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병동에서의 고요한 일상

병동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by 코알코알

전시 상황이라 믿던 세상 속. 병동에서만큼은 안전했다. 낯설고 따뜻했던 그곳의 기록.

폐쇄병동이라고 생각하면, 다들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사실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들만 가득한 곳이라고 생각이 들어, 입원하고도 쉽게 경계를 풀지 못했다. 폐쇄 병동에 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에는 우리나라가 전시 상황이라고 믿고있었기 때문이다. 조현병 증상들은 망상과 환청 등이 있는데, 내 경우는 약을 먹고 나서도 바로 환청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망상도 잡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족들을 두고 병원에 입원하는 것은 너무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입원하면 안 되냐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폐쇄병동 안에 있으면 적어도 그 공간만큼은 안전할 것 같았다. 병원에는 폭격하지 않으니까. 그곳에서라면 내가 가족을 지킬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검사 결과나 교수님 상담할 때 보였던 모습이 심각했기 때문에 조현병으로 입원하기는 엄청 쉬웠다. 약을 먹어도 증상이 잡히지 않았으며 자·타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빠르게 입원할 수 있었다. 내가 만난 교수님은 광주에서 조현병으로 아주 저명하신 분이셨다. 그만큼 신뢰와 권위도 있었다. 그 분께서는 아침, 저녁으로 상태를 자기가 직접 살펴본다고 하셨다. 예후가 좋아지기 위해 한 번 믿고 맡겨달라고 설득하셨다. 부모님께서는 더 나은 모습의 내가 보고 싶어 나를 맡기고 갔다.


막상 정신병원에 입원하니,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우울증, 조울증 환자들은 있었지만, 조현병 환자는 아주 드물었다. 생각해 보니 나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조현병 환자분은 가정이 있으신 분이었다. 정말 웃긴 말이지만, 폐쇄병동에 있는 사람들은 미친 것 같지 않았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미친 인간들이 많던데, 여긴 이상하리만큼 선한 사람이 많았다.


‘그곳에는 진짜 심각한 상태의 사람들만 있겠지.’

‘정말로 미쳐버린 사람들만 들어가게 되는거 아닌가.’


그래서 두려웠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무서웠던 경험이 있다. 부모님이 나를 병원에 입원시킬 때, 버려지는 느낌이 들어서 외래 환자들이 대기하는 곳에서 엉엉 울며 버리고 가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며칠 살고 나서도 폐쇄병동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멀쩡한 사람들도 폐쇄병동에 오는구나. 다정한 사람도 많고, 따뜻한 사람도 여기 오는구나. 내가 폐쇄병동에 느낀 점은 정신병이 있는 사람이 인생의 마라톤에서 힘에 부칠 때, 오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 상처받았던 이들이 그 공간 안에서 다시 사람과 어울리고, 조심스럽게 신뢰를 회복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렇게, 천천히 그들이 세상으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았다. 거기에서 퇴원이라는 것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저녁 시간마다 모여서 신문을 읽는 시간에는 퇴원 소식이 있으면 알리는 자리이다. 병동에서 퇴원할 때마다, 진심으로 축하하며 같이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곳의 삶은 지루한 날도 많았다. 한편으로는 묘하게 신선했다. 어딘가 한 템포 늦춰진 세상 같기도 했다. 자극이 전혀 없는 삶, 상처가 없는 삶이었다. 나는 학창시절 내내 왕따와 은따를 당했다. 병동에서는 나이는 다르지만,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병동 안에서 운전 면허를 따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모님께 면허 책을 보내달라고 했다. 뭔가를 다시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누구도 막지 않았다. 단지, 여기서는 아무도 공부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공부할 만한 장소가 없어 허리를 굽히고 불편한 자세로 책을 봐야했다. 운전면허 책은 내가 사 왔지만, 모두가 돌려보게 되었다. 그래서 너덜너덜해졌지만, 그마저도 소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병동 내에서 회장을 뽑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일주일간 회장이 되기도 했다. 생각보다 많은 일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부담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단단하게 해주었다. 폐쇄병동에서 동생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라면을 먹기도 했다. 정말 수학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회장으로서 가습기를 놓아보자고 하기도 했다. 누군가 가습기를 던졌던 적이 있어서 병동 안에 놓지는 못했다. 하지만 접시에 수건과 물을 가득 담아놓고 가습기를 대체했다. 접시는 당연히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소재로 놓았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병동 안에서 조금씩 믿기 시작했다. 약물 치료를 하고 병동 내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환청이 내 감정이 아니고, 진짜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동에서 보낸 그 날들은 다시 나를 붙들기 위한 연습이었다. 물론 힘든 적도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은 날에 마실 수 없었고, 걷고 싶은 날에는 나갈 수가 없었다. 그 제한된 일상이 답답했다. 특히 코로나 시국이었기 때문에, 면회가 금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폐쇄병동의 창밖은 매일 같은 색이었다.


하지만 바로 앞 시장에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활기찬 얼굴들이 보였다. 그걸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빨리 나가고 싶다. 다시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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