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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희 Jan 27. 2022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실패를 통해 다시 일어서는 힘을 배운다


  

 젊지도 않은 지금의 내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 어디에도 마음 둘 데가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버팀목이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초라한 내 몰골이 비로소 보였다. 주변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변한 건 내 마음 상태였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건 내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육십 코앞에서 어이없이 삶을 포기할 뻔했다. 와글대는 장터에서 엄마 손 놓친 미아가 망연자실해서 나쁜 사람인지 모르고 따라가는 꿈을 꾸었다. 그렇게 꿈이고 싶었다. 

같이 일하는 곳에서 만난 회장님 운전기사를 조카처럼 예뻐했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주식을 맡겼다. 그가 가지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도 갔다. 그러나 '해외선물'한다며 3천 만을 순간에 날렸다. 본인 소유라던 아파트는 다른 사람 거였다. 그의 이름으로 계약했기에 보증금 천만 원도 날렸다. 엄마 돌아가신 슬픔에 우울증을 앓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쉽게 사람을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이라니. 빈손 되어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쉰아홉에도 사람에게 당할 수 있구나. 부끄러웠다. 희망의 끈을 발견 못 한다는 건 더 이상 살 의미도 없다는 것이었다. 

외딴섬에 유배된 것처럼 허허로웠다. 그곳에서 단 하루도 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평생 지니고 다니던 내 소지품들조차 아무런 애착이 없어졌다. 내 분신처럼 여기던 피아노도 버렸다. 웬 수료증은 그리도 많던지, 상자 가득 버렸다. 냉장고며 침대까지 모두 버렸다. 한 트럭 가량 된 책을 버리고, 내 인생 여정이 녹아 있던 노트들까지 미련 없이 버렸다.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구경만 한 정도였다. 내가 실천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졸지에 의지와 상관없이 미니멀 라이퍼가 되어버렸다. 빈손 툭툭 털고 어디든 갈 수 있으니 가볍고 홀가분했다. 물건에 미련을 버린다는 것은 죽을 준비를 한다는 것과 같지 않나 싶다. 나는 그렇게 59년을 마감했다.      




인생은 60부터 란 말이 있다. 젊음을 바쳐 가족을 위해 열심히 달려왔으니, 은퇴 후에는 자신만을 위해 새로 시작하라는 위로의 말일 것이다. 나는 그런 위로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그들의 범주에 들지 못하니, 나 스스로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야 한다. 예전의 나는 죽고 60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세상이 새로워 보인다. 살아보니 희망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내가 만들어나가야만 한다.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인 93세의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EBS 다큐프라임에서 “전 후회가 없어요. 때가 오면 받아들일 거예요.”라고 말했다. “얼굴이 저렇게 평화로울 수 있을까. 저렇게도 눈이 맑을 수가 있구나.”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냈을까. 아낌없이 불태웠을 때 가능할 것 같은 초월의 경지가 보인다. 그분의 초연함을 닮고 싶다. 지금 시작하지만 남은 생 다할 때 후회 없이 가고 싶다.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 대부분은 하던 일을 포기하는 그 순간 자신이 성공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다.” 에디슨이 주는 교훈을 되새긴다. 그동안의 실패로 인한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일 없도록 정신을 놓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골똘하다 보니,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생각이 미친다. 생애를 다하고 떠나야 할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까. 잘 죽는 것이 잘 살아온 것의 방증이라고 한다. 내가 사회에 남기고 갈 것은 무엇일까도 생각해본다.      





어릴 적 하늘처럼 높이 보이던 분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분과 편지를 자주 주고받으셨다. 우리들은 그분이 보낸 일본풍의 멋진 그림엽서를 가지고 놀기도 했다. 제일 교포인 아버지 친구분은 제법 성공한 재력가라고 했다. 돈을 벌겠다며, 부산에서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동지 사이였던 두 분은 각별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밀항선 주인공이 우리 아버지였던가 보다. 어렵게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현해탄을 건너가 정착했지만, 아버지는 몇 년 뒤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사실은 부모님이 맺어준 정혼자를 두고 가셨기 때문이다. 다섯 살 아래인 엄마는 당시로는 과년한 나이여서 마냥 홀로 지낼 수는 없었다고 한다. 고민 끝에 아버지께 편지를 보냈다. “부모님이 전염병으로 위독하다. 급히 귀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잠깐 다녀올 생각으로 고향 집에 왔다가 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발이 묶여 다시는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마음이 전혀 없으셨다는 걸 내가 커서야 알았다. 일본에서 이미 결혼해서 딸이 세 살이었다고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러다 자식들이 태어나니 결국 돌아갈 수 없었던 아버지는 술에 의지하셨다고 한다. 두고 온 딸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유일한 소식통이었던 그 친구분과의 편지는 아버지의 낙이었을 것이다. 


그 친구분은 일 년에 한두 번 고향 집을 방문했다. 환영식이 떠들썩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분은 두메산골 고향 마을을 살기 좋게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길을 내고 편의 시설 등 마을 복지와 장학 사업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들이 성인이 돼서 아버지 마음에 새겨진 응어리를 풀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친구분이 일찍 돌아가시고 두고 온 딸을 찾을 길이 없었다. 칠순 무렵 오빠가 모시고 일본에 다녀오셨다. 내색은 안 하셨지만, 그것으로 추억을 정리하신 듯했다. 


나는 돈이 많은 아버지 친구분이 참 멋있게 보였다. 그분처럼 나도 내가 태어난 고향에 뭔가를 베풀고 싶다. 내 앞가림 하나 못하고 살아왔지만, 이제부턴 큰 뜻을 품고 이루어내 볼 것이다. 부모님이 잠들어 계신 곳, 내가 태어나 추억이 있는 그곳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 





엄마의 외로움을 지켜보며 마음이 씁쓸했었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니 옛 친구들도 발걸음을 끊고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놀이문화시설이 갖추어진 양로 학교 같은 요양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던 거다. 병원비가 없어서 재활치료도 충분히 못 해 드려 눈물만 흘렸던 바보다. 돈이 없음을 한탄만 했던 부정적인 감정이 오히려 돈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난은 참으로 불편하다. 엄마를 요양병원 전전하다 떠나보내고 나니, 그렇게도 아름답던 세상이 다 슬퍼 보이기만 했다. 


돈에 대한 낡고 부정적인 고정관념에서 이제라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이또 히또리의 ‘부자의 행동습관’ 등 의식을 변화시키는 책을 골라 읽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드러내 놓고 돈을 밝히는 것은 속물근성이야’라고 은연중에 각인된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옭아매었던 것 같다. “누구누구는 돈에 환장했나 봐, 돈밖에 몰라” 이런 어른들의 대화는 무심한 듯 어린 마음에 스며들었다. 나는 이런 부정적인 고정관념에서 빠져나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한심한 나를 용서하고 부에 대한 의식을 변화시켜 나가야겠다. 


가장 직관적으로 나를 변화시킨 것은 유튜브였다. 처음엔 젊은 유튜버들의 돈에 대한 감정이 너무도 당당해서 깜짝 놀랐다. 돈을 대하는 태도, “돈을 밝히는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며 솔직하다. 유튜브와 함께 나는 부에 대해 설파하는 책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의식을 확장시켰다. 낡고 왜곡된 고정관념을 버리는 데는 시기를 정할 필요가 없다. 돈에 대한 두려움 대신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느 책을 읽다 인상 깊은 내용이 있었다. ‘돈을 조금 벌어 지지리 궁상떨며 아껴 쓰려하지 말고, 돈을 많이 벌어 마음껏 쓰면서 주변에도 베풀며 살라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사회 필요한 곳에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의미 있게 살다 가는 것이 진짜 멋진 인생 아닐까.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카카오 김범수 의장은 자신의 재산 절반인 5조를 기부하겠다고 한다. 배달의 민족 김봉진 의장 또한 자신의 재산 절반인 5천억 정도를 기부한다는 뉴스를 보며, 아직 젊은 이 두 사람이 더없이 멋져 보였다.        


또 한 가지 관심 분야는 보육원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같은 반 친구 중에 고아원에서 사는 아이들이 많았다. 지금은 그런 고아원 건물을 찾아볼 수가 없다. 고아들이 없어서 시설이 필요 없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얼마 전 입양 부모에게 학대당하다 죽은 16개월 아기 사건을 보며 너무 마음이 아팠다. 자격 없는 양부모에게 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생각했다. 예전 보육원처럼 가족 같은 분위기에다 좋은 시설이 갖추어진다면 어떨까 구상해봤다. 오갈 곳 없는 미혼모를 같이 거주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면 좋겠다. 


내가 이 세상 소풍 끝나고 떠나는 날까지 이 두 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기를 이 순간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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