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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23. 2024

BLADE RUNNER

한 사람의 눈물

집으로 들어서는 길에 관리실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접이 의자에 앉아 큰 소리로 소리를 쳤다.

 

"여기 봐! 칼 가져와. 칼 갈아줄게!"
- 네? 고맙습니다. 다음에요.


아저씨한테 됐다고 하고선 돌아서는데 요즘 가슴에 칼을 품고 사는지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웃으면서 뚱딴지 같이 칼 갈아준다는 얼굴이 너무 천진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한참 킬킬댔다.

방에 앉아 배가 고파서 칼자루를 쥐고 복숭아를 썰고 있는데 손을 잘못 놀려서 손을 베였다. 하얀 복숭아 살 위로 올려진 칼과 붉게 번져버린 피. 베어져 나간 살색 덩어리. 투명한 즙. 붙일 수 없는 조각이 시선을 어지럽혔다.


'잘린 조각을 붙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지? 내 것도 잘리고 저 조각도 잘렸는데? 실로 꿰맬까? 본드로 붙일까? 테이프로 감쌀까?' 


흐르는 피를 보면서 아픔도 느껴지지 않아서 별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왜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가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메스를 들고 복제를 꿈꾸는 사람들. 
칼이라는 도구 위에서 달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서 영원을 꿈꾸는 사람들. 
시간을 연장하고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들. 
우주를 믿지 않으면서 절대를 확신하는 사람들. 

가끔은 우주에 떠있는 꿈을 꾸는 데 행복한 기분만은 들지 않는다. 특히 과학의 힘으로 넓은 우주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건 그리 낭만적이진 않은 것 같다. 컴컴하게 조작된 공간 안에서 어떤 꿈을 펼칠 수 있을까. 같은 사람들 보기가 무료하니까 외계인을 찾아다니며 한바탕 우주 전쟁을 벌일까. 지구와 똑같은 쌍둥이 행성을 발견하고 거울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나를 만나러 가볼까. 속히 신이라고 말하는 존재가 만들어 논 공간에서 초원을 달리면서 터를 잡을까. 


정확하게 두 개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게 가능할지 생각해 본다. 머리카락, 비듬, 눈곱, 때, 각질, 코딱지, 귀지. 내가 사방에 쏘다니며 무심코 흘려대는 잔해들은 미치광이 수집광의 유리병에 포획되어 똑같은 형상으로 되살아 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나일까? 


사람들은 외형만 보고 내면도 그러하겠지 믿어버리는 자기 최면의 상태에서 산다. 과학자들은 생명의 비밀을 담은 정제된 수(數)와 수많은 유리병을 가지고 놀다 보니 신이 되려고 한다. 소우주를 만들고 복제 양, 복제 쥐, 복제 소, 복제고양이는 물론, 복제인간도 만들고 있다. 벌써 어느 실험실에서 복제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있을지 모르겠다. 

일란성쌍둥이를 다른 환경에서 키우면 생각이나 성격이나 친화력은 모두 다르다. 선천적으로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적인 소인을 무시할 순 없지만 커나가면서 환경적인 변화와 인간관계의 다양한 충격으로 인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머리와 감정을 가진 몸으로 성장하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의 추격을 받는 인조인간들은 성장을 하지 않는다. 사 년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지구라는 삭막한 도시를 배회한다. 껍데기만 성인이 된 몸에 시간도 없는 가짜의 기억으로 머리를 채우고 그것이 자신의 전부인 줄 알고 춤을 춰댈 뿐이다.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그는 어떤가? 높은 지도부에 의해 훈련된 권위를 갖고 있다. 인간들이 살 공간을 지키기 위해 기계들을 향해 정의롭게 총을 쏴 댄다. 만나지도 않은 사람에 대해 훤히 알고 있는 추격자에게는 생각이 없다. 감정도 없다. 기억에 대한 느낌도 없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언지도 모르고 인조인간에게 총을 겨누는데 과연 그도 사람일지 알 수 없다.

자신은 살고 남을 죽이는 것에 대한 고려 없이 
영원한 삶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기록적인 비밀의 문을 열었다는 희열로 똑같은 인간을 만들어내고 심장을 떼내고 가슴에 총을 쏘고 숨을 끊는 것. 영화에서 그리는 2019년까지 가지 않아도 수 천년 간 사람들의 본성에는 이런 비틀린 욕망이 자리했던 것 같다. 

'복제(HUMAN CLONE)'라는 단어에 다시 생각이 퍼져나간다. 나와 똑같은 형체가 있다. 발바닥을 한 칼에 베어버리는 날카로운 칼 위에서 달려야 하는 피와 심장들의 소리가 아프게도 시끄럽다. 메스를 권위처럼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유전자를 넣은 주사기의 용액은 지폐로 인식된다. 성격 원만하고 사회 적응력 뛰어나고 계급에 복종하는 우월한 인자만이 선택되고 시비 걸고 뚱딴지같고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씨앗부터 제거될 것이다.

하나로만 보는 삶은 인식의 세계에서 경계대상이다. 개성은 말살되고 오직 피부 껍데기로 대변되는 옷만이 패션이라고 추앙받으며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동조 아래 시커먼 공장의 굴뚝 연기 아래로 복제인간을 운반하는 생산라인은 쉬지 않고 돌아갈 것이다. 회색 빛 모호한 유혹의 선에서만 사람들이 살게 된다면, 그건 생의 찬란함을 타르 속까지 모두 제거해 버린 어느 이름 없는 아스팔트 도시와 다름없을 것이다.

세상은 삶의 전기력을 미친 듯이 쏟아붓고 헤집어 놓고 아무 거리낌 없이 다녀가는 곳이 아니다. 대체 장기용으로 만들어진 분신들은 과연 아프지 않을까? 증오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비애도 없고 생각도 없을까? 

내가 복제 인간으로 주체성을 보유한 사람이 아닌, 하나의 물건으로 놓여있다면 시간이 주는 육체적 늙음을 저주한 사람들로 인해 머리카락, 눈, 코, 입술, 손가락, 발가락, 귀, 장, 간, 폐, 심장, 콩팥, 팔, 다리 등을 하나씩 떼어주며 철저히 나를 잉태한 모든 것을 향해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그러면 의사들은 아프지 말라고 망각의 음료를 만들어 주입할 것이고 나는 아프지 않은 듯 눈을 뜨지만 뜯긴 몸뚱이를 보면서 그 처참한 광경에 정신을 놓아버릴 것이다. 눈 떠있는 자들이라면 심장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면 이런 비극 앞에 미치광이가 되어야 한다. 작은 씨앗 하나에도 눈이 달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피가 너무 많이 넘쳐흐르면 바닥에 엎드려 닦기 바쁜가 보다. 이 무감하고 발랄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블레이드 러너의 추격을 받고 블레이드 러너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기억도 점점 잊고 아픔에도 무감해져 가는 나. 블레이드 러너에서 정말 좋아했던 사람은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 잃었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죽었던 복제인간 로이(ROY)였다. 영원한 어둠 속으로 꺼져가면서 던진 말과 그의 눈물은 영화를 본 지도 아득하지만 돌 같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다.

 
"그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빗 속의 눈물처럼."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그는 인조인간도 블레이드 러너도 아닌 하나의 존재였다. 울지도 못했던 눈에 빗물을 안겨줬던 한 사람이었다. 


2004. 9. 3. FRIDAY




<블레이드 러너(BLANDE RUNNER)>의 배경이 되었던 2019년은 이미 오 년이란 시간을 훌쩍 지나가버렸다. 이 영화에 생각과 감정을 실어 하루를 적었던 시간에서도 이십 년이 흘렀다. 암울한 회색빛 디스토피아에서 그리던 몇 가지의 그림은 이미 현실에서 그려지고 있다. 산성비와 스모그는 살갗을 타들어갈 정도로 짙진 않지만 지구환경과 사람들의 심성은 이미 기울어진 추에 놓여 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필립 딕(Philip K. Dick)의 원작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에서 현상금 사냥꾼 릭 데커드(Rick M. Deckard)의 진짜 양을 향한 추적을 간단하게 플롯만 차용하여 완전 다른 이야기로 펼쳐낸다. 인간이 잠을 잘 때 양을 세듯이, 인조인간도 전기 양을 셀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든 기계든 꿈을 꿀 수 있는지에 대한 중의적 함의가 담겨있는 소설처럼, 영화에서도 누가 인간인지, 누가 기계인지, 어떤 것이 더 인간적인지, 어떤 것이 더 기계적인지 시간의 경험과 기억의 사유를 화면 안에 가득 심어놓고 있다. 


풍요롭고 냉정한 사회의 사냥의 목적은 생존이 아닌, 같은 종을 처단하고 새로운 질서를 새우기 위한 모종의 정치적인 지시에 따른 행위이며 구체적인 살해 대상은 감정이 없다고 단정된 안드로이드로 대체된다. 도시에서 비틀거리는 기억과 잔인한 살인의 경험을 농도 짙뿜어낸 영화를 되새기면, 현실에 놓인 인간의 사고와 꿈으로 대체된 비틀린 욕망이 얼마나 잔인한 지 몸서리친다. 


1982년 개봉된 블레이드 러너는 80년대 말이었는지, 90년대 초에 본 듯하다. 학창 시절, 소위 쿨하다는 것에 꽂힌 이후로 눈물도 없고 굉장히 무감했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뭔지 알 수 없는 심장의 두드림에 눈이 아팠다. 로이가 빗속에서 스러져가던 장면은 수십 번 돌려보았다. 죽음에 대해 항상 고민하던 안드로이드가 생각 없이 목표물에 삶의 총구를 겨누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느껴졌다. 하얗게 고개 숙인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물만이 인간들이 내버린 온기를 담아 내렸다. 지글거리는 화면 앞으로 짙게 쏟아낸 한 줄기 눈물은 그에게 바치는 나만의 위로였다.




[THE TEARS OF A HUMAN] Unknown Photo Remake Version. 2024. 3. 23. PROCREATE IPAD. DRAWING by CHRIS




모든 순간은 시간에서 빛을 잃는다. 인간은 한 점의 별빛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주에서는 시간이 멈추기도 하고, 앞으로 가기도 하고, 거꾸로 가기도 한다는데, 그렇다면 빛은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을까?

2013. 6. 14. SATU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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