 승냥이처럼 집단적인 광대로 전락해 간다. 직접적으로 얻어낼 가치의 것들은 흔치가 않다. 상대방의 피 한 방울까지 뽑아내려면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읽고 긴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신임의 효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 야수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광대의 역할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광대에게 연민을 가져선 안 된다. 혹여, 야수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거나 자신과 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길들이기보다는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철저히 위아래의 구분을 두고 제 몫의 정당한 분배와 기능을 설교하면 된다. 사람들은 그런 간단한 것들엔 쉽게 반응한다. 순서와 진행으로 짜인 역할놀이에 자신도 모르게 적응하여 살아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임하는 조련사가 광대로서의 자아를 알려준다면 그들은 더욱 열광할 것이다. 서는 것만이 아니라 불타는 링으로 뛰기, 외나무다리 건너기도 거뜬히 해 낼 것이다.




5. 노라의 가출


입센의 《인형의 집》의 후기를 생각해보고 있다. 노라는 집을 떠나 행복했을까? 이런 질문은 상상을 불허한다. ‘행복했을까’의 기준은 시절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내가 노라라고 가정을 했다. 노라는 가출을 했고 아직도 방황을 하고 있다. 세상의 악한 것들이 그녀에겐 그리 악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계속 꿈을 꾸길 원하기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다. 건강할 때까지 즐겁게 일하고 몸이 허하는 대로 댄스홀에서 춤을 추며 쌈짓돈이 생기는 대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노라의 가출은 그렇게 실망스럽지 않았다. 살만 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彷徨, 魯迅] 魯迅纪念馆, SHANG HAI. 2007. 11.29. PHOTOGRAPH by CHRIS



6. 무언(無言)


누구를 경멸할 때, 말로써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경멸이 못 된다. 오직 침묵만이 최고의 경멸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도 다 쓸모없는 짓이다. 《나의 독(Mes Poisons),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


毒이 없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그러나 글로써 나타내는 독은 단지 小毒일 뿐, 최고의 경멸은 無言이다. 그것도 눈 깜짝하지 않는 채로의 무언. 독이 없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노신, 1919


말만큼 무거운 것이 있을까? 모두들 쉽게 내뱉지만, 그 안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쉽게 내뱉을 수 없다. 자동적으로 발설에 익숙해진 이들은 침묵하는 것도 어렵다.



[狂人日記, 魯迅] 魯迅纪念馆, SHANG HAI. 2007. 11.29. PHOTOGRAPH by CHRIS



7. 혁명, 혁명의 혁명, 혁명의 혁명의 혁명, 혁명의 혁명의 혁명의 혁명.


혁명가는 반혁명가에게 죽고 반혁명가는 혁명가에 죽는다고 탄식한다. 반으로 접혀야 반동이라는 소리를 듣는 시절에선 멀어진 것 같다. 혁명을 반복하면 아무런 의미조차 갖지 못하는 긴 문장이 한 줄 있을 뿐이다. 혁신과 복고,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신세대와 구세대. 대칭되는 말들보다 화합할 수 있는 단어의 나열이 좀 더 편안하게 보인다. 사랑과 평화, 별과 꿈.



[呐喊, 魯迅] 魯迅纪念馆, SHANG HAI. 2007. 11.29. PHOTOGRAPH by CHRIS


2006. 4. 10. MONDAY





[魯迅故居] SHANG HAI. 2007. 11.29. PHOTOGRAPH by CHRIS




밖으로 나온 나는 몇 년간 광인(狂人)처럼 써대던 일기를 잘 접어두었다. 갇혔을 때 썼던 글들은 갈무리해야 했다. 새로 시작해야 했기에 이전 목소리는 돌돌 감아두었다. 숨을 쉴수록, 풀어질수록 글에서 멀어졌다.


얼마의 얄팍한 기록들도 있긴 하지만, 노신기념관에서 반나절 넘게 보냈는데 그 기록은 없다. 나는 노신과 삶도 달랐고 성도 달랐고, 나라도 달랐고, 살던 시기도 달랐고, 환경도 달랐으나 무지하고 어리숙했던 주변들을 향해 내던 나의 목소리와도 비슷했던 글들에 공감했다. 시절만 변했을 뿐 인간의 몽매(蒙昧)는 닮아있었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매 한 가지였다. 방탈출게임을 끝낸 자는 더 이상 구속했던 방에 미련을 두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그저 사진 몇 장을 찍고 길바닥에 앉아 미래에 대한 구상들을 스케치하며 정착보다는 방황하고 외쳐보겠다는 다짐만 적어놓았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기본은 자신이다. 스스로 서 있어야 쓰러지는 남도 받쳐줄 수 있다. 그런데 그 무게가 과하면 기대는 자나 받치는 자나 모두 쓰러져버리기도 한다. 나는 한 번은 털어야 했고, 그다음에 힘을 길러서 다시 받치기로 했다. 무게는 예전보다 더해도, 지금에 와서 보니 털어낸 건 잘했다.




노신박물관과 고택을 둘러 보고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쉬고 있는데 길 고양이가 다리에 올라왔다.


- 야, 난 너 별로야.


근데 알아듣는 건지 마는 건지 고양이가 무릎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냥 피곤하기도 했고, 마침 좀 쌀쌀하기도 했다. 다리에 앉은 고양이의 몸체가 따뜻했다. 살아있는 온기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고양이와 멍청하게 길바닥에서 앉아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저물어갔다. 이제 일어나야 했다. 고양이도 꼬리를 말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 뒤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도 다시 길을 나섰다.




[A STRANGER and A STRAY CAT] SHANG HAI. 2007. 11. 29. PHOTO by CHRIS




일하러 밖으로 나가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다들 부러워하지만, 누구처럼 노는 것이 아닌, 나에겐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놀러 나가는 여행은 생활 속에서 시간 날 때 누려야 한다. 고인 것보다 움직이는 낫다. 그런데 이제는 노는 법도 잊어먹었다. 놀러 오라는 말을 듣고서 놀러 간다는 말을 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여행 갈 생각에 맛있는 거 먹고 멋있는 풍경 구경할 계획을 짜는,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을 보면 탄복한다. 살면서 다 하는 일인데 장소만 바꾸면 더 재미있는 건지 모르겠다. 출장도 잦다 보면 떠나는 것에 무감해진다. 비행기 밥도 귀찮다. 가끔 비행기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처리할 여러 가지가 번잡스러워서 그건 사양하고 싶다. 목소리도 안 쓰면 가라앉듯이, 글도 쓰다 보면 실제보다 더 가라앉는다.





2014. 3. 26. WED.


삶의 혁명이란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사랑과 평화, 별과 꿈. 

개인적 희망은 위대한 야망과는 멀리 떨어져있다.


Revolution in life begins with small things. 

Love and peace, stars and dreams. 

Personal hope is far removed from grand amb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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