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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13. 2024

LE DIABLE AU CORPS

육체의 악마, Promise of that day

[THE DEVIL IN THE FLESH : Le Diable au corps] MOVIE POSTER. 2004. 10. 05.



나는 내가 어서 강해져서 사랑 따위는 필요치 않고, 그 어떤 욕망도 희생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랐다.

나는 굴종을 위한 굴종이라면,

자신의 마음에 의해 노예가 되는 것이
스스로의 의식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낫다는 점을 모르고 있었다.

불행은 결코 수긍되는 법이 없다.

오직 행복만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사랑이 에고이즘의 가장 강렬한 형태라는 말이 아마도 옳으리라.

죽을 뻔한 사람은 자신이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침내 죽음이 그 앞에 나타나는 날,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건 그게 아닌걸." 죽으면서 그는 그렇게 말한다.

육체의 악마 Le Diable au Corps, 레몽 라디게 Raymond Radiguet


지나친 음주와 방탕한 생활을 통해 말하는 레몽 라디게의 이야기는 가끔 내 속의 말과 비슷하다. 스무 살. 난 누군가의 스무 살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기학적인 오기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 하더라도, 차가운 비정함이 심장을 얼려버린다고 해도. 라디게가 세상을 등진 스무 살은 내 고통이 시작된 스무 살이다. 정확히 사 년 전 징후가 있었다. 열여섯. 난 시작도 하지 못했고 그들의 이야기에 나를 묻어야 했다. 한순간 그물이 되었다. 꼭 라디게(Raymond Radiguet)육체의 악마 Le Diable au Corps》, 이 소설처럼. 흡사 파스빈더(Rainer Werner Maria Fassbinder)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Die Ehe der Maria Braun>, 그 영화처럼.


전쟁이 시작되고 남편은 떠났다. 여인은 남편을 기다린다. 병든 살들에 기름을 부어가면서. 잠시 종전이 되었는가. 스산한 거리에서 사람들은 즐겁게 깃발 흔들며 휴전소식을 반긴다. 어느 오래된 병원에서 흰 옷을 입은 외로운 한 여인에겐 열여섯 사춘기 소년이 다가온다. 검은 피를 닦으며 아픈 그녀가 간호해야 할 가슴은 뜨겁게 소년을 어루만지는 손이 된다. 젊음을 만지며 차가운 땅에 묻혀버린 오래되고 낡은 영혼을 그리는 거야. 그와의 결혼도. 사랑이란 무슨 의미이던가. 미성숙하고 질투만 가득한 아이와 그녀. 이제 이별을 꿈꾼다. 하지만 이내 그를 보고 싶어 한다. 깨져 버린 조각난 화병에서 지나버린 이들을 발견한다. 그래. 절망을 지운 격정의 사랑에서 그 여자는 생명을 밴다. 떠나가 버린 사랑을 품는다. 그리고 그 아이의 생일날, 사랑이 태어난 날에 여인은 죽는다. 사랑을 전하고 생을 버린다.


비틀린 사랑 뒤엔 무엇이 남을 수 있단 말인가. 너의 죽음이나 나의 파괴된 생명밖에는. 희망 없는 혼동에서 서로를 구하는 건 아름다운 절망에 사로 잡힌 연인들 밖에 없는가. 그래서 나는 눈을 감는다. 마음은 열어도 눈은 감는다. 그렇게 갈라진 모습들을 지운다.


2004. 10. 5. TUESDAY.  04:47




<Fleeting Life : Fate and Path>


인생은 변화할 수 없는 것이고
한번 선택한 행로는 끝까지 따라야 한다.
하지만 운명은
네가 구제될 수 없다고 말을 하는 그때,
가장 큰 절망의 꼭대기에 도달하는 그때,
재빠른 돌풍이 다가와 모든 것을 변화시켜 버리고
그 순간부터 새로운 삶을 사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2004. 10. 5. TUESDAY.  03: 05






사는 의미에 대해서 밤마다 되뇌었나 보다. 한 순간 절망적이었다가 심정이 변화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다녔다. 살아야 했다. 같은 날에 썼었다. 새벽 세 시, 새벽 네 시 반. 잠도 안 왔다. 모두가 쉬고 잠드는 밤은 그래도 방해받지 않고 나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운명? 꺼져버리라 그래.'


수긍할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두 바다로 빠질 수 없었다. 수습할 사람이 필요했다. 몸은 움직이는데, 머리 한쪽에서는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그랬다. 생각과 달리 희망적인 이야기를 썼다가 머릿속에서 언젠가 보았던 절망적인 테이프의 이야기를 적었다.


같은 나이긴 한데, 한참 문장을 들여다보고서 해석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미쳐있을 때도 있었고, 울고 있을 때도 있었고, 심각하거나 즐거워하기도 했다. 답답함이 터져 나왔을 때 거의 한 달은 안 잤던 것 같다. 하루종일 머리에서 말이 터져 나왔다. 자잘하고 커다랗고 터져버릴 소리들에 잠이 안 왔다. 낮에는 하루종일 걸었고 밤에는 머리를 썼다. 심장도 함께 뛰었나 보다. 내 안의 악마도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그건 이미 나를 떠난 나였으니까 말이다.


돌풍이 다가와서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줄 알았다. 그 시간이 참 길었고 어서 오지 않아서 실망하기도 했다. 발을 한 발짝 떼고서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았을 때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알겠다. 나를 적어대면서 나를 다시 보면서 그날의 나와 만나면서 잘 견디었다고 토닥이는 지금의 내가 있었음을.



우리 살아남자고 약속했었잖아.

지켜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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