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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봉기 Mar 20. 2022

생존자의 전쟁 체험담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70여년이 훌쩍 지났는데 그때 남쪽으로 내려와서 살게 된 분들을 '실향민'이라 부른다. 지금은 실향민들중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다. 지금 가끔 만나는 사람들중 부친이나 모친이 한국전쟁때 월남한 경우가 있고 최근에 만난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된 부친이 나의 부친처럼 전쟁포로 생활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전에도 부친이 한국전쟁때 직접 체험했던 것들을 궁금해서 물어 보기도 했는데 역사를 강의하는 친구 하나는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란 조언을 하길래 전해들은 내용을 수첩에 기록해 두기도 하였다. 이번에 부친을 만났을 때 전쟁 발발부터 일정기간 동안의 체험한 바를 좀 더 자세히 물어보고 이번 글에 올리게 되었다.


나의 부친은 함경남도 북청군 옆에 위치한 이원군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 길림성 연변 부근 도문에 이주, 10여년을 보낸 후 다시 고향에 돌아와 학교를 다녔는데 생모가 세상을 떠난 후 방황을 하던 차에 군에 입대했고 입대후 6개월후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함경북도 회령 소재 인민군 15사단 소속 포병으로 3개월 훈련을 받고 6.22일 이동 24일 강원도 감화까지 내려왔다는데 그 다음날이 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이 된다.


그리고는 춘천에 28일 도착, 춘천지역을 통과할 때 앞서 내려온 인민군 부대가 매복한 남한군의 공격을 받아 예상외로 고전을 했는데 탱크가 불타는 등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보여주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그후 여주로 이동, 하루에 70리씩 걸어 영월, 제천, 단양, 풍기를 거쳐 안동에 도착하였다. 그때부터 9월말까지 낙동강 전선에서 한치 양보없는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자 인민군들은 북으로 후퇴하며 10월 2일 정선에 도착했다. 그때 부친은 발바닥이 벗겨지고 걷기가 어려워져 대열에서 조금씩 뒤처지자 상관이 총을 꺼내 겁을 주며 협박을 했다. 그때 비행기 폭격으로 병력이 흩어질 때 부친은 자구지책으로 소속부대를 이탈하게 되었다.


그리곤 패잔병 신세가 되어 일주일간 정선의 산골을 떠돌아 다녔다. 이집저집 문을 두드리며 먹을 걸 좀 달라고 해서 잡곡으로 만든 죽을 얻어 먹고 문칸옆에 벽을 기대고 앉으면 졸음이 쏟아졌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주인이 자기집에 있었단 말은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닐 때 인민군이 후퇴하며 사살한 걸로 추정되는 흰색 옷차림의 치안 담당자들 주검을 보았는데 그중 하나는 혀가 입 밖으로 나와 있는  혐오스러운 모습이어서 몇일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20리밖에 국군이 있는 터라 생명의 위협을 느껴 자수를 하면 죽이진 않는지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는데 그리 할 경우 모아서 수용소로 보낸다는 대답을 듣고 자수를 결심했다.


지서에 가서 자수를 한 다음 여기저기서 모인 포로들은 석탄차에 실려 10월 15일 부산 거제리로 집결되었고 1951년 3월에 거제도 수용소로 보내져 정전 때까지  지긋지긋한 수용소생활을 하게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 발발시 부친이 체험한 내용을 나름 스케치해 보았다. 과거의 일을 기록하는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마다 생각에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직접 체험한 사람의 역사적 기록이란 건 꽤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체험자가 세상을 떠날 경우 그 경험담은 더 이상 듣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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