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Mar 29. 2024

POSSESSIONS

Julia Kristeva, Possessions, 소유라는 악마

[POSSESSIONS AND LOVE, INSEPARABLE RELATIONSHIP] 2024. 3. 29. PROCREATE IPAD. DRAWING by CHRIS



소유(所有)란 우주를 흡수하고 당신을 그 안이든 그 밖이든 아무런 상관없이 다시 빨아들이는 유일한 사랑이다. 더 이상 <당신>은 없다. 소유라는 혼령에 홀리면, 당신은 권력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 앞에서 무너져버린다.  《포세시옹 Possessions, 줄리아 크리스테바 Julia Kristeva



글로리아,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운명을 발견할 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언어적 분신을 상기한다. 육체라는 구조를 분해시키는 표현대리 격의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면서도 이 마음 하나도 제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절망이다. 인간의 본능적인 충동을 사회라는 문화적인 충돌 속에서 해부하는 시도를 감행하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온갖 가변성으로 무장된 프렌치적이고 전형적인 추리형식을 따른다. 그리 커다란 감동을 부르지 않는다. 머리가 삭제된 한 토막의 고깃덩어리로부터 부상하는 자유연상이 철학, 문학, 미술, 음악 등 전문적인 영역의 틀을 넘나들면서 종횡무진 활약할 뿐이다.


참수를 이끌어내는 화가의 눈은 유디트의 서(序)(Book of Judith)를, 가시적인 세계의 종착을 애도하는 조각가의 손은 머리가 날아간 몽상으로 길 걷는 벌거벗은 남자를, 우아하고 나른하게 춤추는 발레리나의 머리를, 여자들이 꾸는 꿈 중에서 1/10이 잘린 머리에 관한 것이라는 정신분석학회 통계치를, 증오라는 격렬한 감정을, 권태의 귀족적인 속성을,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그 안의 블로크와 사를 스완을, 로마의 정치가 Caton(Marcus Porcius Cato Uticensi)을,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를 껍데기 채로 꺼낸다.


투명한 적대감까지 온갖 기교로 마무리한 24시간의 정신적인 사우나를 마치면, 느릿하게 굴러가는 작업인 미술보다는 감각적 반사를 즉각 이끌어내는 음악을 들으면서 철학적인 이익을 챙기는 것이 좀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불안이나 광기, 소외를 숨기고 사는 현대인을 해체하는 나이프가 목만 덜렁 자르고, 그 안에서 구더기처럼 쏟아진 부패한 지식의 화합물을 차지게 밀반죽한 결과가 바로 소설이라면 그런 작품은 싸게 널렸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단순히 희극으로 치부하기에는 분리된 머리와 몸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언젠가 오물이 가득한 내 머리통도 파란 비닐에 싸서 음침한 주택가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말리라! 흐릿해진 무채색 꿈은 인간의 머리통이 정육점 고기처럼 다져지면 닭고기, 돼지고기와 더는 구별이 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도구로 변해간다. 갈린 신음이 무릎 위에 흥건하게 펼쳐지고 있다. 자기에 대한 인식은 타인에게 접근하지 못할 정도의 두려움을 부른다. 무의식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은 내가 걷는 자리마다 대상성 자폐증으로 포진해 있고 보편적인 무관심 속에 논증이 필요한 코드, 관습, 협약, 형상, 이미지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범죄를 겪은 사람은 타락해 가면서 저항한다.


저항의 물살은 거세지만 보이지 않는다.

왜? 머리통이 사라졌으니까.

몸은 너무 아름다워도 얹어질 머리통이 없으니까.


상징 없이 규격화된 상자가 걸어 다니는 세계는 정신을 잃어버린 육체이며 꿈을 잃어버린 현실이다. 범죄가 한 알의 사과라면 사과가 떨어지고 난 자리에 반드시 사과냄새가 뿜어져야겠지만 씨를 뿌리고 씨를 거두기는 단순히 중력법칙이 관장하는 궤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모호하고 불완전한 행위는 즉, 실존인 것이며, 여자의 내벽을 관통하는 남자의 성기와 ‘그 사람’의 축약으로 존재하는 한 사람의 넓이가 긴밀한 사이가 아님을 말해주는 증거로 변용된다. "목에서 피가 나오면 너무 늦었다"는 말이 웃겼다. 어쩌면 매일을 괴로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목에선 피는 나는데 숨이 끊어질 정도로 덜렁 잘리지 않았다는 게 섬뜩하다.


우연과 필연의 교차점에서 형이상학적인 논거 없이 수사적인 관찰 없이 아무렇게 재미를 찾아본다. "웃음은 눈물보다 더 낫다. 웃음은 인간에게 고유하기에"라는 라블레(François Rabelais)의 말은 세월의 역정보다 유익하다.


"즐거움의 은밀한 축적은 운명이 여유와 동의어임을 상상케 한다. 프랑스에선 풍자극으로 빠져들지 않는 한, 추리소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크리스테바 스스로, 자신의 소설이 추리극과 풍자의 경계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녀가 쌓아왔던 지식을 마를리 카페의 테라스에서 페리에 한 잔 마시는 동안 음미하기엔 시간이 짧은 것 같다. 글쓰기에서 대형사건은 죽음이고 이는 사는 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비논리적이지만 나는 언제나 색다른 죽음을 상상한다. 가련한 얼굴로 누군가를 잡아매지 않고 불멸의 강박까지 한달음에 건너뛰는 그런 비소유의 지평을 건넌다.


2005. 7. 9. SAT.




문학적인 상상은 대상에 대해 분노가 클 때 타인을 살해하는 감정을 끌어오지 않고도 냉정하게 사건을 분석하도록 만든다. 살면서 물론 생각이 건전해야겠지만, 역한 상상을 행위로 실행하지 않고 풍자로 몰아갈 수 있는 분노라면 그 또한 정신의 본질까지 찬 바닥에 뒹굴게 하지는 않는다.


추리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살인자를 뒤좇는 감각적인 스릴 함께, 숨겨진 장치들 속에서 시들은 머리를 다시 한번 흔들게 하기 때문이다. 흡사 셜록이나 푸아로, 제인 마플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불러일으킨다. 기분이 안 좋을 땐 이해가 불가한 책을 읽거나 추리소설을 읽으면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다.


기호학자들의 글 중에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처럼 논리적이고 타이트한 서술적 취향은 시간을 때우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역시 정신분석학과 기호학을 섬세하고 위트 있게 표현한 줄리아 크리스테바도 충분히 상징적 세계에 대한 해석을 자유롭게 감상하도록 감각적인 장치들을 늘어놓는다. 


난 소유라는 욕구에 대해 동의보단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소유(所有)를 사랑으로 이해하기엔 오히려 그 움켜쥐는 방향성이 탐욕과 일치한다고 본다. 소유의 욕구(欲求)는 답답하다. 그물망도 넓고 파괴적이다. 실천적 이성의 형태로 보았을 때 소유하지 못할 땐 질투의 형태로 감정이 분사될 수도 있다. 만약 소유를 넘어서려면 발산자와 수취자 모두 감정이 같은 방향이어야 한다.


소유가 당신의 유일한 사랑이라면 거부하겠다. 그건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혼령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것이나 다름없기에.





2013. 7. 16 TUESDAY

글이나 그림, 영화를 보면서 카피캣 효과(Copycat effect)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스스로 타인을 살해하거나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 없는 경우에 대리 격의 창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실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간접적인 충격만으로 훌륭하게 생을 종결시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잔인한 범죄의 발아뿐만 아니라 범죄 자체에 대한 환상은 생각 있는 대가리가 잘려나간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외부적 자극 이외에는 스스로를 자극시킬 동력을 잃어버린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When reading a book, viewing artwork, or watching a movie, I often ponder the Copycat effect. While some individuals may achieve catharsis through proxy channels by taking the lives of others or ending their own lives when they cannot do so directly, how many actually manage to terminate their existence excellently with only indirect shocks? The inception of cruel crimes and fantasies about crime itself pose societal issues, indicating a society where thoughtful minds have been severed. Furthermore, apart from external stimuli, it also becomes an individual problem when one loses the impetus to stimulate oneself.




작가의 이전글 BLUEPRIN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