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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26. 2024

COMPANION

애완, 반려, 동반, 동행

난 애완동물뿐만 아니라 애완식물도 싫어한다. 아니, '애완(愛玩)'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싫어한다. 요즘은 애완이라는 단어가 주는 희롱의 반감 때문에 '반려(伴侶)'로 말을 바꿔놨던데, 그게 그거다. 주변 사람 하나 제대로 못 챙기면서 자기의 감정을 쏟아붓게 동물과 식물을 챙긴다는 그런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정말 알쏭달쏭한 인간들이다. 아마 당신의 '반려'는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속으론 온갖 쌍욕을 할지도 모른다. 왜 집 안에 붙잡아놓는지, 왜 털들은 온갖 색으로 물들이는지, 짖으라고 있는 성대는 왜 떼는지, 내 자식 만들겠다는데 생식기는 왜 수술하는지, 인질들이 범죄자한테 포로로 붙잡힌 뒤 포획자의 변태적 성질에 맞춰가며 스스로 갇힌 이유를 정당화하다가 나중엔 피해자가 그 가해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스톡홀름 신드롬’처럼, 저 ‘반려’라는 인류학적 포장을 쓴 짐승들은 주인을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게 마음에서 우러난 진실인지 아닌지, 충심인지 아닌지는 판가름하기 어렵다.


자신의 감정적인 반려를 위해 생명의 고유한 형태를 파괴하는 습성은 단선적이며 이기적이다. 모든 사물은 자기만의 자리가 있다. 인간은 인간의 자리가 있고, 동물들은 동물들의 자리가 있다. 초등학교 때 서울로 오고 나서 아이들이 하나둘씩 개와 고양이들을 키우는 것을 봤다. 그래도 그때는 마당에 키웠으니까 별 말 안 했다. 초등학교 때 미친 진돗개한테 다리를 한번 세게 물린 뒤로 나는 ‘개’랑 상극이 되었다.




친구 집은 세 들어 살았다. 그 친구 집에 가려면 집주인의 마당을 거쳐가야 했다. 조그맣고 당당했던 나였지만, 내 덩치만 한 개가 나를 만만하게 봤는지 짖어대기 시작했다.


- 미친 새끼.


들릴락 말락 작게 소리 내곤 친구를 따라 벽에 바싹 붙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성질난 개가 쇠사슬을 거칠게 흔들어댔다.


"챙그랑!"


뚝, 무언가 불길하게 끊긴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검은 물체가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손으로 얼굴을 방어하다가 몸으로 뛰어드는 무게에 밀려 뒤로 넘어졌다. 다리는 대자로 펴지고 널브러진 다리에서 뼈까지 닿은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의 파고드는 감촉을 느끼며 순간 멍해졌다. 다리는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아픔보다는 저 개는 왜 무는 것인지, 저 미친 공격의 습성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개의 머리와 귀를 붙잡고 그 두상을 주먹으로 때렸다. 눈과 코, 머리를 힘껏 두드렸다. 그런데 미친놈이 악에 받치면 눈에 뵈는 게 없듯이 한번 무니까 뼈다귀 물듯 다리를 놓지 않았다. 겁에 질린 친구가 집주인을 부르러 달려 나갔다. 거의 개집까지 끌려가다시피 하다가, 어른들이 와서 개의 입을 억지로 벌린 뒤 다리를 빼냈다.


여러 군데 못 물게 머리를 집중적으로 때린 탓인지 왼쪽 종아리 한 곳만 뼈까지 드러날 정도로 파여 있었고, 거기서 피가 물밀듯이 흘러나왔다. 당황했던 개 주인은 개 이빨에 구멍이 뚫려 피가 나는 다리를 지혈한다고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잠시만. 우리 땐 다 이렇게 했단다. 금방 치료해 줄게."


먼저 바지를 가위로 잘라내고 드러난 상처를 보더니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 바지를 자른 가위로 개한테 다가가 개털을 잘랐다. 곧 라이터에 개털을 구워서 잘게 부순 뒤 된장에 섞어 상처에 얹어놨다. 엄청 따가웠는데 거기에 붕대를 감았다. 정말 피는 흐르지 않았다.


- 저 갈게요.

"부모님이 뭐라 하시면 어쩌냐?"

- 저도 모르겠어요. 여기 다시 올 수도 있어요.


망치로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말씀드리겠다고 하고선 절뚝거리며 문 밖을 나섰다. 뒤돌아 앉은 개는 개집에서 계속 으르렁거렸다. 불편한 다리를 움직이며 집으로 걷는 길에서 머릿속은 온통, 오늘도 일 벌였다고 혼나면 어떻게 하느냐가 걱정의 일 순위였다.


다행히 많이 아파 보이는 다리 덕분에 그리 많이 혼나진 않았다. 다만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한테 나이 든 사람들의 무식한 민간요법의 위험성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설교를 들어야 했다.


"다음부턴 말도 안 되는 어른들 소리는 듣지 말거라. 이게 뭐냐. 미친개에 주인도 미친놈일세."


대대적인 세척작업과 핀셋으로 털들을 긁어낸 후 긴급 봉합수술을 마쳤다. 파상풍 주사 두 대와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미친개한테 물리면 미칠 위험이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옛날엔 소송 같은 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인간 피맛을 본 개는 다시 피를 찾는 위험종자라 사살하기로 합의했다. 그 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

 



돌봐준다고 해도 동물들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상전이 되어 있으면 아주 짜증 날 것 같다. 그 미친 개새끼처럼 자기 밥줄로 알 것 같다. 끼니때마다 밥도 갖다 바쳐야 하고, 생리적 순간이 다가오면 치워줘야 하고, 정신적 자유를 위해 산책도 시켜줘야 하고, 외로워 보이면 달래줘야 하고, 졸리면 잠자리도 양보해 줘야 하고, 이 반려라는 단어를 곱씹다 보면 '반려자'라는 단어조차 긍정적인 연상을 불가하게 만든다. 사람을 대신해서 같이 살 '반려동식물'인데, 좋다고 온갖 잡다한 것으로 시중들고 치장하다가 싫증 난다고 내버리는 정신 나간 인간들처럼, 엉망진창 퇴짜 놓고 불수용하는 '반려(返戾)'의 단어가 강렬하게 떠오르면서 부정적 이미지가 돌출된다. 타인과의 거리나 생물의 감정은 차치하고, 온통 자기애로 점철된, 다 거부해버려야 할 것 같은 인간들의 포옹은 그 미친 개새끼의 달려듬과 같이 정말 숨이 막힌다.

  



대학교 일 학년 때였나 보다. 그때 생일이었는지 뭔 이유 때문인지 친구가 국화꽃 두 송이가 심어진 화분을 들고 왔다. 커피숍에서 친구가 선물해 준 화분을 보고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왜 마음에 안 들어?”

- 웬 꽃이냐?

“꽃 예쁘지 않냐?”

- 저걸 누가 키워?

“집에 놔두면 잘 클 거야. 너 생각나서 샀다. “

- 야. 이거 여기 놔두고 가도 되냐? 네가 키우려면 가져가고. 마음만 받을게.


그때 친구가 벌떡 일어나더니 매정하다며 욕을 했다. 다시는 안 본다면서 나가버렸다. 정말 우리는 육 개월은 안 봤다. 그녀는 우정보다는 사랑을 찾을 시기였다. 친구가 준 화분은 신촌의 한 커피숍 창문 턱에 두고 왔다. 친구의 마음이었다고 할지라도 키우기가 싫었다. 키울만한 여유가 없었고, 나는 누가 주는 선물을 내 취향과 맞지 않으면 받지 않았다. 그걸 돌려 말하는 법을 몰랐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삼시세끼 꼬박 챙겨줘야 하는 순간들을 함께 한다는 건 생활이다. 그런데 살아가는 하루에 감정과 의미가 들어가 있다면, 나의 정신을 온통 쏟아야 한다는 말과 같다. 난을 선물 받고 돌봐야 할 난초로 인해 어디 갈 수 없음에 고민했던 법정스님처럼, 그것이 고운 것이든 흉한 것이든, 가치 있든 아니든 간에 자립이나 성장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속적으로 돌봐주어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생명이 시작되면 그것의 개별적인 성장과 독립을 고민해야 한다. 스스로 커나가게 하지 않는 가둬둠과 보살핌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타인을 위한 진정한 애정이며 사랑일까?


요즘 주변과 어떻게 함께 성장할까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자립의 이전에는 성장이 주목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만 힘을 키운다고 될 일이 아닌 듯하다. 인생의 반려를 넘어 동반(同伴)을 만들어내려면, 더 나아가 상대 또한 스스로 걷는 동행(同行)을 만들려면, 하나만 성장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동행(同行)', 함께 가려는 사람들까지 바라보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같이 성장해서 지지하는 능력을 키워야겠다. 외면과 회피를 넘어서 반쪽의 인간들이 온 쪽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별 외의 이야기인데, 중국에선 반려(빤뤼: 伴侣)라는 단어가 커피메이트(카페빤뤼: 咖啡伴侣), 즉 프림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기호에 따라 프림은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하니까 머리를 돌게 하는 필수적인 커피와 같은 동급은 아니란 소리다. 프림만 타먹는 사람은 드물다.


좀 더 깊게 한자의 의미해석을 하자면 '반려'는 일생을 함께하는 소용녀와 양과처럼 깊은 애정을 가진 부부지간의 '반려자'에도 사용되고,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처럼 신뢰를 통해 일생의 업을 함께 하는 친우의 '반려관계' 사이에도 쓰인다. 다만, 이건 과거의 지시적 의미에 한정되어 있고 요즘 젊은 층에선 ‘반려’의 의미는 경시되는 분위기다. 앞서 말했던 프림처럼, 잠시 부드러움을 즐길 기호식품의 형태로, 지속보단 일회성 만남이나 돈 주고 관계를 맺는 속칭 상간자의 일시적이면서 유희적인 애인 같은 단어에 가볍게 쓰인다. 모든 것을 두리뭉실 모호하게 말히길 좋아하는 중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단어의 선택에서도 까다로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동반(同伴)도 우리가 생각하는 동반의 개념보단 더 일반적인 의미긴 한데 반려보단 성(性)적인 개념은 적은 편이다.


하여간 가끔 ‘반려동물’이란 단어를 들으면 연상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프림 동물’. 뭔가 싸하고 청소기로 비듬같이 퍼진 하얀 가루들을 대차게 털어내야만 할 것 같다. 차라리 커피면 커피, 차면 차, 단순한 게 좋다. 아님 둘의 조합도 나쁘진 않다. 차와 커피처럼.




[COFFEE AND TEA, MY COMPANION] 2024. 3. 26. PHOTO by CHRIS



'동반자', '친구', '동지'로 해석되는 'COMPANION'은 프랑스어 'COMPAGNON' '친구', '파트너', '벗'에서 유래했고, 후기 라틴어 'COMPANIONEM'이 나타내듯이 'COM'의 의미인 '함께'와 'PANIS'가 가리키는 '빵'을 조합하여 '빵 먹는 사람', '식사를 함께 하는 사람'을 뜻한다. 캠브리지 사전(CAMBRIDGE DICTIONARY)에는 COMPANION의미를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친구나 여행을 함께 하는 동료로 정하고 있다. 갈증을 없애주고 입이 궁금할 때 시간을 함께 한 커피와 차, 물과 보리차는 내 생명의 친구이자 동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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