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가르는 머쓱한 그 소리
내 젊음의 소리는 어디로 갔나
삐리릭~개찰구를 통과해도 좋다는 신호음이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한다. 어서 오시라는 환영 멜로디이건만 매번 죄스러운 듯 눈치를 볼 건 뭐란 말인가.
올해 부여받은 어르신 카드가 한없이 고마우면서도 아직 어색한 건 왜일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개찰구에 카드를 대면 삑~ 하고 단음이 울렸다. 카드가 바뀌기 전엔 몰랐다.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당당한 소리인 줄을.
아무튼 젊음과 늙음이 인정머리 없게 소리 하나로 한순간에 갈라져버렸다.
소리에 움찔하는 건, 마음속에 아직은 젊다는 자의식이 치켜들기 때문이리라.
한동안은 카드 사용이 헷갈렸다.
같은 지갑에 넣어둔 일반 카드가 찍히기 일쑤였다.
오늘은 약속시간에 여유 있게 나왔다. 전철 플랫폼도 한산했다. 여러 개 들어 있어 제멋대로 찍혀버리는 일을 막고자 차분히 카드를 꺼냈다. 혼자 타니 남 눈치 볼 일도 없어 느긋하게 카드를 찍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역무원이 창구 너머에서 날카롭게 나를 살피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시선에 멈칫했다. ‘설마 내가 넘 젊게 보여서 의심하나?’ 그런 오해라면 괜찮다 싶어 쿡 웃음을 삼켰다.
사실 오늘은 조금 젊어 보이려 노력하긴 했다.
마스크를 벗고 모처럼 립스틱 하나를 꺼내 발랐을 뿐인데, 기분이 들떴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늘 신던 운동화 대신 반질반질한 검정 구두를 신었다.
평소 주렁주렁 들던 쇼핑백 대신, 외출용 백팩을 어깨에 멨다.
이 정도면 나도 제법 괜찮다 싶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러다 ‘전철 무료 카드’라는 낯선 녀석이 발목을 걸며 비아냥거려 머쓱했다.
몇 주 전 일요일이었다. 남한산성 입구역 부근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네이버 지도에 식당이 안 보여 헤매고 있었다.
마침 같은 방향으로 가는 아저씨 한 분께 길을 물었더니, “아, 그 식당 제 단골이에요. 어차피 그 앞으로 지나가니 따라오시면 돼요. 근데 우리 또래신가 봐요. 아무리 봐도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또래요?" 그 아저씨는 얼핏 70대 중반쯤 보였다. 내 또래 동창들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제 나이를 어떻게 아시나요?" 내가 물으니, “개찰구 통과하실 때 뒤에서 봤어요.”란다.
괜히 얼굴이 화끈했다.
이런 동지애 따위 반갑지 않구먼은.
내 친구 하나는 젊은 지인들과 전철을 탈 때 일부러 일반 카드를 쓴다.
“젊은 애들은 ‘띡!’ 하고 딱 끊기는데, 우리 건 ‘띠리릭~’ 하면서 티를 내잖아.
괜히 나이 광고하는 것 같아 민망하다니까.”
그 말에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엔 허허로운 동질감이 숨어 있었다.
1인 기업 모임에서 만난 K 대표와 전철을 같이 탄 적이 있다. 그때도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K 대표는 무료로 타는 게 미안해서 좌석엔 절대 앉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서 있을 때도 한 발을 살짝 들고 있는단다.
“전철에 무게를 줄여주는 나만의 방법이거든요.ㅎㅎ”
그야말로 무임승차 인간들의 눈물겨운 유머다.
국가가 ‘이 나이까지 수고했다’며 쥐여준 작은 혜택인데,
왜 이렇게 쑥스럽고 미안해야 할까.
언젠가 김훈 작가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무임승차의 해설이 통쾌했다.
"저는 1948년생입니다. 제가 올해 65세가 됐죠.
그래서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세대가 됐습니다. 젊은이들은 날 보고 지공대사라고 하더군요.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인간이라는 말이었어요.
지하철이라는 것은 내가 스물여덟 살에 처음 생겼습니다. 옛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가는 한 토막의 지하철이었죠. 그전엔 지하철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 후에 만든 모든 지하철에 대한 세금을 우리가 다 냈습니다.
우리 세대가요. 그래서 우리 서울 지하철은 세계에서 제일 편리하고 제일 값싼 지하철이 된 것이죠.
최고의 지하철을 우리가 만들었습니다. 젊은이들은 거기다 세금 한 푼 안 냈어요.
그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좋은 지하철이 있었던 것이죠.
날 보고 지공대사라고 하니까 내가 참 기가 막힙니다.
'야, 너희들이 지공대사고 내가 지공대사가 아니다.
너희들이 거꾸로 된 거다' 그런 얘기를 했죠."
역시 '김훈 선생님'이셔! 그 당당함에 매료되어 미소가 지어졌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막상 나는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공짜’라는 말 뒤에 따라붙는 ‘이젠 도움받는 나이’라는 꼬리표 때문일지도 모른다.
‘띠리릭’ 소리는 나를 공경하는 듯하지만, 어쩐지 ‘퇴장 신호’처럼 들리기도 하니까.
그래, 모든 건 마음이다.
이런 카드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 떠난 친구도 있는데.. 한가한 투정 부릴 때인가.
다시 들어보니, 그 소리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띡~ 소리가 빠르고 명쾌한 젊음의 리듬이었다면,
우리의 띠리릭은 한 박자 느긋하게 세상을 둘러보라는 노래 아닐까.
속도를 늦추고, 여유를 허락해 주는 소리 말이다.
오늘도 나는 그 ‘띠리릭’ 소리와 함께 전철에 오른다.
창밖 풍경이 느리게 스쳐 지나가고, 마음 한켠에 작은 웃음이 피어난다.
'그래, 이 소리가 뭐 어떻다고, 열심히 살아낸 배경음이잖아!'
혹시 전철에서 한 발 들고 서 있는 어르신을 보거든,
그저 미소 한번 지어주길 바란다.
그분은 삶의 유머를 즐기는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또 각자의 ‘띠리릭’ 소리와 함께,
인생의 다음 정거장으로 유쾌하게 달려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