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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희 Feb 22. 2022

추억을 먹고사는 자매

공감은 마음의 거리를 없앤다


언니와 통화하면 1시간은 기본이다.     

오늘도 딱 한 시간 20분 만에 끊었다.     

손주 이야기 치과 다녀온 이야기 등      

근황을 줄줄이 늘어놓은 뒤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간에 끊기도 미안해서      

언니가 멈출 때까지 듣고 있다.     

주로 전화를 거는 쪽은 나니까.      

     

부모님도 안 계시니 적적한 마음      

달랠 곳은      

언니뿐이다.     

어떤 땐 일하다 머리 식힐 겸,     

십 분 정도 잠깐 안부나 물으려다      

두 시간 통화에 붙들리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언니와 편안하게 대화 나눌 수 있는      

이런 시간이 귀하고 고맙다.          

부모님 돌아가신 후      

언니에게 섭섭한 마음 품기도 했었다.     

응어리진 채로 서로 소통 없이 살아가던     

시간이 숨 막혀서 힘들었다.      

어찌 보면 나 혼자 느끼는 감정이었던 것 같다.     

          



엄마 돌아가신 이듬해 가을, 언니에게      

여행 가자고 제안했다.     

광주로 내려가서 언니를 태우고 남도      

바닷가로 향했다.     

목포, 신안, 무안 등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며     

자연스럽게 쌓인 감정을 풀어냈다.     

     

"언니는 아픈 엄마에게  왜 그리도     

 냉정했던가? 너무 서운했었어."     

"글쎄, 내가 왜 그랬는지 후회된다. 나도 몸이      

아프다 보니 생사에 무감각해지더라."     

     

엄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7년째      

고생하다 돌아가셨다.      

중환자실에 계실 때도 언니는      

병실 냄새를 못 맡겠다며      

멀찍이 떨어져 있다 가곤 했다.      

애틋하게 주물러준다거나 빨리 쾌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엄마는 보는 둥 마는 둥, 간병인 붙들고      

수다 떠는 모습이 꼭 친척      

병문안 온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니 내가 이해 못 했던     

부분이 다른 각도로 비치기 시작한다.     

언니는 40년 넘게 갑상선 저하증 약을     

먹고 있는 환자다. 호르몬이 만들어지지 않아      

매일 한 알씩 복용해줘야 한다.      

보통 사람보다 체중이 약간 더 나가는 편이며     

더위를 무척이나 못 견뎌한다.     

여름은 물론 겨울에도 선풍기를 끼고 산다.     

그리고 방안은 답답하다며      

거실에서 혼자 잔다.     

     

이러한 병증이 있었던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니가 풀어내는 고생담을 듣고 있자면     

마음이 아려왔다.     

맏이라서 짊어져야 했던 그 무게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로선 가늠이 안되었다.     

 언니가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우리 집엔 큰 부도가 났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의 박봉으로는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며     

손 큰 우리 엄마가 크게 한 건 저지르셨다.     

계를 하다가 계원들이 돈만 타 먹고     

도망을 가버린 것이다.     

지금 돈으로 아마 몇억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는 평생을 갚았다.     

그 덕분에 우리 4남매는 거지꼴이 되다시피 했다.      

나는 나 힘들었던 것만 컸다.     

초등학교 때부터 기죽어 다녔으니까.     

학용품도 마음대로 못 샀고,     

군것질 한번 제대로 못 했다.      

옷이 없어 추웠던 기억만 또렷하다.     

한창 꽃 피울 나이였던 여중 여고 시절까지     

암울하게 보냈다.      

특히 빛바랜 낡은 교복만     

줄곧 입고 다녔던 기억은 가장 쓰라리다.      

    

      



언니는 나보다 훨씬 더했다.     

중학교 졸업장을 못 받을 정도였으니까.     

전교 1등이던 오빠는 대학을 포기하고     

상고를 가야 했다.     

언니는 진학을 못하고 남동생 밥해주러      

따라갔다.     

공장 다니며 반찬값 벌었던 얘기도      

이번에 처음 들었다.     

     

각자의 삶을 한 발짝 깊숙이 들여다보면     

대하소설 한편씩 묻고 사는 것 같다.     

미처 다 다 옮기지 못하는 사연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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