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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28. 2024

BLUEPRINT

디자이너 청사진, BLUE NOTE SNAP SHOTS

수많은 직업군에서 '디자이너(DESIGNER)'라는 직함은 무엇인가를 창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만 디자이너는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이 상업과 결탁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판매를 염두에 두지 않고 순수하게 창조만 해내는 일반 화가보다는 창조의 순수함에서 멀어 보인다.   


오늘 아침 신문 사설에서 조승연은 디자이너의 의미에 대해 구술하고 있었다. 디자이너(Designer)는 표시(Sign)하는 사람을 뜻한다.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스콰르치오네(Francesco Squarcione)가 가구점을 운영할 때 가구의 모양, 색상, 재질을 그림으로만 '표시'하고 하도급 기술자들에게 제작하도록 지시했던 데서 그의 가구설계도를 'Design'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스콰르치오네의 제자 만테냐(Andrea Mantegna)가 가구뿐 아니라 사치품을 디자인해서 사회적 성공을 거두자 직접 물건을 만들지 않고 물건의 핵심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그려내는 직업이 생겼고, 이들을 디자이너(Designer)라고 불렀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서 조금 더 나아가 언어학적으로 디자인의 기원을 살펴보니 '라틴어인 Designare는 De-Sign- 기호의 재구성이라는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디자인이라는 어원이 생겨난 시간은 인류가 손으로 그리고 만드는 것에 집중했던 시간들과 비교해서 그다지 길지 않은 역사를 보여준다. 구석기시대부터 부족한 생활의 편리를 직접 도구로 만들고 하릴없이 노는 날엔 동굴벽에 경계할 동물을 그려냈던 인류의 충동적인 표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자의 형태로 발현되어 있다.


라틴어로 팍티오(Factio)에서 기원하여 진행되는 패션(Fashion)은 '만드는 행위'나 '활동'을 지칭한다. 패션 디자이너(Fashion Designer)는 물건의 아이디어를 유행 풍조에 맞게 인간의 몸 위로 구체화시키는 실천적 행위자라고 지칭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기호로 형상화시키고, 그림으로 도식화하여 세상에 내놓은 디자이너들은 인간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을 거듭해야 한다. 신체만으로 구속되는 것이 싫어서 패션만으로 창조가치를 판단하길 거부해 왔지만, 열기로 가득 찬 거리를, 벌거벗고서 생활하기엔 불편해진 사회성이 내 안의 동물적 감각을 버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게 가슴을 열광시킬 그림을 그리고 싶다.


2013. 6. 8. SATURDAY




난 삶을 담은 패션을 그리고 싶었다. 도나 카란의 2003년 시즌 이미지 샷을 보면 사막 여행을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한 여성을 모티브로 삼아 패션을 전개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그와도 비슷한 유형이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였다고 주장하고 싶다. 막을 논 이 시점에 그게 뭔 의미일까. 하여간 막대한 브랜드와 대적할 만한 자금이 없는 와중에도 더 포괄적이고 광활한 계획이었다. 


같이 패션을 공부하던 동갑내기 친구와 패션 작품에 적용할 간단한 시놉시스를 썼다. 같은 전갈자리였던 우리는 각자가 사랑하는 이미지를 설정하여 두 여자의 이야기를 담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이미지 전개와 설치, 옷 제작, 전시까지 직접 기획하고 만들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순수미술을 잠시 중단하고 패션에 둥지를 틀었던 그 친구와 온갖 잡다한 영상과 이야기를 떨치고 낯선 곳에 숨구멍을 열었던 나. 우리들은 솔직히 패션을 하면서도 무리의 이탈자처럼 아주 기본적인 패션의 개념조차 납득하지 못하던 부류였다. 조금은 열성을 보일 때도 있었는데 대부분 의문을 가지고 덤벼 들었다. 


'옷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 것이냐? 이미지로 제한된 구획과 신체적 제약은 너무 갑갑하다. 껍질 벗기기도 없는 겉치장은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마지막 발악으로 마음을 다잡고 이미지는 살리되, 만들고 짜깁고 잘라낼 공간을 다양하게 확보해 보자는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온 삶을 그리는 시도를 하려 했다. 잠도 포기하고 눈을 반짝였던 며칠이 지나갔다. 그런데 일이 생겼다. 단순히 심적 변화만은 아닐 것이다. 서로에게 닥쳤던 삶의 기로에서 나도 묻지 않았고 그녀도 묻지 않았지만 각자에겐 이상한 일이 몰아닥치고 있었다. 결국 이 기획은 포기하기가 좀 아쉬웠기에 그냥 나만의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그것도 진력을 다하지 못한 채 서둘러 끝내 버리게 되었다. 


반쪽이 되어버리는 건 아쉬운 우리의 인생인 듯싶다. 나도 언젠가 의문사만 가득한 이곳에서 마음을 펼칠 수 있으리라 싶었는데 기약이 없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아쉬움의 한 조각을 흘리고 싶다. 다 쓰기도 뭐해서 기억나는 조금만 뱉는다.


2004. 11. 2. TUESDAY





패션디자인은 무엇하나 확정되지 않는 삶에서 기호가 들끓었던 시절에 선택했던 표현수단이었다. 한번 멈추었다가 일차적인 정리가 끝난 뒤에 다시 하게 됐다. 내가 선택했던 상업적 표현수단 중에서 가장 빨리 돈벌이와 맞닿았던 것이 패션이긴 했다.


원하는 대로 없으면 배우고 싶은 것만은 마음껏 배워보자는 생각이 마음 구석에 있었다. 뭐든 배운 뒤 바로 돈을 벌면 되니까 먹고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사랑했던 영화를 다시 하기엔 솔직히 비용이 너무 들었고, 미련 없이 돈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때 하기로 미뤄두었다. 공동작업은 남한테 비유도 맞춰줘야 하는데 한 고집하기 때문에 식대로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같다. 사진은 스튜디오가 정리되고 나면 다시 작업하려고 한다. 


가끔 사람들이 패션디자인을 왜 하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거짓으로 얼버무리기엔 직설적인 성격이 허락하지 않는다. 더불어 패션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완전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커피 좋아한다고 커피전문점을 차려서 후회했던 것과 같다고 해야 할지 난감하다. 부모님들이 파슨스와 마랑고니, 세인트 마틴이나 런던 칼리지 나온 아이들이 어떻게 진로를 정해야 되냐고 자문을 구할 때도 할 말이 없다. 사실 좋은 교육을 받으면 자기 것을 해야 한다. 일단 만드는 작업은 남이 구획지은 공간에선 답이 없다. 자기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신을 잘 갈아 마신 후 일용할 월급과 맞바꿀 준비를 해야 한다. 편한 것을 원하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정말 모 아니면 도다. 다만, 자기 것을 차리면 스스로 브랜드를 만들고 독불장군처럼 밀고 나가야 하는데 흔들리는 세상에서 그것도 쉽지 않다. 

 

나는 옷을 너무 좋아해서 매일 갈아입는 성향의 인간도 아니고, 섬세하게 람을 터치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신체에 구속되는 껍질을 만드는 것이 묶여있었던 그 어느 날의 기억과도 같아서 미치광이처럼 벌거벗고 싶다. 그러나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가려야 한다는 것도 동의한다. 가끔 사람들이 재능 있다고 이야기하면 어색하다. 그들에게 구매욕을 당길 천재성을 제시해야 하는데, 나는 예술적인 인간이라기보다 이성적인 인간에 가깝다. 어떤 면에서 나는 전력을 다해서 만들기보단 그냥 하루를 전력을 다해서 살았다. 그래서 삶에 의미를 많이 두는 듯하다. 언젠가 내 삶이 예술이 되길 바라며, 잡음 속에서 조용해지고 싶다. 





BLUE NOTE SNAP SHOTS

- STORY OF US - 


사막에서 태어난 바람의 아이
바다에서 태어난 포말의 아이
사막의 거친 흙먼지와 

바다의 일렁이는 파도를 사랑한 그녀들.
가까이 있는 것은 그리움을 걷어가 버리듯 
숨 쉴 공기를 찾아 도시로 흘러간다.

네온의 열기가 가득한 회색 빛 도시
새 삶에 대한 희망과 꿈을 안고 간 그곳엔 
두 팔 벌려 몸을 감싸는 거친 바람도 없었고
눈가에 끝없는 희망을 그려냈던 수평선도 없었다. 
우울한 생의 연주와 

술 취한 거리의 향수와 

마음을 부르는 읊조림뿐 

스스로의 가슴속에 한가득 상처를 내고 

자괴감에 지친 방황의 시간 속에서
두고 온 그리움을 찾아 나선다.
허물어 가는 낡은 건물 옥상으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긴 그녀들.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한 도시를 바라보며
얼굴을 스치는 바람 사이로 마주치게 되는데…






[LOST STARS : SOMEDAY. SEARCHING FOR MEANING] 2005. 3. 19. PHOTOGRAPH by CHRIS



2013. 6. 8. SAT.

디자인을 하다보면 디자인의 본질에 대해 묻게 되는 순간이 있다. 자신만의 디자인철학이 구체적인 디자인으로 표현되고 결과물이 사회에서 환영을 받게 된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생산적 상상력과 유형적 생산물의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인 사이클은 중간창조자의 역할을 무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의 표시와 창조 없이도 만들어지는 자존적 기계시대가 멀지 않았다.


As I delve into design, there come moments when I question the essence of design. It's a moment where my personal design philosophy is concretely expressed through design and when the outcome is welcomed by society. Yet, the repetitive cycle of productive imagination and the creation and extinction of typified products can also unsettle the role of the intermediary creator. We're not far from an age of autonomous machinery where creation and expression by humans might become obso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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