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아직 학벌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입시에 매달렸던 이유도 학벌이 그만치 사회생활이나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우리 아제들 세대에는 뭐니 뭐니 해도 S 대였다. 대학에는 전공이 있고 결국 전공은 진로를 결정한다. 하지만 그때는 '교'가 '과'보다는 위에 있었다. 따라서 흔히 Y대 상대, K대 법대 했지만 그 위에 S대 철학과나 농대가 있었던 게 현실. 그 후 우리 때에는 교보다 과를 중시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우리 부모 세대 때에는 다들 먹고살기가 어려워서였는지 대학 진학이란 건 일부 계층의 관심사였다. 특히 여성들의 대학 진학은 특권층에서나 가능했기에 공부를 잘했던 여성은 대개 여상에 진학하고 졸업 후 은행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시집가면 남부럽지 않았다.
그 후 경제사정이 놀랄 정도로 좋아져서 실업계로 진학하는 사람들 수가 줄었고 너도나도 대학을 진학하려 하다 보니 이제는 실업계 학교가 인문계로 전환되었고 대졸자가 크게 늘며 대졸자 중 실업자수도 증가하였다.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던 사람이 이제는 고인이 된 김대중과 노무현이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상고를 졸업하고 자수성가를 하였다. DJ는 1988년 말 5공 청문회 때 당시 국회의원이던 노무현이 정주영 회장을 비롯 주요 증인을 대상으로 철저히 준비된 자료로 송곳 같은 질문을 하며 이들을 쩔쩔매게 하던 걸 보고 평민당의 당원들을 모아 노의원을 극찬하며 배우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노무현은 자신과 같은 고졸이었고 법대 졸업자도 통과하기 어려운 사법고시를 합격하며 어떤 대졸자에도 손색이 없었기에 DJ 스스로는 과거 자신의 모습이 노무현에게 투영되었던 걸로 보인다. 그 후 계속 노무현을 근거리에 두고 지원하며 대통령이 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대학 진학 입학원서를 쓸 때 당시 교사들이 1순위로 권하던 대학은 전공과 무관하게 S 대였다. 따라서 Y대나 K대를 지원하려 했던 친구들은 일단 보류를 시키거나 겁을 주기도 했다. 결국 몇몇 친구는 S대 농대를 갔다가 재수를 하여 Y대나 K대를 간 경우도 있었다. 왜 굳이 과와 관계없이 S대를 그다지 권유했는지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당시는 대부분 학교들이 비슷했던 걸로 알고 있다. 한마디로 좋지 않았던 관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학 학벌이라는 것은 10대 때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어떠했던가를 보여준다. 우리 이전엔 고등학교도 시험을 봐서 갔으니 고등학교 학벌은 중학교 성적이 어떠했던가를 보여준다. 그렇게 3~6년에 걸쳐 형성된 학벌이 과거에는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한번 재고의 여지가 있다. 학벌이 변변치 않았지만 자신의 강점을 살려 사회생활을 하며 성공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과거 명문고나 명문대 출신이라는 학벌 하나로 평생을 떵떵거렸던 관행은 현재와 같이 각 부문별 전문성을 요하는 시대에 잘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학벌보다 차라리 자격증이나 부문별 전문성을 내세우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건 아닌지 싶다.