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Apr 09. 2024

EVERY LINE MEANS SOMETHING

JEAN MICHEL BASQUIAT, 어떤 의미

[JEAN MICHEL BASQUIAT] 1996. PHOTOSHOP COLLAGES by CHRIS


살면서는 무명(無名)이고 죽어서는 유명(有名)이다. 이 세상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운명일까. 누가 목숨을 부지할 땐 가난하게 살다가, 죽고 나서 대단한 인물로 보이고 싶어 할까. 아, 무명 씨! 그럼 이건 어떠한가? 살면서는 무명(無命)이었으나, 죽어서는 유명(有命)이었다. 죽어서 값진 것이 천재라는 이름의 운명이라면 그는 분명 초라한 화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고자 하는 길과 반대의 레일을 감고 있지 않은가. 무명의 유일한 장점이란 그가 정말 천재라면 무한히 발전할 기회가 널려있다는 것이다. 정체와 비교가 가득한 무도회장에서 벗어나 고통에 민감해지면 민감한 대로, 편하면 편한 대로, 샘솟는 오물단지는 놀라운 창작의 성수(聖水)가 된다.


어쨌든 누군가의 앞머리에 붙는 ‘천재’라는 호칭은 ‘천치’보다 재미없는 명칭이다. 약간 똑똑하거나 조금 튀는 인형 같다. 결국엔 깨끗하게 닦여진 전시장용 조각 같은 존재가 되는 범상한 천재는 평범한 인간을 돌판지에 밟아가면서 천치의 선반 위로 올라선다. 평범한 극치를 달리던 살리에리(Antonio Salieri), 그의 미움을 받았던 오만 방자한 아마데우스(Wolfgang Amadeus Mozart)처럼 말이다.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그런 면에서 예외이다. 걷는 폼이 아는 후배를 떠올리게 하는 문어다리 포즈. 하늘에서 서핑을 타는 게 꿈이던 아이. 무리한 동풍의 고발처럼 신의 대안책이고 싶었던 남자. 그는 짧게 유명해졌고 빨리 죽었다. 누군가의 미움을 받기에는 달을 자주 쳐다보며 하얀 풍선을 불었다. 바스키아의 그림을 잡지에서 처음 봤을 때 피식 웃었다. 개구쟁이 손가락 장난처럼 기발한 그래피티(Graffiti). 인간의 노예가 되지 않았지만 마약의 노예가 된 건 아쉽게도 빈민의 소리를 텁텁하게 하였다.


유명(有名)이란 시장(Market)을 필요로 한다. 물건처럼 사고파는 재능 속에서 끊임없이 짜내야 하는 강박감은 해맑은 사람을 즐겨 쓰는 물감 신세로 전락시킨다. 고급화를 표방하는 주류 문화 속에서 빈민의 본능은 얼마나 보호될 수 있을까? 바스키아의 원초성이라 지적되는 거리에 불어버린 낙서들은 정갈함이 없이도 생생한 충돌을 가지고 오기에 사랑스럽다. 해골조차 무섭지 않은 슬픈 억눌림. 데낄라 공장에서 시를 쓰고 음악을 연주하고 싶은 크리올(Criole), 그는 그림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도시에서 유익한 대화란 검은 스파게티 몇 올과 몇 점의 그림뿐이다. 그도 섬이라는 도피처에서 환상을 실현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야자수 잎으로 몸을 가리고 노오란 오리인형을 물에 띄우며 자신은 요술에 걸린 왕자라 믿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제도에 적응하여 유명세를 떨치는 것은 대중이라는 불특정한 고기밥에게 충실하는 어부역할을 강요한다. 낚을 것은 나의 꿈이지만 건질 게 없으면 실망하는 것은 대중의 속성일까? 나를 내주고 뼈만 남은 건 누구일까? 명성을 확인시키는 거머리처럼 성가시게 달라붙는 풍선껌이 되었다가, 독을 품은 변덕스러운 상어도 되었다가, 흩어지면 거품같이 맥을 못 추는 신통치 않은 마법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어느새 훈풍이 시루떡처럼 쪄가고 있다. 차갑게 식었던 날들은 열렬히 더워지고 마우이(MAUI) 해변 태양에 버터처럼 녹고 싶은 충동이 샘솟는다. 달콤한 망고주스를 대롱으로 빨면서 해먹에 몸을 태우며 끈적하고 흥겨운 노래에 취하고 싶다. 그럴 때 보는 풍경은 바스키아 그림처럼 재미있지 않을까?


'도시의 어둠은 사라지고 기쁨만 남았네.'


가버린 사람 뒤로 새로운 이들이 줄지어 서 있지만, 빛바랜 꿈은 회색도시에서 여전히 바스러진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는 이렇게 말했다.  


"Every line means something."


나의 낙서가, 나의 한숨이, 나의 노래가 그의 말처럼 어떤 의미로 남으려면 먼저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2005. 4. 14. THURSDAY




한번 크게 데고 나면 불을 멀리하거나 불 앞에서 조심하게 되듯이, 지울 수 없는 흔적처럼 내 삶에 커다랗게 데고 말았다. 상처는 가릴 수 없도록 검붉게 남았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버려서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지만, 그 자국들을 볼 때마다 과거로 흐르는 기억을 막기는 어렵다.


한바탕 유명해지거나 부유하게 잘 사는 것이나 남 보기에 멋지게 사는 것보다는 그냥 현재 살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삶이라는 고리에서 존재가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라도 더 알고 싶고 한 명이라도 더 만나고 싶고 한 곳이라도 더 가고 싶었던 그날들이 꽁꽁 묶이다 보니, 하릴없이 삶의 의미에 대해 묻게 되었다. 어렸을 때 무엇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항상 배움이 그러했듯이 또한 주변의 속삭임이 그러했듯이 잘 사는 것이 최고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남들이 그렇다 해서 동조는 하지 않았으나 습관처럼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반발 또한 하진 않았다.


한 자리에서 덩그러니 앉아서 자신에 대해 묻게 되면 많은 비밀을 듣게 된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표면적인 가치는 정말 어떤 의미도 아니라는 것이다. 살아있고, 살아가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 내 존재의 의무이자 이유이며 인생에서 제일 가치 있는 것이다.


바스키아도 마음의 선을 따라가며 흥겹게 그림을 잘 그렸는데, 껄렁함이 도를 지나쳐서 삐딱선을 탔던 게 분명하다. 아니면 갑자기 더워진 세상의 늦봄을 탔을까? 아무렇게나 뻗친 레게머리처럼 광란이란 여름의 유명을 탔을지도 모른다. 두 계절만 보내고 죽으면 재미없다. 가을과 겨울까지 천수를 잘 누리고 무명이어도 상관없으니 전설이 되어 이 세상 지켜보고 가야겠다. 예전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른 점은 얼마나 멀리 보느냐는 것이다. 끝이 있으면 어떠한가. 슬픔도, 아픔도, 괴로움도, 기쁨도, 이 모든 것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Every season means something.

That is Life.   





2013. 5. 31. FRIDAY


언제나 그랬듯,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이야기 그림을 틀었다. 영상이 꺼지면 머릿속에서는 한 편의 새로운 영화가 다시 돌아갔다. 나만의 이야기가 그렇게 흘렀다. 바스키아의 그래피티 모사작과 같은 작품들이 어둠 속에 많이 묻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목격하게 되는 창작은 각도를 틀어 말하자면 '재발견된 창조'의 다른 말일 것이다. 울분이 걷힌 뒤 예전에 적었던 글들을 보니 정말 내가 쓴 글이 맞나 싶다.


참나, 이렇게 화창한 날에 멜랑꼴리(Melancholy)라니!


작가의 이전글 VA SAVOI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