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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27. 2024

GEEK's MIND

생의 의미: 정이란 무엇이기에! 情是何物?

[问世间情是何物,直教生死相许] 2024. 4. 23. PROCREATE. IPAD-PRO. DRAWING by CHRIS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사를 가름하느뇨?

천지간을 나는 두 마리 새야,

너희들은 얼마나 많은 여름과 겨울을 함께 맞이했는가?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 가운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여인이 있어.

임께서 응답해 주셔야지,

아득한 만 리에 구름 가득하고,

온 산에 저녁 눈 내릴 때,

한 마리 외로운 새가 누구를 찾아 날아갈지를?


 영웅문 英雄門 제2부, 신조협려 神雕侠侣》 중 이막수의 노래가사 중에서



괴짜의 시선 : 비폭력은 가능한 것인가?


괴짜(Geek)와 얼간이(Nerd)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좋지 않다. 그래도 돈 버는 괴짜는 나쁜 편은 아니다. 일론 머스크(Elon Reeve Musk)를 봐도 완전 제정신은 아니지만, 추종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마블 코믹스(Marvel Comics) 영화 <아이언맨 Iron Man>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Anthony Edward Stark)의 실존 모델로서 세계적인 기업가이자 공학자로 어느새 신격화되어 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와 비트코인 지수가 요동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으면 괴벽도 커버가 된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얄짤없이 꽝이다. 미친놈, 그 자체인 것이다.


얼간이는 돈을 벌어도 어처구니없게 멍청해 보인다. 괴짜들은 '니 똥 굵다'던지 '그래, 너 참 잘났다'라는 부정적인 평판이 있지만, 얼간이는 싸다만 설사취급받거나, '이 등신 같은 놈', 그렇게 불리고 만다, 사실 등신은 수위가 그렇게 높은 욕은 아니다. 사전에 명시되어 있듯이 등신은 몹시 어리석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즉, 팔다리가 없거나 머리를 다쳐서 모자란 행동을 하는 병신도 아니면서, 멀쩡한 몸뚱이와 맨 정신으로 병신짓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등신'은 나무, 돌, 흙, 쇠 등으로 만든 사람을 말한다. 작가들이 완제품으로 만들지 못하고 만들다만 일종의 모형이니 어떠한 능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글에서도 꼭지만 써놓고 전개가 되지 않으면 등신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나도 뭔가 만들다가 정신이 딴 데 팔리면 눈만 그려놓는다던지, 팔다리는 나중으로 미뤄놓고 몸통만 만들다가 말기도 한다.  



"네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그래?"

"이게 위아래도 없이!"

"그래 너 잘났다."

"넌 내가 바보로 보이냐?"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난 괴짜 축에 속했나 보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 주변사람들, 선생님, 직장동료. 이들과 가벼운 대화를 시작하면서 심도 있게 넘어갈 때 제일 많이 들었던 소리였다. 처음엔 이상했다.


- '반응이 저래?'

- '논리에 위아래가 어디 있나?'

- '잘난 말보다 바른말을 했지.'

- '내가 언제 바보라 그랬나?'

- '말해 보라매요?'


그러다 말이 막힌다 싶으면 일단 손이 올라왔다. 한 대 맞고 나는 생각했다.


- '미쳤군.'


물론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폭력을 쓰는 사람들이 미친 것이다. 어렸을 때 세상의 온갖 욕을 적은 비서(秘書)를 읽은 나는 욕 중에서 최상급의 고급욕은 아주 꿰차고 있었고, 굳이 욕을 쓰지 않아도 사람들의 언행을 잘 기억했기에, 그들의 오류를 육하원칙에 따라 정갈하게 늘어놓으며 상대의 사색을 질리게 하는 데는 도가 터 있었다. 비폭력주의자에 평화주의자였던 나는 그들이 대화하자고 하기에 그냥 대화에 응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논리적인 대화는커녕, 일단 머리를 쓰는 게 아니라 진짜 머리로 돌진한다.


- '아, 또 육탄전이야? 나도 무술 배워야 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논리에 약하다. 초코파이가 주는 정(情)에 약하고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는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난 내 마음을 아는 사람 한 명도 못 봤다.


- '내가 내 마음을 안 열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겠어?'


하여간 나는 한국사회와 맞지 않구나, 나라도 잘못 택했네,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나라로 가볼까도 생각했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랬다.


"참 특이하네."


그래서 갈 곳 없는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오늘도 고향을 그린다.


- 여긴 아닌가 봐. 나도 일론 머스크처럼 우주선 만들어야 해? 그건 별론데!




국회의원을 뽑은 건지 권투선수를 뽑은 건지, 국회에서의 쌍욕과 육탄전은 고사하고 졸업식에서 연구예산삭감에 대해 한마디 하려다가 바로 대통경호침대에 실려나가는 우리의 정계 학계의 현실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외교사항을 결정짓는 자리에서 정책자가 샴페인에 정신이 팔린 건지 단어해석을 잘못해서 불합리한 조약으로 국민권리를 침해하는 건 고사하고, 하라는 일 안 하고 마누라 몰래 욕구를 채우다가 국제적으로 망신살이 뻗치는 일도 허다하다. 정재계와 법조계의 필수 술자리는 사고를 마비시키는 폭력과 위계서열이 조직폭력배를 능가한다. 이성적인 논리에 대한 억압과 육체적인 폭력의 어긋난 결합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문제이다. 어린 시절 성장기 과정부터 일터에서까지 항상 고민하게 만들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확실히 나와는 달랐다. 학문적으로 포장된 아카데믹한 공간에서는 어느 정도 무마가 됐지만, 가끔은 학문적으로 토론하는 곳에서조차 사람들은 벙어리가 아니면 감정적이긴 했다. 그리고 학문의 터를 벗어나면 갑자기 학문에 대한 열정이 사랑으로 돌변한다. 그것은 태고적부터 알려진 사랑이라는 감정이나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호기심과 전혀 매칭되지 않았다. 쌍방형 커뮤니케이션은 고사하고 일방적이었다. 아무래도 나의 생각의 터치가 사람들을 어루만지기보다는 뇌리를 한대 치는 강도로 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독립적인 사고를 독려한다던지 독창적인 생각을 꺼내어 놓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나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타인의 문제였을까.


고등학교 삼 학년 때 집에서 크게 맞고서 화가 나서 바가지를 부수고 몽둥이를 분질러버렸다. 매일로 변해버린 사랑의 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대학교 갈 테니 때리지 말라고 했다. 밑바닥에서 놀고 있던 공부는 그때 다시 했고, 대학은 더 이상 시험 치기 귀찮아서 사전에 걸린 대로 가버렸다. 고등학교 때였는지, 중학교 때였는지 한 선생님이 뺀질거리는 아이한테 열받는다고 대걸레자루를 발로 밟아 긴 막대 몽둥이로 만들어 체벌하려고 준비할 때, 폭력은 안 된다고 대들었다. 덕분에 선생과는 완전 등지고 수학은 손 놔버렸다. 중학교 때는 젊음의 묘약이라며 팽팽한 얼굴에 침을 바르는 방법을 연설하면서 꼴값도 못하고 얼굴 예쁜 여학생에게 추태를 부리는, 변태적인 행동을 일삼는 선생한테 공부나 제대로 가르치라고 항의했다가 미친 듯이 맞아서 교실은 순식간에 얼음땡이 됐다. 결국 그 힘 좋고 얼굴 팽팽한 선생은 학부모회에 고발당해 다른 학교로 발령 나게 됐지만, 만연한 일상의 폭력은 사랑의 가르침이라는 명목 하에 실행되었다. 첫 직장에서도 회식자리에서 내 생각을 말했다가 술 취한 팀장한테 개발 새발 쌍욕을 들었다. 그리고 놀랐다.


- 아니, 말을 하고 있는데, 폭력적인 행위나 언사가 들어갈 곳이 있는가?


정말 폭력적이고 이상한 사회라고 생각했다. 하여간 감정이 들어가면 내 주변의 인간들은 모두 정상적이지 않았다. 감정이 이성을 방해하는 것인지, 감정과 폭력이 결합되는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실제로 문제가 닥쳤을 때 감정적이면 해결이 불가능하다.


요즘의 전쟁들은 행위를 실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감정적이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이성적인 것과 탐욕은 다른 문제이다. 탐욕도 면역체계가 변이가 된 암처럼, 정상에서 심하게 뒤틀린 감정이다. 분노와 욕망, 이기심, 우월감, 열등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기쁨, 슬픔에서 더 집중적으로 고도화되면 감정은 변질되고 만다. 그래서 이 세계의 전쟁이나 폭력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적인 감정을 자제하고, 과연 이렇게 갈라지고 다퉈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냉철한 이성이 사라진 사회를 바라보면 나의 어린 시절이, 그리고 현재에도 가끔씩 자유로운 행동을 제어하는 현실이 교차된다. 어느 순간 내가 감정의 일부를 포기한 이유도 자유로운 사고가 억압받고 그로 인해 고통받았기 때문이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도 감정에 매달리지 않으니 고통은 어느 정도 사라져 있다.





삶에 대한 태도와 생의 기본전략 : 자립갱생(自立更生)


"오늘 밸이 꼴렸냐?"

"나 미치게 하려는 거지?"

"어떻게 매사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계산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거야? 넌 감정이 없어?"


간혹 굉장히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내 주변에는 정말 나와 다른 사람들만 있다. 특히 대화에서 차가운 이성보다는 따뜻한 감정이 먼저인, 좋게 달리 말하면 인간적이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과 함께 해야만 할 때, 한시적으로 그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걸어야만 한다면,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런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서 현재 우리의 상태를 점검하고 발전을 모색하고 싶다. 


난 보통 대화를 하고 나면 생각을 하는 편이다. 아니, 대화를 할 때도 생각을 한다.


'상대방은 왜 저런 말을 하고 저런 대응을 하는가. 저 머릿속에는 뭔 생각이 있는 것인가. 오늘은 이렇게 찔러볼까? 아님 속내는 뭐지?'


가까운 사람들은 뭐 그리 복잡하게 사냐고 면박이다. 이미 내뱉은 말이니 주워 담을 수 없고, 잊어버리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되냐고 하는데, 난 그게 안된다. 잘못되면 인정하고 개선하면 되지 않는가?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잘못된 행동에 인식을 가지지 않으면 습관은 바뀌지 않는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만고의 진리다. 같은 일을 하는데 여러 번 오류가 날 수 있고 실수도 할 수 있고 잠시 습관처럼 행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변화하려는 시도 없이 실수는 한 번쯤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습관이 고착화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제어나 관찰이 없으면 무심코 타인의 영역을 방해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치고 박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사랑하던 사람과 영화 <덤 앤 더머 Dumb and Dumber>를 보고서도 전혀 웃지 않았던 나였기 때문에, 이 기준이 성격인지 취향인지 생활 태도인지조차 이젠 알 수 없다.


아이도 자전거 배울 때 단번에 탈 수 있지 않다. 배우는 과정에서 다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다. 돌부리에 걸려 꼬꾸라진 사람들은 상대를 바라보며 따뜻한 말과 온화한 대응을 원한다. 성인인 데다 정신도 말짱하고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신경 쓸 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타인이 넘어졌으면 일어나라고 말할 때 격려조가 안 되는 것이 나의 최대 문제인 거 같다.


"손 좀 잡아줘."

-네가 일어나.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 아니. 네가 애야?

"넌 피도 눈물도 없는 거지?"

-뭔 소리야?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감정절제, 공간확인, 방법모색, 필요도구선택, 시의적절한 행동이다. 이건 가깝고 먼 관계를 떠나, 문제가 생겼을 때 두리뭉실하게 넘어갈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적 자세를 가지는 것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유한한 삶에 대한 예의이다. 늪에 빠지면 한 사람이라도 먼저 빠져나가야 한다. 서로 도와준다고 하다가 같이 사장되는 것이 현실이다. 무표정함을 지우고, 감정적인 사람들까지 모두 포용하는 세계를 만든다고 한다면, 내부의 칼을 갈고서 웃는 얼굴을 가진 정치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표리부동을 하다가는 밤마다 미친 듯이 중얼거릴지 모른다. 그래서 타인을 포용하는 능력치가 떨어진 나는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지고 감정 없이 타인을 대하기로 했다. 그게 정이 없는 인간으로 분류된다면 내가 감수할 몫이다. 나와 함께 하는 타인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지는 입장에서는 스스로 거짓되지 않은 방법이긴 하다.     




익숙하고 빌어먹을 그놈의 정(情)때문에, 감정에 많이 데인 나는 어렸을 때부터 초코파이를 싫어했다. 기본적으로 초코파이에 들어가 있는 그 말랑한 질감의 마시멜로우가 이에 들러붙는 고무질감의 가짜 눈사람 같다. 말랑말랑 마시멜로우는 시각적으로 매력적이지 않다. 꼬챙이에 끼워 구우면 흡사 소의 유젖처럼 녹아 떨어지는 장면은 빼앗긴 아이를 기다리는 여인의 젖가슴을 상기시킨다. 달큼한 냄새와 달리 마시멜로우에선 젖비린내가 난다. 캠핑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릿한 달콤함이다. 왜 마시멜로우 타령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초코파이에서 미각을 마비시키는 허옇고 풍덩풍덩 한 마시멜로우 같은 느끼한 달콤함을 뺀다면 먹어볼 만하다.


나는 희생적 인간은 아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타인을 위해 희생을 했다고 느끼면 보답이나 보상을 얻는 기제가 발동된다. 부모는 아이에게, 아이는 부모에게, 부부는 서로에게, 친구끼리, 이웃끼리, 무리에서, 조직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자신이 한 희생적 행위로 인해 타인이 알아줄 거라는 기대감이 배수가 되면서 현실적일 수 없게 망상으로 올라가거나, 혹은 기대와 다른 현실에 좌절하여 남 탓을 하거나 성격이 외골수로 변할 수 있다. 희생에 대해 인간이 갖고 있는 기대감과 그에 따른 역작용 또한 점검해서 그에 정신이 시달리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나는 능력이 출중해서 나약한 사람들 몫까지 다해서 이 한 몸 바쳐 희생했다는 우쭐거림까지 도달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잘 정리한 뒤 깔끔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순간에서도 벗어나고 싶다. 서로의 공간과 시간을 함께 하는 공동체적인 관계의 정의를 통해 나 또한 점검하고 타인도 알게 하고 싶다. 그게 정이 없음으로 통한다면 할 수 없다. 그냥 초코파이 한 박스 사가지고 그들에게 주면서 많이 먹고 화를 풀라고 할 수밖에.




정치 외교만이 아니라 사회 경영에서 사용되는 모든 단어에는 의중이 있다. 전략적 무거움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피곤하게 일일이 계산하냐고 그런다. 나도 나만의 사적인 삶을 살고 싶고 나만 홀로 지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자유는 잠시 미뤄두었다. 현재,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이고 그래서 머리를 쓸 수밖에 없다. 공적인 일을 할 때 신중하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속담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내가 오랫동안 외국 사람들과 잘 지내는 이유도 대화 속에서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기 때문이다.


중국 상인과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깍쟁이들이다. 여건도 그렇고, 나의 성향상 정치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세계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지만, 일상과 밀접한 상업계에 있어서도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 The Merchant of Venice》에서 보이듯이 이탈리아 친구들은 벼룩의 간까지 썰어먹고 싶은 양아치적 발상을 서슴없이 하며, 상놈이라고 비약하여 불리는 중국의 거상들은 모든 단어 하나에도 계산을 하고 신용의 무게를 잰다.


"한 번은 속아줘야 친구야."

-그건 무슨 말이야?

"가볍게 속는지, 그런 장난 같은 속임에도 화를 내지 않고 관계를 가질 수 있다면 그 뒤까지 함께 볼 수 있어."


중국에서 속내까지 깐 사람이 알려준 중국인의 습성이다. 세상은 쉽지 않다. 자기 아집에 빠지다 보면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없다. 일상의 관계든 정치적 관계든 상업적 관계든 문화적 관계든 냉정하게 서로를 쳐다볼 필요가 있다. 무조건 정으로 돌진해서 이미 엉켜버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난 흥이 나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명상을 하는데 잡생각이 많아서 무아(無我)의 세계는 아직 발끝에도 가지 못했다. 타인에 대한 기대감도 내려놓자고 하는데, 가끔 수양이 덜 된 것인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타자기 소리처럼 머리에서 의견이 자동 발사된다. 몇 년 안에 의식의 탈출까지 꿈꾸고 있기에, 나의 관계적 수식에서는 서로에게 미진하게 설명된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우리만의 공간영역을 확인한 앞으로의 전략을 짜는 것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러니까 내 의미는 서로 잘 살아보자는 거야.

살살 다독이는 것은 속이 울렁거려 못하겠다.





생의 의미 :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사를 함께 하라고 가르치는가.


혹여 하도 정을 부정하여서 사랑에 상처받은 적련선자(赤練仙子) 이막수(李莫愁)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랑도 모르던 어린 시절, 나의 최애 소설은 정서(情書)로 불리는 영웅문 英雄門 2부, 신조협려 神雕侠侣였다. 1986년도 고려원에서 출시된 소설 영웅문 삼부작은 아직도 책장 가운데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기획 MD 겸 디자이너로 첫 중국출장지가 작가 김용(金庸.查良镛)의 고향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宁)과 찌아싱(嘉兴), 쑤저우(苏州) 일대였다. 한 달 못되게 머무를 때 바쁜 와중에도 영웅문을 떠올리며 소설 속의 인물들을 그렸다. 과거와 현재의 배경을 살피기도 했고, 황톳빛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 수십 번은 보았던 영웅문의 작가 김용과 대화했다. 역사학자이자, 문필가, 수집가, 논설가였던 김용은 중국의 역사적 전통사상뿐만 아니라, 노자와 장자, 불경까지 통달하여 그의 해박한 지식 속에 감칠맛 나는 언어구사를 통해 정신세계와 실사가 혼재된 인간사를 풀어내었다. 그의 소설은 사실과 허구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모순적인 면을 평행선으로 섞어 픽션(Fiction)을 구현하는 점이 특징이다. 사회 속에 놓인 인간이 어떤 요소를 통해 자립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 우리는 현재의 가치관과 삶의 도덕에 충실하는 것이 맞는가? 이런 철학적 논의까지도 고민하게 하는 영웅문 英雄門》은 나의 혼란한 십 대 시절, 최대의 충격을 준 변혁의 소설이었다.

 

소설의 남성 캐릭터 중에서 양과(楊過)는 친구로 삼고 싶은 인물이었다. 얼굴은 상상이니 알 수 없고 나의 어린 시절의 반항적인 모습과 같아서 동질감을 느꼈다. 더불어, 오직 소용녀(小龍女)를 향한 관습과 편견을 뛰어넘는 일방향적인 사랑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의 이름, 과(過)처럼 부모가 남긴 과거의 허물조차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한 사람이어서 관심이 갔다. 어릴 적 품었던 정(情)을 이루기 위해, 십육 년이란 이별의 긴 시간조차 기다렸던 양과와 소용녀를 보면서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야속했다. 정화(情花)에 한번 찔리면, 그리운 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찔리듯이 독이 발작하다가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결국 사망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웠던 기나긴 시간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아픔 속에서, 해독되지 않는 사랑을 만나기 위해 아픔까지 그대로 받아들이다가 생을 포기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서로를 만나게 된다. 신조협려의 전체를 꿰뚫고 있는 정(情)은 모든 인간사를 만들고 종결짓는 생의 의미이다.


금문학의 대가(金文学家) 원호문(元好问)의 교방곡, 매피당(邁陂塘)의 가사 중 하나인 《안구사 雁丘词》는 금 장종(章宗) 태화(泰和) 5년인 1205년, 원호문이 병주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기러기 포수를 만나면서 그가 들려주는 기러기의 사랑 이야기에 감복해서 지은 시이다. 기러기 포수는 어느 날 기러기 한 쌍을 잡았는데, 한 마리는 죽고 한 마리는 그물을 피해 도망쳐 살았다. 그러나 산 기러기는 멀리 도망가지 않고 죽은 기러기 주위를 배회하며 슬피 울다가 땅에 머리를 찧고 자살해 버렸다. 이 이야기를 듣고 원호문은 죽은 한쌍의 기러기를 사서 물가 옆 분수에 묻은 뒤 돌을 쌓아 표시를 하고 기러기 무덤, '안구 (雁拘)'라고 칭한 뒤 《안구사 雁丘词》를 지었다.


'정이란 무엇이길래, 情是何物?', 현대의 말로는 '사랑이 무엇이길래, 爱情是什么?'이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와 같은 질문이다. 1990년대 이래 한국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국민드라마였던 <사랑이 뭐길래>는 가족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을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김수현 작가의 구성진 말맛을 통해 표현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고정된 관계도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다양한 영상매체가 생겨나서 이 드라마보다 더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드라마는 없을 것 같다.

 

우리의 인생에서 어찌하여 사랑의 감정은 이토록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희비 속에 생사를 가리는가? 나의 머리로도 사랑은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운 미지의 단어이다. 그러나 정(情)이란 모호하면서 진실을 수반하는 단어이다. 정(情)이란 한자처럼, 내 마음을 비추는 푸른 하늘처럼, 혹은 푸른 명경의 바다처럼 온갖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정말 감정이 없어서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인지하지 못할 뿐, 그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시를 읊을 때만은 물길이 열리고 감성적이 된다.  《안구사 雁丘词》, 이 시는 김용의 작품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신조협려의 중심 사상이며, 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다. 복수심에 차 있던 이막수가 못 다 이룬 사랑을 슬피 부르면서 한 생을 마감할 때 등장하는 노래이다. 헤어짐 속에서도 언젠가는 만났던 소용녀와 양과처럼 어린 나의 시선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사랑을 기리는 처연한 음성에 동의하는 바이다.


 

《迈陂塘·雁丘词 매피당·안구사》, 원호문(元好问)


问世间情是何物,直教生死相许。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사를 함께 하라고 가르치는가.


天南地北双飞客,老翅几回寒暑!
남쪽 하늘과 북녘 땅을 쌍쌍이 날아가는 여행자야,

지친 날개는 몇 번의 겨울과 여름을 겪었느냐!


欢乐趣,离别苦,就中更有痴儿女。

기쁨은 즐겁고

이별은 고통스럽지만

그중에서도 어리석은 여인보다 더 한 것이 있겠느냐.


君应有语:渺万里层云,千山暮雪,只影向谁去!
님이 응당 할 말이 있구나:

아득한 만리에 구름만 첩첩하고,

천산의 눈 덮인 저녁,

홀로 그림자만이 누구를 향해 가는가!


横汾路,寂寞当年箫鼓,荒烟依旧平楚。
분수의 물가를 가로지름에

당년의 피리소리 북소리 사라지고 없구나,

황량한 연기는 광활한 숲 속에 여전하네.


招魂楚些何嗟及,山鬼喑啼风雨。
영혼을 불러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산귀신도 비바람 속에서 울부짖는구나.


天也妒,未信与,莺儿燕子俱黄土。
하늘도 질투하는지,

믿지 못하겠네.

꾀꼬리와 제비도 모두 황토 속에서 날아갔구나.


千秋万古,为留待骚人,狂歌痛饮,来访雁丘处。
천추만고의 세월 동안,

시인을 기다리며 남겨두기 위해,

미치도록 노래하며 고통에서 취해 마시고는,

기러기 무덤을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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